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 설교 자료(2024년 3월 17일, 사순절5)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고, 여기에 필자의 한국 목회 20년, 미국 목회 20년의 경험과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 성탄절, 부활절은 내용을 가리키지만, 사순절은 기간을 가리킨다. 사순절은 의미로 보나 정확성으로 보나 적절한 용어는 아니다.
나는 왜 사순절 대신 저항절이라 부르는가. 예수가 저항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고난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처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고통받았다. 예수는 수동적으로 고난받은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예수는 조용히 살다가 처형된게 아니다. 기도하다가, 성서공부하다가, 예배 참석하다가 처형된게 아니다. 저항했기에 처형되었다. 사순절 단어는 예수의 저항을 외면하고 있다. 예수 고난보다 예수 저항을 더 생각하고 따르는 시기다.(가톨릭 성서학자 김근수)
[주일 본문]
렘 31:31-34; 시편 119:9-16; 히 5:5-10;
요 12:20-33(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예레미야 31:31-34
31 "그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과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이다.
32 이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나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다. 나 주의 말이다.
33 그러나 그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34 그때에는 이웃이나 동포끼리 서로 '너는 주를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나 주의 말이다.“
[신학적 관점]
본문은 짧은 구절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지금까지의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완전히 뒤집는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된다. 애초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모세를 통한 십계명에 기초한 율법과 계명에 있었다. 곧 십계명에 기초한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는 일에 인간의 구원은 조건 지어 있었고, 이 계명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로 종결되어지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삶의 중심이자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집 성전이 바빌론제국의 침략으로 무너졌다. 단순히 건물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믿어왔던 모든 것의 기초가 무너지고 말았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생각하는 힘에 있다. 이 생각하는 힘은 그가 믿는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관의 근본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런 백성을 향해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 ‘가슴에 새겨줄 새 법’을 맺겠다고 선포한다. 율법의 기초인 성전이 사라졌으니 율법을 대신할 새로운 법이 나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로되, 그런데 이 법은 문자가 아닌 가슴 곧 사람의 마음에 새긴 법이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양심인가? 이성인가? 아니면 윤리적 판단인가? 그리고 이는 개인에 따라 그 기준이 다 다르다.
신앙은 공동체에 기반하는 것이 바람직한데, 본문은 개인이 기준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곤혹한 말씀이다.
그런데 더 곤혹스러운 것은 마음의 법이 새 법이라면 옛 법 곧 모세 오경의 말씀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무효화되는 것인가? 아니면 보조자료로서 여전히 어떤 효력을 갖고 있는 것인가?
[목회적 관점]
흔히 사람들은 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악인의 양심과 선인의 양심은 다르다. 양심은 상대적인 용어이다. 교인마다 입장이 다르다. 심지어는 상반된 주장을 모두 하느님의 이름으로 주장한다.
[주석적 관점]
마음에 새긴 법 곧 내면화된 법의 특징은 가르칠 필요가 없고,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이전 모세의 율법(출 34장)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제 바빌론에서의 노예생활은 종교활동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바빌론의 포로된 백성들은 자신들의 당하는 고난이 자신들의 죄로 인한 결과로 받아들였다. 자포자기하기 쉬운 저들에게 희망이 되는 말씀이 된다.
주석적으로 본문을 특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의 말씀으로 이해해야지 이를 오늘날의 상황에 일반화하게 되면 많은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설교적 관점]
가슴에 새기는 새로운 법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법은 강제적이다. 강제하면 반발이 일어난다. 법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지 이를 처음부터 들이대면 자발성이 결여되기에 오래가지 못한다.
달리 말해 신앙의 노예화를 피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자유를 지나치게 허용하면 판단의 기준이 애매해진다.
개인의 판단과 자유에 기초한 새 법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풀어가기 위해 오늘 서신서와 복음서의 본문인 히브리서의 ‘대제사장’과 요한복음의 ‘밀알 하나’라는 말씀을 함께 고민해 보자.
이 단어는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복종을 통한 화해자로서의 역할과 타자 구원을 말하고 있다.
시편 119:9-16
9 젊은이가 어떻게 하면 깨끗한 길을 가오리이까? 당신께서 일러 주신 말씀대로 살면 되오리이다.
10 내가 마음을 다 쏟아 당신을 찾사오니 당신 명령을 떠나지 않게 하여 주소서.
11 당신께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주신 약속을 마음에 간직하였사옵니다.
12 야훼여, 찬송을 받으실 분이여 당신 뜻을 가르쳐 주소서.
13 친히 내리신 모든 법규를 이 입술로 모두 되풀이했사옵니다.
14 어떤 부귀를 누리기보다도 당신의 언약을 지키는 것이 더 기뻤사옵니다.
15 당신의 계명을 되새기며 일러 주신 길을 똑바로 걸으리이다.
16 당신 뜻을 따름이 나의 낙이오니 당신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히브리서 5:5-10
5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스스로를 높여서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6 또 다른 곳에서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7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고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경외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어주심을 얻었습니다.
8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복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서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신학적 관점]
제사장은 희생 제물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 역할을 담당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이해하는 히브리서 저자의 신학은 그런 면에서 타당하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으로 왕, 제사장, 예언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 그 스스로가 희생 제물이 되셨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신도들의 신앙을 고취시키 위해 쓴 것이기에 신학서신이라기 보다는 목회서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목회적 관점]
목회자들 사제로서 예배와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신자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담당한다. 중재자는 중간에 위치하지만, 형편에 따라 때로는 인간의 편에, 때로는 하느님의 편에 서기도 한다. 인간도 잘 알아야 하겠지만, 하느님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주석적 관점]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적 사역을 말하고 있는데, 특히 레위기에 나타난 속죄의 날(욤키퍼)의 대제사장의 역할에 비유하고 있다. 이 땅의 역사적인 예루살렘 성전에는 관심이 없고 이는 하늘 성전의 그림자로 본다.
7절은 공관복음서의 예수의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와 십자가상의 외침을 떠올리게 한다.
8절의 예수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복종’을 배우셨다는 구절은 신학적인 논란이 있을 수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는 9절의 우리가 ‘고난’을 통해 예수에게 ‘복종’함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어법이다.
[설교적 관점]
본문은 1세기 로마제국의 핍박 상황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본문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설교자는 고난의 승리를 통한 희망이란 관점에서 본문을 오늘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을 하여 전달해야 할 것이다. 우선 대제사장이란 명칭은 오늘의 교회에서는 생소한 이름이다. 잘못하면 종교적 권위와 전통에 억매인 어떤 상을 떠올리기 쉽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비유하여 말하는 것은 속죄의 날에 지성소에 들어가 하느님에게 직접 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브라함 이야기에 나오는 멜기세덱이 갑자기 대제사장의 원형으로 언급되는 것은 뜬금없다. 창 14:18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이야기에 등장하는 멜기세덱(성만찬과 십일조의 유래)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면 본류를 놓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는 구절이다. 오늘 세상에서 전쟁과 기아로 인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 예수그리스도께서 간구하시는 것은 저들이 불의한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받아 온 인류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이다. 멜기세덱의 뜻 또한 의와 평화의 왕이다.
요한복음 12:20-33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이 몇 있었는데,
21 그들은 갈릴리의 벳새다 출신인 빌립에게로 가서 "선생님, 우리가 예수를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22 빌립은 안드레에게로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은 예수께 그 말을 전하였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25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26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 주실 것이다."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내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 때에 왔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29 거기에 서서 듣고 있던 무리 가운데서, 더러는 천둥이 울렸다고 하고, 또 더러는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고 하였다.
3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깨우치시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깨우치시려는 것이다.
31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것이다.
32 내가 땅에서 들려 올라갈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나에게로 끌어올 것이다."
33 이것은 예수께서 자기가 당하실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암시하려고 하신 말씀이다.
[신학적 관점]
본문의 역사적 정황은 유대인들의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과월절, Passover)에 일어난 일이다. 유월절은 430년간의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해방절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몰려온다. 학자들은 당시 예루살렘 인구를 20만으로 보고 대략 10배에 가까운 순례자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해방과 자유 독립의 열기가 가장 높이 올라가는 때이다.
앞의 구절에는 나사로가 무덤에서 소생하는 얘기와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온다는 얘기를 듣고 이를 시기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어 마리아가 죽음을 준비하는 의미로 예수의 발을 씻긴다. 그리고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백성들의 환호소리를 들으며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다.
공관복음서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수난사로 보는 반면, 요한은 이를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는 ‘영광’이라고 부른다. 곧 영광의 신학이다.
하늘의 소리는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그리고 변화산상에서 울린다. 요한은 예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 일로 고백할 때 들린다.
[목회적 관점]
목회자의 길은 때로 고난의 길이다. 혼자 묵묵히 모든 일을 껴안고 가야 할 때가 많다. 예수는 십자가의 길을 영광의 길로 말한다. 목회자는 예수를 따라 사람의 시선이 아닌 하느님의 시선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주석적 관점]
그리스 사람 얘기가 왜 필요할까? 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 아니면 그리스사람이다. 주석학자들은 그리스 사람으로 본다. 이는 당시 종교철학사상의 중심인 그리스에까지 예수의 소문이 번졌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는 빌립-안드레의 2단계를 통해서 만날 수 있었다는 얘기는 이미 예고된 십자가 체포와 핍박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에 예수는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말한다. 여기서 영광은 십자가 죽음을 의미한다.
하늘의 소리는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그리고 변화산상에서 들린다.
[설교적 관점]
27절의 ‘때를 벗어난다’에서 때는 십자가 죽음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공관복음서에서 예수의 겟세마네동산 기도에서의 옮겨달라고 잔을 십자가 죽음으로 설명하는데, 필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예수는 이미 여러 차례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셨고 요한복음에서도 이미 2장에서 성전파괴를 언급하시며 삼일 후 부활을 말씀하셨다. 그런 분이 마지막에 이르러 죽음을 피하기 위해 기도하셨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나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역사상의 많은 인물들은 자기 죽음을 피하지 않았다. 이는 제자들과 민중들이 원하는 폭동의 유혹을 말한다.
공관복음서가 예수의 죽음을 불러오는 적대적인 세력을 대제사장들과 사두개파와 율법사와 헤롯당원들로 각기 달리 설명하는 반면 요한복음은 이들 그룹을 한 단어로 정리한다. ‘이 세상의 통치자’로.
요한복음에서의 십자가 사건은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개인의 구속 곧 사사로운 죄에 대한 용서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세상 통치자와의 대결을 말하는데, 여기서 세상(코스모스)은 하느님의 창조세계가 아닌 인간을 하느님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죽음의 제도를 말한다.
이는 오늘날 개인욕망충족을 위한 소비주의, 빈익빈부익부를 극단화시키는 자본주의, 집단과 집단, 나라와 나라를 전쟁광기의 대결로 몰아가는 패권주의, 자연파괴를 불러오는 인간편리주의 등이다.
부록: [고통은 거룩한 방해]
하루에도 밤과 낮의 구별이 있고 일 년의 시간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있듯이 우리 인생 또한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는 다양한 과정을 겪게 되어 있다.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삶의 큰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은 삶에서 그럴만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나의 행복을 위해 절대자를 믿고 신뢰하는 것을 넘어서서 칼 융이 말한 대로 내 안에는 수억만년의 인류의 경험이 집단 무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고, 그리하여 나라고 하는 개인의 삶이 나의 죽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집단 무의식 속에 덧붙여진다고 하는 영원성의 자각이라고 말한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는 말은 그냥 위로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인류의 풍성한 생명을 위한 창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고통을 하느님이 주시는 ‘거룩한 방해’라고 말하는 고백하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하여 넘어뜨린다’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이 두 번째 말은 장영희교수가 한 말인데, 장영희교수는 1952년생으로 2009년 57세의 나이로 사망한 서강대학의 영문학자이자 수필가였다. 그는 생후 1년 만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소아마비에 걸렸지만,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차별에 맞서 싸우고, 8년동안 지속된 암과의 싸움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어린 시절 겪었던 장애인의 차별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중학교까지는 학교가 가까워서 엄마가 데려다 줬어요. 그때 오빠가 대학생이어서 간혹 저를 데려다주고는 했지요.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택시를 타야 되는 거리가 되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택시 운전수들이 아주 불친절했거든요. 기본요금 나온다고 구박하고, 골목으로 들어간다고 구박하고, 그래서 토요일 같은 때에는 택시를 못 잡아서 다섯시간동안 길거리에 서 있어야 한 적도 있었어요. 그래서 그게 제일 힘들었죠.”
그녀는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는 책에서 행복의 3가지 조건을 ‘사랑하는 사람들’ ‘내일을 위한 희망’ 그리고 ‘나의 능력과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일’로 말하면서 소금 3%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에 나쁜 생각이 있어도 3%의 좋은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생각, 3%의 좋은 생각을 품는 것 자체가 기적이며 기적은 결코 쉬이 다가오는 것은 아니지만, 터벅터벅 쉼 없이 매일 매 순간을 최선을 다해 걸어가노라면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고 그때 사람은 나비나 새가 되어 하늘을 자유롭게 날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겉으로 보면 불우한 삶이었지만 내면에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살다간 장영희교수는 ‘신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하여 넘어뜨린다’고.
피아노 연주가이자 작곡가인 슈만의 일생을 그린 미셀 슈나이더는 <슈만, 내면의 풍경>이란 책에서 ‘고통은 초대받지 않았지만,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가면’이라고. 누구나 피하고 싶고 외면하고 싶지만, 굳이 찾아와 열어달라고 계속 문을 두드리는 존재가 고통이라는 말은 이해가 쉬운데, ‘가면이다’라는 말은 쉬이 다가오지 않는다. 고통은 분명히 현실인데, 이를 가면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면은 이를 벗기면 그 뒤에 실상이 있다는 말이다. 고통 너머를 보자는 말이라고 이해한다. 곧 나 자신을 객관화 대상화하라는 말이다.
[대제사장은 낮아짐의 상징]
제2성서에서 현대인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히브리서와 요한묵시록이다. 생활의 용어가 아닌 종교적 언어로 씌어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 방식에 익숙해 있는 유대인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설명하는 책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는 복종을 통해 완전한 구원을 이루셨고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이 되었고 이 대제사장은 창세기 아브라함을 축복한 왕이자 사제인 신비의 인물 멜기세덱의 뒤를 이었다고 하는 말을 하고 있다.
멜기세덱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성서에 나타난 구절만으로는 알 수가 없는 인물이지만, 히브리어로 ‘정의의 왕’을 뜻한다는 말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듯 하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교회 곧 몰몬교에서는 이 멜기세덱을 자신들의 교리 속에 한 중요한 인물로 신학화를 하여 놓았고, 우리나라에도 멜기세덱을 재림예수로 믿는 멜기세덱교라는 종파가 있다. 이 히브리서 구절에서 멜기세덱은 손가락에 불과한 표현이고 정작 손가락이 지시하고 있는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을 잇는 대제사장이라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대제상장은 지위에 있어 높음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통한 복종이라고 하는 ‘낮아짐’에 있다. 이는 하느님과 본질상 같은 분이셨지만, 그러나 썩어가는 인간이 되셨다고 하는 요한복음의 sarx ‘살’ 사상, 그리고 빌립보서의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자리에로 내려오셨다고 하는 케노시스 ‘비움’의 사상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사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라는 희생에 기초한 타인 구원의 사상 또한 같은 말씀이다.
교회의 세상을 향한 선교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리고 선교의 주체 또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말은 선교의 원칙을 다른 세상의 가르침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삶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 삶이란 한마디로 우리 각자가 밀알 하나가 되어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낮아짐과 희생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함으로 하느님께 영광이 되었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희생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교회가 감당하고 있는 선교의 영역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원칙은 하나이다. 그건 밀알 하나가 되어 죽어가는 일이다. 나는 죽어가지만, 그러나 나를 통해 수많은 열매가 맺어지는 곧 내가 산다는 역설적 진리의 길이다. 이것이 곧 신앙의 신비이자 비약이며 슈나이더가 말한 고통의 가면(假面) 뒤에 숨어 있는 진면(眞面)이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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