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2:8-15
<성별이 아닌, 자격을 기준으로>
1. 여자들의 옷과 마음의 자세(8-10)
바울은 기도에 대해서 가르칠 때 남자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바울이 특히 남자들을 위해 기도를 부탁한 것은 남자들이 주로 거짓 교사들로 인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보다는 남자들에게 훨씬 더 많은 책임과 의무가 주어졌기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 역시 남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스리는 자, 가르치는 자 모두 남자였기에 그 당시 대부분의 문제의 원인도 당연히 남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남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분노와 다툼이 없도록 모든 곳에서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분노한다. 그 분노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다툼까지 가게 된다. 그러나 기도는 분노와 다툼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요인을 제거할 수 있는 거룩한 행동이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분노와 다툼을 용서와 환대로 바꿀 수 있는 요소인 것이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이를 위해 기도하되 거룩한 손을 들고 해야 한다.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께 항복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자 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손을 들되 거룩한 손, 곧 구별된 손을 들어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께 맡기는 행동이다.(8)
이젠 여자 성도들의 행동에 대해서 교훈한다. 먼저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히 옷을 입고 소박함과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라고 했다. 이와 같이라는 것은 앞에서 남자들에게 요청한 모든 곳에서 분노와 다툼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해야 함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여자들은 옷차림에 있어서 더욱 주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옷의 기능은 단순하게 몸을 가리고 보호하는 역할뿐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기능을 상징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정체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바울은 최대한 단정함과 소박함으로 옷을 입을 것을 교훈했다. 머리를 어지럽게 꾸미거나 금이나 진주 비싼 옷으로 치장하지 말라고 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답게 착한 행실로 몸을 꾸미라고 했다. 만약에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선한 행실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의 고백은 거짓 고백일 수밖에 없다.
입술로만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면서 그에 합당한 여호와 경외함의 태도가 없다면 그는 바리새인과 같은 위선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한다면 앞에서 말한 비싼 장신구로 자신의 겉을 화려하기 꾸미기보다는 단정함과 소박함으로 자신을 겸손하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9-10)
2. 여자에 대한 권면(11-15)
바울은 이어서 여자들은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고 조언한다.
11절 이하의 말씀은 교회에서의 여자의 역할에 대해서 가장 많은 논쟁이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여자의 역할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이 부분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이들은 여자는 남자에게 무조건 순종하고 교회에서 무조건 잠잠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순종을 단순하게 위아래의 권위로만 해석하는 것이다.
순종은 단순하게 누군가를 종속시킬 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 성경적 순종은 하나님의 질서를 내 삶에서 적용하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 순종이 누군가를 종속시키고 굴복시키는데 무분별하게 사용되었는가! 오히려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허락하셨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순종은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순종함인데, 남성우월주의자들은 이것을 남자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왜곡하여 해석하고 가르친다. 바울이 여자들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라고 했다면 이 말씀은 남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남자들도 하나님과 교회의 권위 앞에서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11)
또한 여자들은 잠잠하라고 했다. 이 말씀 또한 교회에서 여자의 역할을 제한하는 근거로 쓰이는 말씀이다. 만약에 그 당시 여자들이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켜 잠잠하고 침묵하라고 했다면, 당연히 교회를 시끄럽게 하는 남자들도 잠잠하고 침묵해야 한다. 그 당시 교회의 지도자가 거의 남자였다면 잠잠하고 침묵해야 하는 대상은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훨씬 더 많지 않았을까? 그러나 잠잠함과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 더 힘 있고 영향력을 줄 수 있는 행위이다. 잠잠함과 침묵을 부정적인 의미보다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잠잠하라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교회를 위해 존재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 대상은 여자들보다 오히려 남자다. 많은 말과 행동으로 주의 가르침을 왜곡하지 말고, 잠잠하게 가르침을 묵상하고 삶으로 살아낸다면 그 잠잠함의 행동이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12)
바울은 앞에서 여자들이 순종할 것과 잠잠하라고 한 것의 진의를 말한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으심을 받고, 그 이후에 하와가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담이 죄 앞에서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임을 당해 죄에 빠졌기 때문이다. 즉, 이건 질서의 문제다. 당연히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모든 명령은 그가 먼저 받았다. 이것은 누가 우월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당연히 아담이 먼저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가 다스리고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한다. 남자라서가 아니라 먼저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아담은 당연히 하와를 가르쳐야 했고, 옳은 길로 인도해야 했다. 그런데 반대로 하와가 아담을 꼬드겨 선악과를 먹게 함으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됐다.
바울은 먼저 이렇게 죄가 들어온 과정이 하와를 통해 아담에게, 즉 여자를 통해 남자에게 들어온 과정을 말함으로 하나님이 처음 만드신 질서에 의해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면에 숨겨진 것은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의 질서에 의해 주어진 자가 올바른 교훈을 다른 대상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는 근거의 말씀으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바울은 다른 서신서를 통하여 남자와 여자를 동일하고 평등한 존재로 보았다.(13-14)
바울은 이어서 여성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지에 대한 조언을 하고 있다. 여자들이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가지고 정숙하게 살면 아이를 낳는 일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 하고 있다. 먼저 여인들의 믿음을 점검하며 그들도 예수를 주시라 인정하는 믿음 가져야 함을 말하며, 다른 이를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다른 사람과 구별된 거룩함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여자들이 가져야 하는 정숙함의 요소다. 이런 요소들을 가진 여자가 아이를 낳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해산하는 고통은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이다. 하나님이 내리신 그 형벌은 오히려 생명을 잉태하는 너무나 중요한 역할이 되었다. 이렇게 여자는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그리고 정숙함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소유할 때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15)
3. 삶 속으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자기중심적으로 즉, 아전인수 격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나와 관련이 있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면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제외하지만, 자신이 주장하는 생각과 부합하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는 것이 마치 진리의 최후 보루인 양 집착하고 매달린다. 특히 문제가 되는 해석 방식 중 하나는 성경의 구절을 무조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특히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논할 때 이런 해석 문제가 두드러진다. 이와 관련되어 있는 내용의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고 무조건 남자한테 복종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을 펼친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는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남성과 여성은 하나라고까지 강조했다.
고린도전서 11장 11-12절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상호 의존적인 관계임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구절들은 바울이 진정으로 의도한 바가 남성과 여성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오히려 많은 여성 지도자들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미리암, 드보라, 훌다, 에스더 신약에서는 브리스길라, 뵈뵈, 유니게와 로이스 등이 있다. 이 여성들은 선지자, 사사, 예언자, 선생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직간접적으로 남성들과 같이 지도자로 쓰임 받았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이 여자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특히 오늘날 여성의 강단 사역을 금지하는 교회들이 주일학교에는 여성 사역자를 세우는 이중적인 태도는 문제를 드러낸다. 소위 주일 대예배(?) 외 주일학교 강단은 예배가 아니라 집회니 상관없다고 말하는 변명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결국 교회에서 순종하고 잠잠해야 할 대상은 여성이라는 성별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 모두 중에서 영적으로 미성숙하거나 준비되지 않은 자들이다. 또한 가르치고 다스리는 역할을 제한해야 할 대상 역시 성별이 아닌, 지도자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다. 교회는 성숙한 믿음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에게 사역을 맡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를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 성경의 본래 메시지는 차별이 아닌 포용과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의 연합에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더 이상 성별로 제한을 두기보다, 누구든지 성숙한 믿음과 사랑으로 복음을 살아내는 사람이라면 그 길을 함께 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성경묵상 #매일성경 #묵상과설교 #디모데전서2장 #여성에대한권면 #편협한성경해석이편견을가져온다 #성별이아닌성숙한믿음과지도자의자격을가지고사역의길을열어줘라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자기중심적으로 즉, 아전인수 격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나와 관련이 있거나 나를 불편하게 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면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제외하지만, 자신이 주장하는 생각과 부합하는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는 것이 마치 진리의 최후 보루인 양 집착하고 매달린다. 특히 문제가 되는 해석 방식 중 하나는 성경의 구절을 무조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특히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논할 때 이런 해석 문제가 두드러진다. 이와 관련되어 있는 내용의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고 무조건 남자한테 복종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을 펼친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는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남성과 여성은 하나라고까지 강조했다.
고린도전서 11장 11-12절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상호 의존적인 관계임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구절들은 바울이 진정으로 의도한 바가 남성과 여성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오히려 많은 여성 지도자들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미리암, 드보라, 훌다, 에스더 신약에서는 브리스길라, 뵈뵈, 유니게와 로이스 등이 있다. 이 여성들은 선지자, 사사, 예언자, 선생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직간접적으로 남성들과 같이 지도자로 쓰임 받았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이 여자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특히 오늘날 여성의 강단 사역을 금지하는 교회들이 주일학교에는 여성 사역자를 세우는 이중적인 태도는 문제를 드러낸다. 소위 주일 대예배(?) 외 주일학교 강단은 예배가 아니라 집회니 상관없다고 말하는 변명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결국 교회에서 순종하고 잠잠해야 할 대상은 여성이라는 성별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 모두 중에서 영적으로 미성숙하거나 준비되지 않은 자들이다.
또한 가르치고 다스리는 역할을 제한해야 할 대상 역시 성별이 아닌, 지도자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다. 교회는 성숙한 믿음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에게 사역을 맡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를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 성경의 본래 메시지는 차별이 아닌 포용과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의 연합에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더 이상 성별로 제한을 두기보다, 누구든지 성숙한 믿음과 사랑으로 복음을 살아내는 사람이라면 그 길을 함께 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디모데전서 2:8-15
<성별이 아닌 자격을 기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