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 설교자료(2024년 2월 18일, 사순절1)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고, 여기에 필자의 한국 목회 20년, 미국 목회 20년의 경험과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 오늘 2월 14일은 교회성당에서 이른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이다. 예수 죽음을 기리고 묵상하는 시기다. 그런데, 사순절 단어보다 저항절 단어가 더 적절하다. 성탄절, 부활절은 내용을 가리키지만, 사순절은 기간을 가리킨다. 사순절은 의미로 보나 정확성으로 보나 적절한 용어는 아니다.
나는 왜 사순절 대신 저항절이라 부르는가. 예수가 저항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고난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처형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였기 때문에 고통받았다. 예수는 수동적으로 고난받은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예수는 조용히 살다가 처형된게 아니다. 기도하다가, 성서공부하다가, 예배 참석하다가 처형된게 아니다. 저항했기에 처형되었다. 사순절 단어는 예수의 저항을 외면하고 있다. 예수 고난보다 예수 저항을 더 생각하고 따르는 시기다.(가톨릭 성서학자 김근수)
[주일 본문]
창 9:8-17; 시편 25:1-10; 벧전 3:18-22; 막 1:9-15(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재의 수요일(Ash Wendesday) 본문: 요엘 2:1-2, 12-17; 시 51:1-17; 고후 5:20b-6:10; 마 6:1-6, 16-21
창세기 9:8-17
8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말씀하셨다.
9 "이제 내가, 너희와 너희 뒤에 오는 자손에게 직접 언약을 세운다.
10 너희와 함께 있는 살아 숨쉬는 모든 생물, 곧 너와 함께 방주에서 나온 새와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에게도, 내가 언약을 세운다.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울 것이니,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는 일이 없을 것이다.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12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및 너희와 함께 있는 숨쉬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언약의 표는,
13 바로 무지개이다. 내가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둘 터이니,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가 될 것이다.
14 내가 구름을 일으켜서 땅을 덮을 때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나면,
15 나는, 너희와 숨쉬는 모든 짐승, 곧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날 때마다, 내가 그것을 보고, 나 하나님이,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 곧 땅 위에 있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세운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겠다."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내가, 땅 위의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언약의 표다.“
[신학적 관점]
본문에서 노아 홍수의 이야기는 다시는 인류 심판이 없을 것이라는 신의 구원 약속의 이야기이지만, 이는 본래 인류 심판의 이야기이다.(6:5) 인간은 본래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하느님과 더불어 에덴동산에 머물렀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추방이 일어나고 이어 에서의 형제 살인으로 이어진다. 6장 노아 홍수 이야기 직전의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자손인 네피림이라는 거인족의 등장은 곧 전쟁과 폭력을 무기로 하는 제국의 등장을 의미한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모두 손에는 활을 어깨에는 화살통을 지니고 있다. 무지개(rainbow)가 하늘에 걸려 있다는 말은 폭력의 상징인 활(bow)이 하늘에 걸려 있다는 말로 평화를 뜻한다. (천둥과 벼락은 하늘의 화살로 보았다) 본문은 단지 인간끼리의 평화를 넘어 숨쉬는 모든 생명들이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명령을 포함하고 있다. 기후위기 시대에 지구 생태신학(Eco-theology)의 출발점이 된다.
[목회적 관점]
여러 개의 색깔이 하나로 드러나는 무지개는 화합의 상징이다. 신앙적으로는 나이, 인종, 계급, 빈부, 성적 지향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하는 그래서 하나의 인류 가족이라는 신앙의 상징이다. 사순절의 예전 색깔은 보라색이지만, 무지개를 덧붙이는 것은 어떠한가?
[주석적 관점]
창조 이야기는 바빌론 포로기에 형성이 되었다. 노아와 무지개 언약 사건은 바빌론 제국의 전쟁 폭력 역사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평화 이야기이다. 물은 인간생존의 필수물이지만, 많은 물(홍수, 바다)은 인간을 파괴한다. 창 1:2-”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여기서 어둠과 깊은(많은) 물은 하나로 엮여 하느님의 기운과 상대하고 있다. 고대시대에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은 홍수로 인한 집과 자연의 파괴였다. 대부분의 민족들은 모두 홍수 설화를 갖고 있다.
[설교적 관점]
노아의 지구생명 구원 언약은 아브라함을 통한 인간 할례 의식으로 그리고 모세를 통한 유대민족의 정결법과 안식일법으로 그 폭이 점점 좁아진다. 바빌론의 노예 유대인들은 노아 언약 이야기를 통해 인류가 하나의 가족이라는 에덴동산의 창조 사건을 재현한다. 사순절은 죽음 성찰을 통한 새로운 생명 창출의 기간이다.
(추가 해설)
필자는 1981년 부활절 LA타임지 일요판에 실렸던 사해문서의 중간보고 형식의 3, 4면에 이르는 긴 기사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여러 해 이스라엘 연구소에서 일을 했던 한 미국인 성서학자가 쓴 글이었다. 당시로서는 30여 년 만에 나온 귀한 글이었다.(어찌된 영문인지 지금은 이 기사를 찾을 수가 없다) 필자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양피지 두루마리 창세기 7장 노아의 이야기 옆 여백에 오래된 중국 활자체로 船이 새겨져 있는 사진이었다. 舟는 배를 뜻한다. 그런데 그 옆에 여덟 팔(八)자 그리고 그 밑에 입 구(口)자를 굳이 새겨놓아야 할 이유는 없다. 중국 설화에 노아 홍수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노아의 가족 또한 모두 8명이다. 당시 기사는 이천 년 전에 이미 중동과 중국과의 교류가 있었다고 주장을 하였다.
또 당시 신문기사 사진에 의하면 창세기 두루마기에는 다른 글자도 새겨져 있었다. 기억나는 두 단어 - 禁은 나무 목(木) 두 개 밑에 볼 시(示)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서 두 나무란 다름 아닌 에덴동산 중앙에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를 말하는 것이고 볼 시자 또한 따 먹지 말라고 하는 에덴동산의 금지 명령에 기인하고 있다고 한다. 魔 또한 두 개의 나무 목(木)자가 덮개에 숨어 있고, 그리고 그 밑에 鬼가 있다. 곧 뱀으로 이야기되는 유혹의 마귀가 두 나무 밑에 숨어 있다 유혹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고대 동서(東西) 문명 교류의 결과일까? 80년이 가깝도록 아직도 사해문서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고 있는 이유일 수도 있다고 필자는 본다.
시편 25:1-10
1 야훼여, 내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뵈옵니다.
2 나의 하느님, 당신만을 믿사오니, 부끄러운 꼴 당하지 않게 하시고 원수들이 으스대는 꼴 보지 않게 하소서.
3 당신만을 믿고 바라면 망신을 당하지 않으나, 당신을 함부로 배신하는 자 수치를 당하리이다.
4 야훼여, 당신의 길을 가리켜 주시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 주소서.
5 당신만이 나를 구해 주실 하느님이시오니 당신의 진리 따라 나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소서. 날마다 당신의 도움만을 기다립니다.
6 야훼여, 당신의 자비와 한결같으신 옛 사랑을 기억하시고
7 젊어서 저지른 나의 잘못과 죄를 잊어 주소서. 야훼여, 어지신 분이여, 자비하신 마음으로 나를 생각하소서.
8 야훼여, 당신은 바르고 어지시기에 죄인들에게 길을 가르치시고
9 겸손한 자 옳은 길로 인도하시며 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10 당신의 계약과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당신의 모든 길이 사랑이며 진리입니다.
베드로전서 3:18-22
18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결정적으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19 그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20 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감으로써 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21 그것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세례를 미리 보여 준 것입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 선한 양심을 가지려고, 하나님께 드리는 호소입니다.
22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신학적 관점]
세 가지 관점: 1. 그리스도 고난의 문제 2. 지옥에 갇혀 있는 자들의 구원의 문제 3. 세례와 노아의 방주의 관계 문제.
1. 신학자들은 베드로전서가 이방인 크리스챤들을 위해 기록이 되었는데, 이들은 노예생활을 비롯한 믿음으로 인한 고난을 경험한 사람들로서 유대인들이 믿었던 하느님을 통해 세계 종말과 심판이 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의인들은 구원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2. 사도신조에도 부활 예수가 지옥(음부)에 내려갔다왔다는 구절이 있고(한국어 사도신조에는 이 구절이 빠져 있다), 에베소 4장 9절에도 같은 얘기가 있다. 부활 예수 그리스도가 왜 음부를 다녀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다. 19절의 ‘옥에 있는 영’은 누구인가? 선한 영인가? 아니면 악한 영인가? 베드로후서 2:4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천사들을 용서 없이 깊은 구렁텅이에 던져서 심판 때까지 어둠 속에 갇혀 있게 하셨습니다.“ 이 구절만 보면 천사라는 관점에서 선한 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5절에서 노아 홍수 때에 죽은 이들을 포함하고 있다. 저들은 악한 영이다.(창 6:5)
어찌 되었든 타락한 천사든 인간이든 이미 정죄 받은 영들에게 구원이 주어진다는 얘기는 부활 사건이 갖는 승리의 의미를 심화시키지만, 동시에 신학적으로 상당한 문제를 불러 일으킨다.(물론 그 반대도 그러하다)
3. 세례(침례)를 노아 방주 사건과 같은 세상 파국이라는 종말 사건에서의 구원으로 비유하면서 세례의 의미를 <깨끗한 양심을 위한 서약의 의미>로 심화시키고 있다. 공동번역은 21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목회적 관점]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낼 수는 없다. 다만 그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문제만 남아 있다. 1절에 기초하여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의 가족들에게 우리는 어떤 위로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주석적 관점]
베드로전서는 공통년 8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드로의 이름을 빌린 후대의 기록이다. 서신 머리말에서 서신의 청중을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의 주요 5개 도시에 살고 있는 이방인 크리스챤들을 향해 ‘흩어진 나그네’(디아스포라)라고 부르고 있다.
옥에 갇힌 영에 관한 관심은 벧후 2:4과 유다 6절에도 나오는데, 이는 당시 기독교인들 사이에 상당히 넓게 퍼진 사상으로 신학자 Perkins(Interpretation series, 1995)는 이들을 창 6:2의 하느님의 아들들과 세상의 딸들 사이에서 나온 거인족(네피림)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신학자 Reicke(Anchor Bible, 1964)는 1 에녹서에서 에녹 자신이 이들에게 나타나는데, 이 사상을 에녹전승의 영향으로 이해하고 있다.
[설교적 관점]
사순절 시작으로 설교의 주제를 고난에 맞출 수도 있고, 혹은 창세기 본문과 마가복음 본문에 연결하여 세례에 맞출 수도 있다. 세례는 보통 죄씻음을 통한 구원의 표시로 이해한다. 하나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본문은 이를 ‘하느님께 드리는 호소’ 곧 하나의 첫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마가복음 본문에서의 예수의 세례와 비교해 보면 첫 과정이 더 맞다.
마가복음 1:9-15
9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오셔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예수께서 물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11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12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13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
14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15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신학적 관점]
매우 짧은 구절이지만, 마가신학의 핵심을 말하고 있다. 세례와 광야 시험 그리고 요한과의 관계성, 갈릴리라는 지리적 특성 그리고 하느님의 복음(나라)이다.
엘리야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 세례요한은 헤롯왕을 비난함으로 인해 참수형을 당하는데, 이는 예수로 하여금 공생애를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곧 반(反)국가권력으로서의 정치적 행위이다. 갈릴리는 마카비 시대로부터 반로마제국 투쟁의 중심지였다. 복음(유양겔리온)은 본래 로마황제가 전쟁 승리 이후에 로마시민에게 전하는 기쁨의 소식이었다. 하느님의 복음이란 곧 이러한 로마황제의 복음에 상대하는 개념이다. 하느님의 나라 또한 로마황제가 지배하는 나라에 대한 상대 개념이다. 본문은 예수가 갖는 반로마제국으로서의 정치적 색깔을 매우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
당시 비둘기는 전령(傳令)의 역할을 담당했다. 곧 세례란 곧 하늘의 영이 임함으로 하늘의 뜻이 임함으로 사명을 깨닫는 사건이다.
[주석적 관점]
4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의 시간인 카이로스를 인간의 시간인 크로노스로 바꾼 상징 숫자이다. 인간의 고난이 끝나고(바울은 39번의 태장을 다섯 번 맞음, 고후 11:24) 새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숫자이다.
백성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다(5절)는 전치사 en(in the Jordan)인 반면 예수는 eis(into the Jordan)이다. 요단강은 백성들이 물속에 머물며 죄를 고백하는 장소이다. 예수는 죄의 고백 없이(머물지 않고) 그냥 통과하고 하늘과 만난다. 새 역사의 시작이다.
‘하늘이 갈라짐(찢어짐)’(스키조마노, torn apart). 이 동사는 마가복음에서 딱 두 번 등장하는데, 예수 십자가 사건에서 신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지성소의 휘장이 갈라질 때(찢어지는, torn apart) 다시 한번 등장한다.(15:38) 마가복음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중요한 신학 단어이다. 곧 하느님의 카이로스 개입은 인간 세상의 저항과 부딪히면서, 아들이 희생되는 하느님 자신의 아픔을 동반한다.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12절) 마태와 누가는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로 나아갔다.’ 예수의 자유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내보내셨다’의 그리스원어는 ekballo인데, 본문에 이어지는 34절 ‘예수께서는 온갖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내어 쫓아내셨다>.’ 같은 동사이다. 정확한 번역은 ‘내어 쫓다’ 혹은 ‘몰아내심’(개역)이다. 결국 ‘성령에 의해 내쫓으심’을 받은 예수는 광야40일을 통해 ‘마귀를 내어쫓는 힘’을 갖는다.
광야와 들짐승은 야성(野性)을 상징한다. 야성은 기존의 세상 가치에 대한 저항과 부조리를 바꾸는 개혁을 의미한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므드바르’인데, ‘므’는 장소를 뜻하는 접두사이고 ‘드바르’는 작은 공간을 뜻하는데, 예루살렘 성전의 깊은 공간, 지성소의 의미도 갖고 있다.(참조. ‘천사 시중’) 또한 ‘드바르’와 같은 어근을 갖고 있는 단어가 ‘다바르’인데, 이는 문맥에 따라 ‘말’도 되고 ‘물건’이나 ‘사건’도 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만드셨을 때의 그 말씀이 ‘다바르’이다. 곧 ‘다바르’는 무에서 존재를 창조해내는 하느님의 권세, 힘을 말한다. 곧 본문의 ‘광야’는 세상 가치를 새롭게 변혁시키는 하늘의 힘이 지배하는 곳이다.
[설교적 관점]
마태와 누가는 Q복음에 의거해 마귀와의 대결(시험)을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욕망충족의 유혹,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독차지하라는 명예의 유혹, 그리고 내 앞에 절하면 세상의 보이는 모든 것을 주겠다는 소유와 권력의 유혹으로 설명한다.
사막 영성가의 대부 안토니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바른 삶과 하느님에 대한 신뢰는 마귀를 대적하는 강력한 무기다. 마귀들이 금욕주의자들을 두려워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금욕주의자는 금식하며, 밤을 세워 기도하며, 온유하고 부드러우며, 돈을 싫어하며, 허영심이 없으며, 가난한 자를 사랑하여 구제하길 좋아하며, 화내지 않으며, 무엇보다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쳤기 때문이다.“
사순절(40일)은 예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며 사탄의 유혹과 대결하기 위해 광야로 나아가는 절기이다. 이는 하느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드바르’의 장소이며 기도와 말씀을 통해 ‘다바르’의 창조사건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함으로 ‘길러짐(순응)’이라는 도시문명에 저항하는 숨은 야성(들짐승)을 키우는 시간이다. 출애굽 노예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시간이며, 노아와 엘리야를 비롯한 하느님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시간이요, 부활의 새벽을 바라보며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는 절기이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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