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사순절 3째 주일 설교 자료

ree610 2025. 3. 7. 18:06

 

교회력 설교 자료(2024년 3월 3일, 사순절3)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고, 여기에 필자의 한국 목회 20년, 미국 목회 20년의 경험과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 성탄절, 부활절은 내용을 가리키지만, 사순절은 기간을 가리킨다. 사순절은 의미로 보나 정확성으로 보나 적절한 용어는 아니다.
  나는 왜 사순절 대신 저항절이라 부르는가. 예수가 저항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고난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처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고통받았다. 예수는 수동적으로 고난받은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예수는 조용히 살다가 처형된게 아니다. 기도하다가, 성서공부하다가, 예배 참석하다가 처형된게 아니다. 저항했기에 처형되었다. 사순절 단어는 예수의 저항을 외면하고 있다. 예수 고난보다 예수 저항을 더 생각하고 따르는 시기다.(가톨릭 성서학자 김근수)

[주일 본문]
출 20:1-17; 시편 19; 고전 1:18-25; 요 2:13-22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출애굽기 20:1-17

1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2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3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4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5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7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지켜라.
9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너희의 아들이나 딸이나,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만이 아니라, 너희 집짐승이나, 너희의 집에 머무르는 나그네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내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주가 안식일을 복 주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다.
12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
13   살인하지 못한다.
14   간음하지 못한다.
15   도둑질하지 못한다.
16   너희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지 못한다.
17   너희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너희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할 것 없이, 너희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

[신학적 관점]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의 핵심은 무엇인가? 흔히 본문에 근거해서 유일신을 주장하지만, 본문은 다른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애굽의 태양신 ‘라’신이나 가나안의 풍요의 신 ‘바알’이나 바빌론의 창조의 신 ‘마르둑’을 섬기지 말고 이스라엘의 신 ‘YHWH’만을 섬기라는 뜻의 핵심은 신의 이름에 있는 것이 아니다. YHWH는 신의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언어(‘이름’)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나는 나다/I will be what I will be”)임을 말하는 히브리어의 발음 기호일 따름이다.(출 4:14) YHWH의 핵심은 십계명을 감싸는 첫 문장에 있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너희의 하나님(엘로힘)이다.” 곧 해방의 하느님이심을 말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해방을 받은 저들은 모두 하느님 앞에서 하나의 평등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하나라는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특수성에 있는 것이다. ‘엘로힘’ 자체가 복수형이다. 성서는 우주의 기원을 말하면서 모든 인간들은 하느님의 형상을 띠고 태어났다고 선언한다. 이는 인간은 그 누구로부터 예속 받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자유인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 어떤 정치 체제도 어떤 권력도 어떤 이념도 심지어는 YHWH의 이름을 빌려서도 인간이 인간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YHWH는 자유와 해방을 상징하는 신이다.

[목회적 관점]

교회 건물(성전)은 새긴 우상인가? 아닌가? 처음 고대인들은 자연 안에 있는 이상하게 생긴 큰 바위나 큰 나무들을 신의 형상으로 여겨 섬겼지만, 정주문명 곧 도시집단화가 일어나면서 특별한 모양과 거대한 형상을 만들고 그 상이 거하는 거대한 집 곧 성전을 짓게 된다. 여기에는 거대한 노동력 곧 침략을 통한 노예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관리하는 특수계층인 사제계급이 필요하게 된다. 곧 신의 형상화 작업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요인을 제공하게 된다. 곧 교회의 성전이 교인들 사이에 어떤 계급을 만들고 하늘이 준 자유의 정신을 억누르는 기제로 작용한다면 이는 우상이 된다.

[주석적 관점]

십계명을 다른 종교와의 구별로 본다면 핵심은 안식일에 있다. 성서로 보면 ‘안식’이라는 단어는 엿새동안 일하시고 칠일째 쉬셨다는 창조기사(P문서)의 종결이다.(창 2:3) 그러나 이는 P문서가 바빌론 포로기에 형성되었기에 역사적으로 보면 바빌론 포로기에 그 뿌리가 있다. 노예들은 동물과 같이 쉼이 없었다. 유대포로민 노예들은 자신들의 신의 이름으로 쉼을 요구했고 이후에 이를 토라의 근간으로 삼았다. 안식일은 이어 안식년, 희년(Jubilee)으로 그 뜻이 확장되어 갔다. 단순히 일주일에 하루를 쉬는 안식의 개념 혹은 성수주일의 개념을 넘어 땅의 휴식, 노예 해방, 빚의 탕감이라는 인간 사이에 차별을 낳는 구조 악을 타파하는 성서의 핵심 사상이다.

[설교적 관점]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증언,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금지 명령은 모두 힘 있는 자를 견제하기 위한 계명이다. 이웃의 것을 탐내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들이다.(예, 다윗의 범죄에 대한 나단의 비판) 지금도 그러하지만, 십계명은 단순한 종교적 계명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전제로 한 사회경제적 계명이었다.

<현자들은 모세가 토라를 받기 위해 하늘로 올라갔을 때 천사들이 반대했다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소유물을 그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맡기실 수 있겠는가? 모세가 천사들에게 말하되, 너희 중에 살인자가 있느냐?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필요한가? 너희 중에 “간음하지 말라”라고 하여야 할 간음자가 있느냐? 토라는 수종하는 천사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인간에게 주셨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면서, 하느님은 언젠가는 인간이 그것을 책임감 있고 도덕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배워 행복한 사회적 세상을 만들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하셨다.>(『랍비가 풀어내는 창세기』 랍비 조너선 섹스 지음. 김대옥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23. 288쪽)

시편 19

1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 줍니다.
2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 줍니다.
3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들리지 않아도
4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온 세상 땅끝까지 번져갑니다.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쳐 주시니
5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이 신나게 치닫는 용사와 같이
6   하늘 이끝에서 나와 하늘 저 끝으로 돌아가고 그 뜨거움을 벗어날 자 없사옵니다.
7   야훼의 법은 이지러짐이 없어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야훼의 법도는 변함이 없어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 준다.
8   야훼의 분부는 그릇됨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야훼의 계명은 맑아서 사람의 눈을 밝혀 준다.
9   야훼의 말씀은 순수하여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고 야훼의 법령은 참되어 옳지 않은 것이 없다.
10   금보다, 순금덩이보다 더 좋고 꿀보다, 송이꿀보다 더욱 달다.
11   당신 종이 그 말씀으로 깨우침받고 그대로 살면 후한 상을 받겠거늘
12   뉘 있어 제 허물을 다 알리이까? 모르고 짓는 죄일랑 말끔히 씻어 주소서.
13   일부러 범죄할까, 이 몸 막아 주시고 그 손아귀에 잡힐까, 날 지켜 주소서. 그제야 이 몸은 대역죄 씻고 온전히 깨끗하게 되리이다.
14   내 바위, 내 구원자이신 야훼여,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고린도전서 1:18-25

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9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20   지혜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21   이 세상이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22   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하되,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24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적 관점]

19세기 철학자 니체는 원수 사랑의 가르침을 노예도덕, 즉 약자들이 자신들의 비겁과 무력함의 치부를 용서나 관용의 정의로 포장하기 위한 변명으로 비판한다.(20세기 말 신학자 월터 윙크는 이를 폭력자를 변화시키는 저항의 몸짓으로 해석한다) 로마제국이 지배하는 초대교회에서 십자가는 죽음과 패배의 상징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영원성의 관점에서 부활과 승리의 상징으로 이해했다. 십자가의 역설이다. 현대사에서 무하마드 간디와 말틴 루터 킹목사의 무저항주의의 승리는 이를 반증한다. 그러나 둘 다 총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점에서 역설은 여전히 역설로 남는다.

[목회적 관점]

목사들의 모임(노회, 총회)에서조차 대형교회 목사들의 영향력은 크다. 바른 목소리라 할지라도 사람의 약함은 여전히 하느님의 약함으로 귀결된다.

[주석적 관점]

표적(sign)과 지혜(wisdom)는 객관과 이성이라는 관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진위 판단의 주요한 잣대이다. 요한복음은 표적을 공관복음서의 기적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로 다루었으며, 지혜 또한 잠언, 전도, 지혜서에서와 같이 인간 지적 삶에 있어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요소이며 때로는 여신(호크마, 히-소피아, 헬)의 역할도 담당한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표적과 지혜는 세상의 관점(부귀와 권력)에서 말하는 부정 개념이다.

[설교적 관점]

십자가의 구원은 세상 권세로부터 패배당한 것처럼 보이는 약자들의 저항과 최후 승리를 상징한다. 그러나 11세기 십자가를 앞세운 십자군으로부터 서구 기독교 제국들은 힘에 의한 지상왕국(Christendom) 건립을 꿈꾸었다. 이후 신부나 목사들은 아프리카아시아 식민지 점령에 YHWH의 이름으로 선두에 섰다. 남한은 선교사 파송에 있어 미국 다음으로 2위 국가라고 한다.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된 개신교가 사회에 기여한 바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와 손을 잡고(가츠라테프트조약) 조선식민화에 앞장을 섰던 일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1세기가 지나 우리나라 또한 이를 본받아 물량적 힘에 의한 제국적 선교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선교나 전도에 있어 십자가 희생정신은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 것인가? 유일신 신앙으로 저들의 전통 신앙을 모두 이방신 숭배 혹은 미신으로 부정할 것인가?

요한복음 2:13-22

13   유대 사람의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데,
14   성전 뜰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엎으셨다.
16   비둘기 파는 사람에게는 "이것을 거둬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7   제자들은 '주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18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묻기를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습니까?" 하니,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였다.
20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습니까?"
21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

[신학적 관점]

시기로 보면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의 공생애 마지막 주에 일어난데 반해 요한복음은 공생애 첫머리에 등장한다.(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의 예수는 세 번의 유월절을 경험한다) 이는 저자 요한이 주장하는 핵심임을 뜻한다. 내용으로 보더라도 공관복음서는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방점이 찍혀 있어 성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데, 반해 요한복음은 성전 파괴를 언급함으로 성전 자체를 부정한다. 요한은 부활 예수의 몸이 성전임을 주장한다. 바울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몸이 성전임을 주장한다(고전 3:16). 역사적으로 요한은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의 주장임으로 동시대인들에게 대안의 의미가 있지만, 바울의 경우는 성전이 있는 상태였으므로 대단히 혁명적인 발언이었다.

[목회적 관점]

개신교(the Protestant Church)는 저항하는 교회이다. 무엇에 대한 저항이며 무엇을 위한 저항인가? 현재의 부당한 질서를 유지하려는 힘 있는 자들에 대한 저항이며 가난한 민중의 구원을 위한 저항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the Reforming Church)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 혹은 교회 내의 약자의 목소리가 잘 들리기 위해 오늘 나의 교회가 개혁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주석적 관점]

스가랴 14장 21절 마지막 절 마지막 문장은 “그날이 오면, 다시는 만군의 YHWH의 전에 장사꾼이 있지 못하리라.” 곧 예수는 이 예언의 실행자가 된다.

희생제물용 가축들은 제사장의 확인 도장이 필요했으며, 13세 이상 남성들의 의무인 성전세 또한 황제의 얼굴이 새겨지지 않은 성전용 동전으로 바꿔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비리가 발생했으며, 이를 감당할 힘이 없는 가난한 민중들은 성전 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성전 출입을 할 수 없었다는 말은 구원의 반열에서 제외되었다는 말이다.

[설교적 관점]

예수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의 식민지배 체제를 옹호하고 사제들의 지배적 권위를 정당화하는 일에 중심이었다. 구원은 오직 사제들에 의한 성전 제사를 통해서만 임했다. 예수는 가난한 백성들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성전 체제를 거부하였다. 요한은 물론 마태, 마가, 누가, 바울 모두 예수를 따라 이러한 성전 독점체제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탈성전 정신을 오늘의 교회에 적용한다면 이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이는 만인사제직에 기초한 *평신도주체목회가 될 것이다(벧전 2:9). 500여 년 전 루터로부터 시작한 교회개혁운동이 사제의 전유물이었던 라틴어성서를 민중들의 언어로 번역하여 돌려주는 일에 있었다면, 오늘의 교회개혁운동은 목사들의 전유물로 되어 있는 목회를 신도들에게 돌려주는 일에 있다고 하겠다. 함께 참여하는 공동설교, 공동성찬, 공동축도로 전환하는 일이 필요하다. (* 필자는 ‘평신도/layperson’라는 단어가 귀족(특수층)을 떠받드는 중세 계급사회에 뿌리를 둔 단어이기에 이에 대한 대안으로 목사는 <교회목회자> 신도는 <생활목회자>로 불렀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