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을 믿습니다. (요한복음 5:24)
사도신경의 맨 마지막 신앙고백은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생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를 믿는 나는 영생을 얻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영생(永生)이란 무엇일까요? 글자 그대로의 뜻은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말합니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이란 죽음 없이 영원히 이어지는 생명을 말하는 것일까요?
중국의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이제 그에게 한 가지 간절한 소원이 생겼습니다. 천하를 손에 쥐었으니 불로장생하며 영원토록 황제 노릇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동방의 나라에 불로초가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신하 ‘서복’에게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명을 내립니다. 서복은 배 60척, 일행 5000명, 그리고 동남동녀 3000명을 이끌고 동방으로 향했습니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우리나라 제주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서복이 불로초를 찾으러 왔다가 돌아갔다고 해서 서귀포라는 지명이 생겼답니다.
이렇게 진시황은 죽음을 면하고 불로장생해 보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49살 나이에 객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진시황처럼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자 몸부림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히 9:27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말씀대로 죽지 않고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영생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영생이란 자신은 죽더라도 자신의 분신을 이 땅에 영원히 남겨두는 것일까요?
지난 2006년 북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회담을 위해 평양을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평양 시내에서 기가 막힌 기념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영생탑’입니다. 그 영생탑에 이렇게 써있었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김일성이 죽은 뒤에 김일성의 소위 유훈통치를 위해 아들 김정일이 세운 것입니다.
최근에는 김정일이 죽은 뒤에 다른 영생탑이 세워졌는데 그 문구가 이렇게 바뀌었답니다.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리고 북한 전역에 약 3000여개의 영생탑이 세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비록 김일성과 김정일이 죽었지만 지금도 북한을 통치하고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100년을 가겠습니까? 1000년을 가겠습니까? 머지않아 비싼 돈 주고 세운 저 영생탑이 무너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영생은 당사자인 자신이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죽고 그 흔적이나 분신이나 사상이 이 땅에 남아있는 것을 영생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영생이란 무엇일까요? 요 1: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은 예수 믿은 뒤에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아니 예수 믿기 전의 사람들에게는 영생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은 우리가 후천적으로 새롭게 얻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에 생명이라는 말이 세 가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비오스’(Bios)입니다. 이 말에서 영어로 ‘생물학’ (Biology)이라는 말이 나왔고, 우리가 흔히 ‘바이오’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비오스는 한 마디로 생물학적 생명을 말합니다. 생명체가 가지는 공통된 살아있는 현상을 말합니다.
둘은 ‘프쉬케’(Psuche)입니다. 이 말에서 영어로 ‘심리학’ (Psychology)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넋’이라고 말하고, 또는 ‘혼’이라고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프쉬케입니다. 그러니까 이 프쉬케는 한 마디로 인간의 생명을 말합니다. 인간만이 가지는 구별된 생명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목숨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개나 돼지도 생명이 있다고 말하지만 개나 돼지의 생명을 목숨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의 생명을 말할 때만 목숨이라고 말합니다.
셋은 ‘조에’(Zoe)입니다. 이 말은 그대로 생명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특히 ‘아이오니온 조에’(aionion Zoe)라 하여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이라고 번역할 때 사용되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조에라는 말을 영생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조에는 사람의 생명인 프쉬케와 다른 또 하나의 생명 바로 영생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에게는 세 가지 생명이 있습니다. 우선 비오스 즉 생물학적 생명입니다. 사람도 생물 특히 고등동물로서 생명체이기 때문에 이 비오스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다음으로 프쉬케 즉 목숨입니다. 다른 모든 생명체의 생명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생명 곧 목숨을 말합니다. 사람은 비오스와 함께 프쉬케 즉 목숨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조에 즉 영생입니다. 다른 모든 인간과 구별되게 오직 예수 믿는 사람,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따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비오스와 프쉬케를 가지고 태어났고 그리고 예수 믿은 후 새롭게 영생인 조에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은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 새롭게 얻게 되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명입니다.
영생을 얻으면?
그러면 영생이 있는 삶과 이 영생 없이 사는 삶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통해 이 점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1장에서 빛과 어둠이라는 비유로 설명합니다.
요 1:4-5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그’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생명’이란 바로 조에 즉 영생을 말합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 곧 영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생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이 세상에는 어둠 뿐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 세상에 비로소 영생이 임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마치 저 동녘에 해가 뜨고 나서 온 누리에 빛이 비추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뒤에 비로소 영생이 임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보기 어렵습니다만 어려서 곳곳에 이런 포스터가 붙어있는 것을 흔히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 떨지 말고 자수하여 광명찾자” 간첩에게 자수하도록 권유하는 포스터입니다.
사실 간첩은 남한에서 활보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발각될지 모릅니다. 일단 발각돼서 체포되면 무서운 처벌을 받아야만 됩니다. 그러니까 간첩은 남한 땅에서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창 3:8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은 지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뒤에 생긴 일입니다. 그 때까지는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면 달려 나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복된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면 도망쳐야 하고 피해서 숨어야 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무거운 죄의식이 그 심령을 짓누릅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이것이 영적인 어둠입니다. 이런 영적인 어둠에 사로잡히면 그 생명이 위축됩니다. 더 이상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관점에서 영생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요 17: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려면 “안다”는 동사를 주목해야 합니다. 원어로 안다는 말은 ‘기노스코’ (ginosko)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기노스코는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그리고 체험을 통해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씀하고 있은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관계적인 앎이요 체험적인 앎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더 분명합니다. 창 4:1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동침하매’라고 번역을 했지만 이것은 의역을 한 것입니다. 단어 뜻 그대로 직역을 하면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매”입니다. 히브리어 “야다”라는 단어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안다는 말은 부부가 함께 살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면서 서로 깊이 체험적으로 알고,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는 관계를 이루게 된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때문에 내가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찬송 3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를 작사한 존 뉴턴 목사님은 깊은 영적 어둠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입니다. 20세에
이미 노예매매에 종사하기 시작해 후에는 노예선의 소유주이자 선장이 되었습니다.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1748년 5월10일 폭풍 속에서 난파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자비를 베푸소서...” 놀랍게도 그토록 사납던 폭풍우가 갑자기 잔잔해 졌습니다. 뉴톤은 그동안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상상하지 못했던 평안이 물밀 듯 밀려옴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도무지 맛보지 못했던 기쁨이 가득함을 느꼈습니다.
그 이후 그의 삶은 변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혀 새로운 삶입니다. 과거와 다른 새사람으로서의 삶입니다. 이제 노예선 선장직을 떠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예폐지운동에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은혜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작사하여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 내 삶이 새롭게 변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변화된 삶 속에 내 속에 하늘의 평안과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어둠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빛 가운데를 걷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그러면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롬 6: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영생은 하나님의 은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은사라는 말은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들 중의 최고는 바로 이 영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이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까? 성경의 요약이라는 요 3:16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요 1:12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믿는다는 것은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주님을 모셔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내 심령 속에 주인으로 모셔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게 될 때 영생이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내게 영생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청년 닉 부이치치는 호주의 브리즈번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테트라 아멜리아 병이라는 희귀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선천성 장애우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럽고 미래가 절망적이어서 10살 때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인격적으로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예수를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그러자 그 삶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꿈이 생겼습니다. 전세계의 장애우들과 절망가운데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꿈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리피스 대학에서 회개학과 재무학을 복수전공 했습니다. 피나는 노력으로 골프도 치고, 수영도 하고 심지어 농구까지 합니다. 겨우 남아있는 발가락 두 개로 컴퓨터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넘기며 원하는 성경구절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열정이 충만하게 됐습니다. 이동이 불편한 몸이지만 전 세계를 다니며 간증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전합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합니다.
그렇습니다. 닉 부이치치가 이런 변화된 삶을 살게 된 것은 단지 자신의 의지적인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저가 예수를 믿고 영접하게 되면서 생긴 변화입니다. 그가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생긴 변화입니다. 그는 영생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이미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면 우리 안에 영생이 있고, 그 영생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 점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확인해야 할 것은 영생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영적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 된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우리가 누리게 되는 최상의 복입니다. 그리고 이 영생은 장차 저 천국으로 이어지는 놀라운 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확실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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