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얼

3.1운동에 대한 의문점들

ree610 2024. 3. 1. 17:27

3.1운동에 대한 여러 의문점들이 있습니다.

1. "비폭력"으로 무슨 독립을?
2. 33인 대표자들의 행적 때문에 뭔가 찜찜함?
3. 운동했다고 독립 못얻었으니 실패?
4. 운동이냐 혁명이냐, 뭐냐?
5. 종교가 얼마나 역할을 했냐?

이런 질문에 대해...
긴 글 가리지않는 여러분을 위하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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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혁명은 대한(독립+민국)선언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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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왜 비폭력이어야 했는가? 일제가 순순히 물러날 리 없으니, 폭력혁명으로 일제를 타도해야 하지 않냐, 미국은 독립선언과 동시에 독립전쟁에 돌입하지 않았냐, 그런 면에서 좀 겁먹고 한 운동이 아니냐 뭐 이런 것들입니다.
사실 우리의 독립항쟁은 무장투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구한말의 의병항쟁이 있고, 안중근 의사와 같은 의거도 있고, 일제초에 만주에서 독립군양성운동도 있고, 의열투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는 한국을 점령하면서, 한국인의 손에 있는 총포와 화약류를 다 뺏었습니다. 그래서 박은식 선생은 “민중의 손엔 촌철(寸鐵)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 맨손이기에, 가만 있을 수 밖에 없는가. 그때 개발한 것이 만세운동이란 것입니다. 가장 평화적으로 우리가 일제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알리자는 것입니다. 일제는 맨손 민중의 시위에 대해 무자비한 총칼로 탄압했습니다.

그런데 비폭력은 생각보다 힘이 셉니다. 총칼은 사람을 짓밟을 수는 있어도, 필부의 양심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20세기에 시민들의 대정부, 대외세 항쟁의 한 축이 되는 비폭력.무저항운동의 효시를 3.1운동은 개척했던 것입니다. 그 비폭력운동은 중국의 5.4운동, 인도에서는 간디의 샤타그라하운동을 거쳐, 마틴 루터 킹의 민권운동 등으로 퍼져갑니다. 사회를 변동시키는데 폭력 못지 않게 비폭력투쟁이 갖는 장기적 효과를 실증한 것입니다.

둘째, 3.1운동 대표자들은 얼마나 잘 했는가? 그들을 둘러싼 몇몇 행태에 대한 찜찜함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요. 왜 33인은 대중앞에 나와 시위하고, 전국각처의 운동을 이끌지 않고, 음식점에서 약식 선언을 하고, 종로경찰서에 순순히 끌려갔나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겁먹어서, 혹은 투항주의적이어서 그랬을까요.

그런데 당시 종로서로 끌려간다는 것은 혹독한 고문과 옥살이로 생사가 위태로운 지경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생명과 신체의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잡혀가는 길을 택했다고 봅니다. 그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옥살이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깥의 조선민중, 신앙인들에게 가만 있지 못하게 하는 심리적 압력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주모자들이 잡혀갔던 그 지역에서(가령 평북 정주) 종교인들의 저항이 격렬했고, 초기의 불붙이기에 기여했다고 봅니다.

당시 지도자들 중에서 일제말 변절과 전향의 행적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생각과 행적은 거대한 역사적 격랑의 일부입니다. 3.1운동때 그들은 순연한 희생을 각오한 애국지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일제말 바람직하지 못한 길을 걸었다고, 그들에 대한 사후 평가를 사전으로 거슬러가서 3.1운동에 참여한 그 대의, 그 자세까지 깎아내려선 안됩니다.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도 3.1운동 당시에는 온몸으로 독립과 해방을 열망했고, 희생을 각오했던 것이고, 그 자체로 소중히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3.1운동으로 독립을 못 얻었으니 실패한 운동 아니냐는 의문입니다.
그까짓 독립만세 불러봐야 일제가 독립시켜줄 리가 만무하니, 앞으로 그런 힘없는 방법으론 안되겠구나, 하는 씁쓸한 교훈만 남는 것 아니냐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3.1운동의 지도자들 중에서 만세 부른다고 독립된다고 생각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1918년 시점으로 한번 돌아가봅시다. 그때 일제는 세계대전의 승전국 대열에 서고, 조선에서 독립에의 움직임은 완전히 제거되어, 그야말로 일제의 식민지체제는 온전히 완성된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1919년에 이르러, 엄청나고 끈질긴 항쟁을 통해, 조선인은 절대로 일제의 일부일수 없고, 자주국이 되고자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전세계에 확고히 인식시켰습니다. 1943년에 카이로 선언에서 “조선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를 밟아 독립시킨다”는 구절이 포함된 것도, 3.1운동에서 촉발된 일련의 독립운동이 국제적 공인을 받는 과정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정치적 영향도 중요하지만, 진짜 진짜 중요한 성과가 있습니다. 조선이 독립되면, 과연 어떤 종류의 나라를 만들어갈까에 대한 구상입니다. 1919년의 움직임의 주역은 전체 조선민중이었습니다. 일부가 아닙니다, 독립된 한반도의 주인은 바로, 독립항쟁에 참여했던 이들의 나라가 될 것이고, 이는 각계각층, 남녀노소, 신분귀천을 막론한 전체 조선인민(국민)이 된다고 보게 되었습니다. 3.1의 피흘림에 남성과 여성이 두루 포함되었기에, 새 나라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만들어가는 나라가 되겠습니다. 왕족과 소위 귀족만이 참여하지 않았기에, 새나라는 왕정일 필요가 없고, 국민이 직접 주인이 되는 나라의 구상이 섰습니다.

독립항쟁에 참여했던 일군의 지도자들이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모여서, 새나라의 주인은 전체 조선인민으로 하고, 이들이 주인되어 만들어가는 나라는 ‘왕국’이나 ‘제국’이 아닌 ‘민국’을 만들기로 결의합니다. 이리하여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주인되는 나라, 즉 대한민국이 탄생합니다. 3.1운동의 최대의 성과는 바로 ‘국민이 주인되는 민국, 대한민국’이 탄생한 것입니다.  

넷째, 3.1의 정확한 명명은 뭘까요? “3.1운동”이라고 해왔지만, 근래엔 “3.1혁명”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3.1은 과연 혁명이라 불릴만한 사건일까요? 우리가 혁명이라 부르는 대사건이 여러 나라에 있습니다. 영국혁명, 미국혁명, 프랑스대혁명, 러시아혁명, 신해혁명, 터키혁명, 멕시코혁명 등. 이들의 공통점은 왕정을 폐하고, 인민(국민)의 나라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인류사에서 가장 큰 정치.사회적 변혁은 왕정체제로부터 공화정체제로의 전환이고, 왕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 만큼 반드시 엄청난 유혈항쟁이 발발합니다. 이런 왕권을 물리치고 국민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대사건을 역사에서는 바로 혁명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그런 혁명이 있었나요. 혹시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미군정의 선물이 아니었던가 하는 지적들도 없지 않습니다. 이럴 땐 우린 잠시 궁하지요.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왕정을 폐하고 공화정으로 직진하는 그 흐름이 3.1운동에 들어 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을 선포한 첫 공식 헌법문서인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 1조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딱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은 3.1을 “(대)혁명”으로 파악했습니다. 인민의 피흘림을 통해, “이민족 전제를 타파”하고, “5천년 군주정치의 구각(舊殼, 낡은 껍질)을 타파해낸 혁명이라 하여 ”3.1혁명“이라 불렀습니다. 그런 혁명의 성과 때문에, 1919년 이후엔 군주체제로의 복귀를 내세운 복벽운동도 사라졌고, 해방 후에도 입헌군주제 주장도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여성의 선거권도 마찬가지입니다. 3.1운동에 남성과 동등하게 참여하고 피흘린 수많은 유관순들 덕분에,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남녀동등선거권을 헌법화했고, 이는 이후 한번도 논란되지 않는 헌법적 성과로 남았습니다. 우리의 대한민국은 실로 3.1혁명의 피의 희생 속에서 태어난 것이고, 그 피와 감옥의 고통에는 남녀, 빈부, 귀천, 노소의 차별이 없었던 것입니다.

3.1운동은 또한 민족의 기풍을 바꾸었습니다. 독립을 선언한 자주민은 당당합니다. 다음은 역사학자 박찬승 교수의 언급입니다.  
“3.1운동 이후에 일본인이 쓴 어떤 자료에 의하면 3.1운동을 겪은 뒤에 조선 사람들의 일본인을 대하는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고 한다. 그 전에는 일본 사람 앞에선 기가 죽고, 슬슬 피하던 조선 사람들이 만세운동을 겪고 나서는 기세등등해져서 피하지도 않고, 길에서 부딪쳐도 당당히 맞서는 등,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주관적인 느낌이었을 수도 있지만, 조선인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었다.

삼일운동의 경험은 특히 운동의 주력이었던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에 거세게 일어났던 청년, 학생, 노동, 농민, 여성운동의 주체는 바로 삼일운동 세대였다.”

실제로 1920년대 이후엔, 1910년대엔 상상도 못할, 역동적 에너지가 넘쳐납니다. 사회운동도 활발하고, 언론활동도 활발하고, 해외로 독립운동 하러 뛰쳐나가고, 의열활동의 의사들이 무수히 등장하고, 심지어 일제 사관학교를 나온 장교들이 탈출하여 광복군의 주역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 분출되는 에너지는, 3.1운동으로 얻은, 자주민으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의 표현이고, 스스로 주권자라는 자부심입니다.

안창호 선생은 1920년 신년사에서 “오늘날 우리에겐 황제가 없나요?”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곤 답합니다.
“있소. 대한나라에는 과거에는 황제가 1인밖에 없어지마는 금일에는 2천만 국민이 다 황제요. 제군의 앉은 자리는 다 옥좌며 머리에 쓴 것은 다 면류관이외다. 황제란 무엇이오? 주권자의 이름이니 과거의 주권자는 유일이었으나 지금은 제군이 다 주권자이외다. 과거의 주권자가 일인이었을 때는 국가의 흥망은 1인에 있었지마는 지금은 국민 전체에 재하오.”
안창호 선생의 말씀을 빌리자면, 국민은 “황제”가 되었고, “정부 직원은 노복”이 되는 천지개벽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군주인 국민은 그 노복을 선하게 인도하는 방법을 연구하여야 하고 노복인 정부 직원은 군주인 국민을 섬기는 방법을 연구하여야 하오."라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지적도 합니다.  

다섯째, 종교의 역할에 대해서는, 일제의 무단통치 하에서 모든 사회활동, 조직들이 금압된지라, 집회가 허용된 곳은 종교단체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 3.1을 준비하게 된 것이겠고요. 그 중에서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하고 선언서도 만들고 인쇄도 하고 자금도 만들고...모든 준비의 주역은 천도교였습니다. 하지만 천도교는 단독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 연합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당시 개신교는 천도교의 교세에 비하면 1/10에 불과했지만, 3.1의 주역이 됩니다. 삼일운동이 거족적이고, 종교간의 연합참여였던 만큼, 기독교 부분만 떼내어 강조하는 건 실례일 수 있습니다. 제암리 교회의 학살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데는 스코필드 박사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습니다. 제암리도 비극적 사실이고 스코필드의 기여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다만 3.1운동을 말할 때, 자기 종교의 헌신과 희생만 떼어놓고 설명하는 것은 31운동의 참 정신에 부합하는 것도 아닐 수 있음을 유의할 일입니다. 박은식 선생의 한 구절을 인용해봅니다.

“수원의 학살은 서양인이 목격하여 알려지게 된 것으로 그 진상이 세상에 폭로되었다. 그러나 서양인의 발길이 미치지 못했던 촌락의 박멸이나 인명의 살상은 이에 비해 더욱 심한 경우가 진실로 많았으나 그 사실을 밝힐 도리가 없었다. 이 운동에서 천도교도의 행동이 특히 치열하였기 때문에 가장 참혹한 화를 당했으나, 알려지지 않은 일이 허다하다. 전국에서 피살된 독립단원은 실로 아무리 적어 내려가도 끝이 없을 터...”(박은식, 한국민족운동지혈사, 1920)

3.1정신은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종교와 화합과 일치를 통해, 민족과 국민을 이민족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고, 국민이 주인되는 나라를 공동으로 만들어내는데 종교인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어려은 시기에는 종교인의 역할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니, 종교단체에서 3.1운동을 기념할 때는, 다른 종교의 적극적 역할, 비종교인의 적극적 역할을 오히려 강조해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3.1정신의 참 모습일 테니까요.

ㅡ 한인섭 교수(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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