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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을 걷다> - 이완용 주택 1. 조선 후기, 한양 도성 내부는 사는 곳이 나뉘어져 있었다. 북악산 밑 북촌은 주로 뜨르르한 세도가들이,

ree610 2025. 4. 30. 08:28

<서촌을 걷다>
- 이완용 주택

1.

조선 후기, 한양 도성 내부는 사는 곳이 나뉘어져 있었다. 북악산 밑 북촌은 주로 뜨르르한 세도가들이, 남산 아래 남촌에는 몰락한 양반들이,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의 서촌에는 주로 중인들이 모여 살았다.

중인들은 요즘으로 따지면 천문학자, 외교관, 의사와 같은 전문가 집단이었다. 따라서 아는 것도 많고 재력도 상당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신분 상 높은 지위로 나가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때로 예술을 후원하거나 예술활동을 함으로써 이런 설움을 달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이 터를 잡고 살던 서촌은 그래서인지 조선시대부터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운 탓인지 일제강점기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가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2.

경복궁역을 나와서 청와대 쪽으로 죽 걸어 올라다가 보면 신한은행 건물이 나온다. 은행을 끼고 안쪽 길로 들어서면 옥인동 19번지가 나온다. 그리고 그곳에 서있는 다소 특이한 건물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건물,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다. 바로 을사늑약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완용의 집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옥인동 19번지(2817평), 18번지(280평), 2번지(646평) 등 4,000평의 땅이 매국노 이완용의 땅이었다.

이완용은 1905년 을사늑약에 서명하고,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퇴위시킨 주역이다. 1910년에는 통감관저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과 강제병합 조약에 조인함으로써 다시 한번 존재감 뿜뿜한 인간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공로들로 인해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와 은사금 15만원을 받는다.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에서 경성 최대 현금 부자였던 이완용은 이곳 옥인동에서 천수를 누리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3.

이완용 집은 둘째 아들과 장손에게 상속되었다가 해방 이후에는 적산으로 몰수되어 미군의 소유가 된다. 그러다 여러 필지로 분할되면서 여러 부속 건물들이 사라지고 지그므이 옥인교회, 아름다운 재단, 길담서원 등으로 바뀐다. 이제 옥인동 19번지에 일부 건물과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 이의진 님
<덧> 사진은 차례대로 ‘이완용 주택’ 그리고 또 다른 매국노 윤덕영의 벽수산장 터(흔적), 근현대사의 비극적 현장 옥인동 대공분실.....그리고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