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 설교자료(2024년 2월 25일, 사순절2)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고, 여기에 필자의 한국 목회 20년, 미국 목회 20년의 경험과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 성탄절, 부활절은 내용을 가리키지만, 사순절은 기간을 가리킨다. 사순절은 의미로 보나 정확성으로 보나 적절한 용어는 아니다.
나는 왜 사순절 대신 저항절이라 부르는가. 예수가 저항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고난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처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고통받았다. 예수는 수동적으로 고난받은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예수는 조용히 살다가 처형된게 아니다. 기도하다가, 성서공부하다가, 예배 참석하다가 처형된게 아니다. 저항했기에 처형되었다. 사순절 단어는 예수의 저항을 외면하고 있다. 예수 고난보다 예수 저항을 더 생각하고 따르는 시기다.(가톨릭 성서학자 김근수)
[주일 본문]
창 17:1-7, 15-16; 시편 22:23-31; 롬 4:13-25; 막 8:31-38(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창세기 17:1-7, 15-16
1 아브람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에, 주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
2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4 "나는 너와 언약을 세우고 약속한다. 너는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
5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
6 내가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너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오고, 너에게서 왕들도 나올 것이다.
7 내가 너와 세우는 언약은, 나와 너 사이에 맺는 것일 뿐 아니라, 너의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도 대대로 세우는 영원한 언약이다. 이 언약을 따라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뿐만 아니라, 뒤에 오는 너의 자손의 하나님도 될 것이다.
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아내 사래를 이제 사래라고 하지 말고, 사라라고 하여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겠다. 내가 너의 아내에게 복을 주어서,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게 하겠다.“
[신학적 관점]
아브람이라는 이름은 셈의 후손으로서 아버지 데라와 함께 등장하고(11:26), 이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을 향해 떠나가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갈대아 우르를 떠난 사람은 데라이다. 그러나 데라는 하란에서 죽고 가나안에 도착한 사람은 아브람이다. 여기서 왜 떠났는지 그리고 갈대아 우르와 가나안의 차이는 무엇인지에 대해 성서는 침묵한다.
아브라함이 생애에 관하여 역사에 근거한 필자의 이해는 다음과 같다. 갈대아 우르는 단순 지명이 아니라 오늘날의 메소포타미아(혹은 갈대아) 지역에 존재했던 수메르제국의 제3왕조인 우르왕국을 의미한다고 본다. 곧 데라는 우르왕국의 마지막 왕으로서 아카드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자 하란으로 피신해서 제2의 우르왕국을 세웠다가 재침략을 받아 멸망하고 아브람은 남은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피신한 것으로 이해한다(오늘날 터키 남쪽 지방 하란지역에는 우르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는 도시가 있다). 그리고 아브람은 가나안에서 왕국 부활을 꿈꾼다. 아브람이 군사 318명을 거느리고 있다가 조카 롯의 가족들이 붙잡히자 이들을 쳐부셨다는 이야기는 당시 그 지역에서 최강의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다.(14장) 먹고살기도 힘든 지역에서 이 얘기는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그러다가 자신의 꿈이 잘못된 일임을 깨닫고 이를 포기하고 모든 인류가 함께 살아가는 평화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이러한 상징으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그리고 사래가 사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뒤를 이어 왕국을 회복할 주인공으로 보았던 이삭 바침으로 이해한다. 곧 아브라함의 축복은 우연히 먼 지역에 살고 있는 한 인물을 이유도 없이 선택하여 그냥 멀고 먼 외딴 지역으로 옮겨 간 단순한 순종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여러 제국들의 흥망성쇠가 일어났던 정주(定住)문명의 중심인 갈대아 우르에서 유목(遊牧)생활이 중심인 가나안으로 옮겨간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정주문화는 땅을 빼앗고 넓히기 위한 전쟁이 기본이다. 유목문화는 가족 단위로 삶을 영위하며(롯의 가족과 분리) 땅을 공유함으로 공동체문화를 기본으로 갖는다. 아브라함은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않았다.(23장)
[목회적 관점]
가톨릭교회는 세례명을 갖고 교회 내에서는 세례명으로 불린다. 이는 단순한 개명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의 전환을 뜻한다. 공개적인 개명은 아니더라도 성서의 인물이든 역사의 인물이든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개명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하느님 또한 1절에서 스스로 정체성을 밝힌다. ‘엘 샤다이’(히, 전능한 하느님)라고.
[주석적 관점]
본문은 제사장 문서(Priestly writing)로서 바빌로 포로기에 기반하고 있다. 저들은 바빌론의 지배문화로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축복은 언약에 기반한다. 본문에서 빠져 있는 8-14절은 할례 언약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할례가 무의미한 규정이 되었기에 이를 뺏지만, 주석적으로는 문제가 된다. 아브라함에 대한 축복을 단지 하느님의 주권이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아전인수식의 해석을 낳게 한다. 이후 구절(18-24)에서 이삭 출생을 약속하고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모두 할례를 행한다. 주석상으로는 축복이 주제가 아니라, 축복의 근거가 되는 할례가 주제이다. 오늘날에 있어 기독교인들이 세속의 문화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나가기 위한 방식이 무엇인지를 찾음으로 할례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
바울은 ‘후손’이 단수형임을 지적하며 이를 예수 그리스도에 연계한다.(갈 3:16) 그러나 문법상으로는 단수이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복수이다. 아브람은 히브리어로 단수로서의 후손의 아버지를 뜻하고, 아브라함은 복수로서의 후손의 아버지를 뜻한다.
[설교적 관점]
오늘날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삼고 있는 종교는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이다. 같은 축복의 말씀을 두고 모두 자신들이 마땅한 후손임을 주장하고, 이로 인해 과거 십자군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들이 있었고, 지금 진행 중인 팔레스타인 전쟁 또한 유대인들의 땅 빼앗기 전쟁인데, 이 또한 아브라함의 축복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에 근거하고 있다. 강자에게 ‘전능하신 하느님’의 약속 말씀은 축복이지만, 약자에게는 저주가 된다.
단수 후손의 아브람이 복수 후손의 아브라함으로 개명이 된다는 얘기는 아브라함이 모든 인류의 조상이 된다는 말이다. 모든 인류는 하나의 가족이라는 의미이다.
시편 22:23-31
23 "야훼를 경외하는 사람들아, 찬미하여라. 야곱의 후손들아, 주께 영광 돌려라. 이스라엘의 후손들아, 모두 다 조아려라.
24 내가 괴로와 울부짖을 때 '귀찮다, 성가시다' 외면하지 않으시고 탄원하는 소리 들어 주셨다."
25 큰 회중 가운데서 내가 주를 찬송함도 주께서 주심이니, 주를 경외하는 무리 앞에서 나의 서원 지키리라.
26 가난한 사람 배불리 먹고 야훼를 찾는 사람은 그를 찬송하리니 그들 마음 길이 번영하리라.
27 온 세상이 야훼를 생각하여 돌아오고 만백성 모든 가문이 그 앞에 경배하리니,
28 만방을 다스리시는 이 왕권이 야훼께 있으리라.
29 땅 속의 기름진 자들도 그 앞에 엎드리고 먼지 속에 내려간 자들도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리라. 이 몸은 주님 덕분에 살고,
30 오고오는 후손들이 그를 섬기며 그 이름을 세세대대로 전하리라.
31 주께서 건져 주신 이 모든 일들을 오고오는 세대에 일러 주리라.
롬 4:13-25
13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 된 것입니다.
14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약속은 소용없는 것이 됩니다.
15 율법은 진노를 자아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습니다.
16 이런 까닭에, 이 약속은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은혜로 주시려는 것이며, 이 약속을 그 모든 자손에게도, 곧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보장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함과 같습니다. 이 약속은, 그가 믿은 하나님,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불러내시는 하나님 앞에서 보장된 것입니다.
18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9 그는 나이가 백 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사라의 태가 또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면서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끝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믿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1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의 의로움으로 인정하셨습니다."
23 "그가 의로움을 인정받았다" 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24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시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신학적 관점]
본문은 유대민족의 조상이라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을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곧 혈연을 뛰어넘어 ‘믿음’으로 심화한 일은 바울신학의 위대한 공로이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의 토라에 대한 깊은 관심을 단지 율법 행위로만 제한하여 해석한 것은 ‘믿음’을 강조하기 위한 바울의 의도이긴 하지만, 이로 인해 토라에 기초한 실천 행위들을 믿음에는 해(害)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유대교를 율법과 행위의 종교로만 오해하게 만듦으로 이천 년 역사 내내 유럽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에 대한 반감과 멸시를 갖게 되었다. 결국 이 ‘믿음’은 나치와 히틀러라는 괴물까지 낳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란 다름 아닌 행동 없는 ‘입술만의 고백’으로 충분하고 하느님 앞에서의 ‘의로움’이란 행위를 부정해야 한다고 하는 이상한 가르침이 주류가 되는 종교가 되고 말았다. 행위를 믿음의 조건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행위는 믿음의 결과로 당연한 것이다. 믿음과 행위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주장은 칼날의 양면과 같다. 바울이 당면했던 상황신학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목회적 관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에 있어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벽을 깨기 위해 노력했고, 심지어는 이방인들의 선교를 위해 할례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구원 원칙을 부수었다. 오늘날 목회 현장에서 유대인들은 누구이고 이방인들은 누구인가? 사회적으로 보면 교회 밖의 사람들이 이방인이고 교회 안의 사람들이 유대인이다. 교회로 본다면, 교회의 규칙에 익숙하지 않은 새로 온 교인들이 이방인크리스챤들이고 오래된 교인들이 유대인크리스챤에 해당한다. 우리가 깨어 부수어야 할 원칙들은 무엇인가?
[주석적 관점]
로마서는 바울신학의 집대성으로 57-58년 고린도에서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보다 10년 전인 49년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로마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린 바 있다. 이중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가 있었는데, 이들은 고린도에 있다가(행 18:2, 고전 16:19), 바울이 로마서를 쓰던 시절에는 로마에 가 있었던 것을 보면 이 추방령이 해제된 것임을 알 수 있다.(롬 16:3) 이러한 결과로 다른 소아시아 교회들과는 달리 로마(가정)교회 내에 이방인 크리스챤들이 주역을 맡고 되었다. 그리하여 다른 서신과는 달리 바울은 더욱 적극적으로 이방인들을 위한 자신만의 (토라 해석) 신학을 확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롬 3:21) 이를 확대 주장하면 제1성서를 폐지하고 복음서 가운데서도 누가복음만 인정하며 바울의 진정한 제자로 자처했던 영지주의 이단 마르시온의 주장으로 번지게 된다.
사실 본문에서의 바울의 주장과는 달리 아브라함은 사라의 몸에서 이삭이 출생할 것이라는 약속을 믿지 않았다.(창 17:17, “아브라함은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우스워서 ‘나이 백 살에 아들을 보다니! 사라도 아흔 살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겠는가?”) 단순히 웃었다기보다는 비웃은 것이다. 이 외에도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등 아브라함의 잘못은 많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무작정 추켜세우다 보면, 잘못을 저질러도 믿음만은 고수하면 된다는 이상한 신앙인들이 만들어진다.
[설교적 관점]
성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여러 가지로 해석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갈 곳을 알지 못한 채 떠나는 순종‘을 강조하고, 바울은 아브라함의 사라의 태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믿는 (1단계의) 믿음을 그리고 나아가서 혈연을 넘어 모든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2단계의) 믿음을,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의 믿음을 하느님 앞에서의 ’의로운 믿음‘으로 해석함으로 예수 부활을 믿는 (3단계의) 신앙으로 확장하여 나간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활의 믿음 역시 바울의 주장에서 그쳐서는 안 되고 오늘날의 시대적 요구에 따라 계속 확장 되어가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특히 지구촌 위기의 시대에 맞는 생명신학,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신학, 사회적 차별을 없애는 정의신학에 대한 설교들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마가복음 8:31-38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흘 뒤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예수께 항의하였다.
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다.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38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신학적 관점]
본문은 세 번의 십자가 죽음 예언의 첫 번째 이야기로 길이에 있어서도 복음서의 중간에 해당하지만, 내용에 있어서도 그 방향이 180도 달라지는 전환점이다. 예수는 그동안 예루살렘의 권력층으로부터 짓밟힘을 당했던 갈릴리 민중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했다. 질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내어쫓고 먹이고 말씀으로 깨우침을 주셨다. 예수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모든 악의 근원인 성전의 개혁을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간다.
지금까지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적대자는 주로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다. 유력가문의 원로들과 대제사장들과 그들을 이론적으로 떠받는 율법교사들 곧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던 사두개인들이다. 지금까지는 토라의 해석을 두고 바리새인들과의 종교적 논쟁이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사두개인들과의 정치적 투쟁으로 바뀌고 있다.
백성들의 박수를 받던 영광(theology of glory)에서 백성들의 외면을 받는 십자가 고난(theology of the cross)으로 그 방향을 돌리는 클라이맥스 정점(頂點)이다. 하느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메시야)의 본래가 무엇인지,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
예수의 적대자는 외부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기득권 세력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제자들이었고, 그중에서도 수제자였던 베드로였다. 그는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답을 했던 사람이다. 같은 길을 걷고 답이 맞다고 해서 생각과 목표가 같은 것은 아니다. 여기서 예수는 단호했다. 이는 목회자들이 사람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 특히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가까이 있는 사람은 멀리하고 멀리 있는 사람은 가까이하는 일은 목회의 기본이다.
[주석적 관점]
마가복음서에서 사람의 아들(인자) 칭호는 세 가지로 구분된다. 1. 묵시적 인자-역사의 종말에 의인을 구하고 악인을 심판하러 오실 분(8:38; 14:62). 그의 심판은 각 사람이 예수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에 달려 있다. 2. 지상의 인자-죄를 사하고 안식일 규정을 판단하는 권세자(2:10). 3. 수난의 인자-십자가와 부활에 관해(8:31; 9:31; 10:33-34).
일부 학자들은 예수가 자신을 지칭하는 일 외에 에스겔의 경우처럼(2:1, 3, 6, 8) 단지 “인간”을 가리키는 일반적 의미로 썼거나 혹은 초대교회가 이 호칭을 다니엘 7장에서처럼 ‘인자 같은 존재’라는 뜻으로 재해석했을 가능성을 말한다. 그러나 이 호칭은 예수 당시에 통용되던 메시아 호칭이 아니었기에 초대교회가 예수에게 적용한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다. 당시 통용되던 아람어에서 “사람의 아들”이 “나”라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복음서에서는 당사자인 예수만 사용했고, 신약 시대 이후로는 예수를 가리켜 통용되지 않았으며 교회의 신조나 의전 혹은 교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용어의 사용은 예수가 자신에 관한 칭호로 시작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참조. 『초기 유대교와 예수 운동: 제2성전기 유대교와 역사적 예수의 상관관계』 프레더릭 머피. 유선명 옮김. 새물결플러스. 2020. 642-644)
그런데 당시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하느님의 아들’ 칭호 대신에 굳이 ‘사람의 아들’ 칭호가 왜 필요했는지, 본문 38절에서와 같이 왜 3인칭으로 언급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질문이 남는다. 이에 대해 필자는 (로마제국의) ‘복음’ 그리고 (로마제국의) ‘나라’라는 용어 사용에서와 같이 로마황제가 자신을 지칭하는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대칭 용어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3인칭 용어는 ‘메시야 비밀 명령’과 같이 십자가 죽음으로서의 역사적 예수와 부활 이후의 심판자로서의 그리스도 예수와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저자 마가의 용법으로 이해된다. 만약 마가의 오흘로스 용법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 대신에 ‘민중의 아들’이라고 번역하면 우리말로는 그 이해가 훨씬 더 빠를 것이다.
[설교적 관점]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별하는 잣대는 무엇일까?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는가 아니면 앞세우는가? 둘째는 눈앞에 보이는 순간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목숨 곧 영원에 깃대는 삶이다.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정곡을 찌른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고전 1:18-31)
사순절은 자기 영광을 위해 걸어갔던 길에서 180도 돌아서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차별과 억압과 착취의 근원지인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이다. 오늘의 예루살렘은 어디인지, 내가 져야 할 나의 십자가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시간이다. 뜻없이 무릎 꿇는 시간이 아닌 뜻을 분명하게 하는 결단의 시간이다.
31항쟁 때에 일제의 말과 칼과 총에 맞서 태극기를 손에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던 선조들의 기상과 결단을 생각해 보자.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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