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성령강림 24주, 창조절 11주) 주일 설교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조헌정 목사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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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에 기록된 문자는 ‘닫힌 말씀’(텍스트1)이다. 이 ‘닫힌 말씀’을 기록된 당시의 정치/문화/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역사적 상황(컨텍스트1)에 비추어 해석(exegesis)할 때, ‘열린 말씀’(텍스트2)이 된다. 설교는 이 ‘열린 말씀’(텍스트2)을 오늘의 상황(컨텍스트2)에 비추어 재해석(eisgesis)하는 작업이다. 이때 비로소 성서는 오늘의 청중을 향한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된다. (조헌정)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부활은 깨어진 세계를 지금껏 해석하고 움직여 온 거짓 이론과 폭력적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이기에, “부활은 우리 모두를 반역자로 만든다”. 부활과 함께 새로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이라는 부조리를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부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 지구민주주의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지구 가족의 한 일원으로서, 우리가 (다른 생물들의 먹이가 되는) 동물이라는 것을 자각하도록 한다. (반다나 시비)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 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다. 한국교회는 성령강림 후 혹은 창조절로 부른다.
[주일 본문]
룻 3:1-5; 4:13-17; 시 127; 히 9:24-28; 막 12:38-44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룻기 3:1-5; 4:13-17}
1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말하였다. "얘야, 네가 행복하게 살 만한 안락한 가정을, 내가 찾아보아야 하겠다.
2 생각하여 보렴. 우리의 친족 가운데는 보아스라는 사람이 있지 아니하냐? 네가 요즈음 그 집 여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만, 잘 들어 보아라. 오늘 밤에, 그가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부를 것이다.
3 너는 목욕을 하고, 향수를 바르고, 고운 옷으로 몸을 단장하고서, 타작마당으로 내려가거라.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마칠 때까지, 너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4 그가 잠자리에 들 때에, 너는, 그가 눕는 자리를 잘 보아 두었다가, 다가가서 그의 발치를 들치고 누워라. 그러면 그가 너의 할 일을 일러줄 것이다."
5 룻이 시어머니에게 대답하였다. "어머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
13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여인이 자기 아내가 되자, 그는 그 여인과 동침하였다. 주께서 그 여인을 보살피시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14 그러자 이웃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주께 찬양을 드립니다. 주께서는 오늘 이 집에 자손을 주셔서,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늘 기리어지기를 바랍니다.
15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가 아기를 낳아 주었으니, 그 아기가 그대에게 생기를 되찾아 줄 것이며, 늘그막에 그대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16 나오미가 그 아기를 받아 자기 품에 안고 어머니 노릇을 하였다.
17 이웃 여인들이 그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서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다!" 하고 환호하였다. 그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하였다. 그가 바로 이새의 아버지요, 다윗의 할아버지이다.
[신학적 관점]
가부장적 시대에 힘없는 여인들의 생존 투쟁과 전략을 보여주는 룻기는 에스더서와 함께 여성의 이름으로 된 책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신학적 의의는 크다. 때로 야사(野史)가 정사(正史)보다 인간사의 참을 밝혀준다. 힘없고 버려진 두 홀어미 나오미와 룻이 함께 펼쳐나가는 사랑 승리의 이야기는 남성들의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이스라엘 민족의 순혈주의 가나안 정복 역사를 부끄럽게 만들면서 누가 참다운 인간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본문의 나오미와 룻의 행동은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비난받을 수 있겠지만, 가부장 시대에는 집안의 대를 이어가는 ‘시형제 결혼제도’(go’el, levirate law, 레 25장, 신 25장)는 합법적인 일이었다. 보아스는 말론의 친형제가 아니었기에 이 제도를 따라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본문은 남녀 간의 사랑을 기초로 이를 확대해석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
우리나라에도 과거 첩(妾)이 허용되는 때가 있었고, 모슬렘국가에서는 지금도 허용이 되고 있다. 이는 여성이 생활력을 가질 수 없었던 시대에 전쟁으로 인해 남성들의 숫자가 모자라 홀로 살아가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였다. 물론 부자와 권력에 의한 악용도 많았다. 오늘날 목회적 차원에서 홀로 된 여인들을 돌보는 제도가 있는가?
[주석적 관점]
아시리아나 바빌론 제국의 통치 전략은 민족들을 섞이게 함으로 저항 투쟁을 약화하는 혼혈정책이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먼저 이를 경험했고, 남왕국 유다 또한 이를 경험했다. 민족순혈주의는 이론상 가능했을 뿐, 실제에 있어서는 이는 가능한 방식은 아니었다. 모압 여인 룻의 다윗 가문 입주는 요나서와 함께 포로기 이후의 탈민족적인 신학적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히브리성서에서 룻기는 성문서(케투빔)로 분류된다. 요나서와 함께 문학적 요소가 매우 강하다. 유대인들의 고대 족보에서는 여성들이 포함되지 않는다.
[설교적 관점]
엘리멜렉 이름의 뜻은 “나의 하느님은 왕으로 드러나신다”이다. 룻기는 생명의 YHWH 하느님께서 생명을 낳는 인간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헤세드의 이야기이다. 오벳의 뜻은 “운명의 자녀”이다. 활기차고 분별력이 있는 모압 여인 룻은 유대 역사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주인공이 되며 그의 자녀 오벳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 구원역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오늘날의 룻은 누구이며 오벳은 누구인가?
마태복음 1장 예수의 족보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다말, 라합, 룻, 밧세바, 모두 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이방 여인들이었다. 마리아 또한 갈릴리 나사렛 출신으로 정통 유대인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여인들이 없었다면 다윗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 또한 없었을 것이다라는 사실은 하느님의 구원사를 이해함에 있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가? 역사적으로 유대민족과 모압민족은 적대적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
{시편 127}
1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일이다.
2 이른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밤늦게야 잠자리에 드는 것도, 먹으려고 애쓰는 것도 다 헛되고 헛되니 야훼께서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잘 때에도 배불리신다.
3 자식은 야훼의 선물이요, 태중의 소생은 그가 주신 상급이다.
4 젊어서 낳은 자식은 용사가 손에 든 화살과 같으니,
5 복되어라, 전동에 그런 화살을 채워 가진 자, 성문에서 원수들과 담판할 때에 높은 데서 이야기하리라.
{히브리서 9:24-28}
24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성소의 모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에 들어가셨습니다. 이제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십니다.
25 대제사장은 해마다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26 그것은, 그가 그 몸을 여러 번 바치셔야 하였다고 하면, 그는 창세 이래로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기를 희생제물로 드려서, 죄를 없애시려고 시대의 종말에 오직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한 번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치셨고, 두 번째로는 죄와는 상관없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신학적 관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 희생 제사에 기반한 모세 율법에 기초한 유대교 시대가 끝났다는 주장이다. 이는 희생 제사, 할례, 정결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일부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으로 인해 초대교회에 분란이 생기고 있었기 때문이다(2:1). 그리하여 예수를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명명하였던 것이다(2:17; 4:14-5:10). 이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자발적인 희생으로 보는 관점으로 신은 반드시 누군가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이를 대신하는 희생을 필요로 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신인가 하는 질문과 그렇다면 성전숙청과 같은 일을 일으켜 민중폭동이라는 오해를 받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질문을 낳는다.
[목회적 관점]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주일성수나 십일조헌금 등은 신앙인의 필수 요소로 가르친다. 때로 일천번제를 대신하는 천일새벽기도를 진행하기도 한다. 고대 종교에서의 희생 제의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주석적 관점]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니 우리는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이고 복음서의 예수는 계속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설교적 관점]
24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 곧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가 아닌 하늘로 들어가셨다고 한다. 매주 예배가 진행되는 이 땅의 교회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인가? 아닌가? 단지 십자가 형상만 달려있으면 되는 것인가? 이 또한 예수 시대의 반복되는 성전 제사이 또 다른 형태이지 않는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과 하늘 터전은 무엇으로 구별되는가?
개신교는 잘못하면 서구교회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반복하는 위험성과 ‘종교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중세 가톨릭의 잘못을 비난하는 곧 형제와의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혐오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마가복음 12:38-44}
38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41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 쪽에 앉으셔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44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신학적 관점]
본문은 참 제자도에 관한 가르침으로 예수 시대의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비판하고 있는 여러 사안 중의 하나이다(11:27-12:44). 헌물은 마음의 크기에 있지, 물질의 크기에 있지 않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당대의 율법학자들 또한 때로 예수로부터 인정을 받기도 했다. 하나의 성서 구절을 갖고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싸잡아 비난하는 잘못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 마가복음은 기본적으로 갈릴리 민중 대 예루살렘 성전 체제와의 대결과 저항이라는 하느님 나라 신학에 기초하고 있다. 11장 예루살렘 입성에 이은 성전 숙청 이후 이러한 대결은 십자가 처형을 향해 계속 고조되고 있다.
[목회적 관점]
율법학자는 오늘의 종교 지도자들을 말한다. 목회자로서의 자신을 예수 당시의 율법학자로 비유한다면 어떤 점에서 칭찬받고 어떤 점에서 비난받을까? 종교 엘리트 의식은 없는가? 부자와 권세가를 대하는 태도와 힘없고 가난한 자를 대하는 나의 마음은 한결같은가?
[주석적 관점]
열에 하나를 드리는 십일조 정신은 나머지 아홉 또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써야 한다는 결단 상징 예물이지, 나머지 아홉은 자신의 뜻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뇌물?) 예물이 아니다.
[설교적 관점]
1960년대에는 봉헌(奉獻) 혹은 헌금(獻金)이라는 말 대신에 연보(捐補)라는 단어가 훨씬 자주 쓰였다. 연보는 이웃 나눔을 전제한다. 십일조 헌금의 정신은 이웃 나눔에 있다. 예수가 부자들의 헌물(獻物)을 비난하는 것은 실상 이 헌물이 성전 제사장들의 사적 용도로 쓰이거나 그냥 성전 창고에 쌓여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제사장들이 헌물의 기본 율법 정신을 가르치기보다는 부자들의 명예심을 이용하여 경쟁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부자들의 자기 의인화가 생겼다. 오늘날 교회는 물질주의에 빠졌다고 세상 사람들은 비판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헌금 부담으로 교회 다니기를 꺼리고 있고, 제직 임명 시 특별헌금을 은근히 강요하기도 하여 임명을 거부하기도 한다. 이는 잘못하면 매관매직(賣官賣職)이 된다. 때로는 과부의 ‘전 재산 드림’을 은연중에 강조하는 설교 또한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경우 교회는 그분의 남은 삶을 책임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90년대 미국장로교(PCUSA) 가장 큰 아틀란타의 Peachtree 장로교회의 해링톤목사는 교인들이 크게 늘어남(약 11,000명)에 따라 새 건물을 짓기로 하였는데, 당시 교회 건축위원회가 약 이천만 불의 건축예산을 공동의회에 제시하였는데, 이때 해링톤목사는 또 다른 이천만 불의 사회기금 헌금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제동을 걸었었다. 이는 필자는 물론 범사회적으로 큰 감동을 준 바 있다. 교회의 기본 사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친 것이다. 지금은 교세(약 3,000명)가 많이 줄었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