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문화 답사기 2. 서울 서부

ree610 2017. 9. 1. 18:23

선교 성지서 신앙 옷매무시 여미다

언더우드 등 근대 한국교회 기틀 다진 선교사들의 열정 배어 있어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한국 기독교 선교역사의 현장이자 한국 근대사를 반추해 볼 수 있는 사색의 공간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여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했고, 일부는 독립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지근거리에 있음에도 옛 선교사들과의 만남은 순탄치 않았다.

연이틀 내린 비가 취재일정을 늦춘데 이어 비가 그친 다음날도 봄이 왔음을 잊은 듯 흐린 하늘에 바람이 거셌다. 야외 사진촬영의 걱정이 앞섰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궂은 날씨를 무릅쓰고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향했다.

지하철 2호선 6호선 합정역 7번 출구로 나오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알리는 표지판이 길을 안내했다. 200m 남짓, 가는 길목에는 이름 모를 아담한 커피전문점, 개성 담긴 간판이 도드라지는 동네 헌책방 등 아기자기한 상점들로 눈이 즐거워질 무렵 새로 단장한 늘씬한 홍성사 건물을 지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다다랐다.

입구에 들어서자 오른편으로 태극기를 비롯해 게양돼 있는 여러 나라의 국기에 시선이 멈췄다.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역만리 타국에서 한국을 찾은 선교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그들 나라의 국기를 세웠다고 한다. 미국, 영국, 캐나다, 심지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선교사들. 지금은 비행기로 하루아침에 닿을 수 있지만 120년 전에 뱃길로 왔을 그들의 고된 여정은 상상만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모국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복음의 빛을 나누기 위해 당시 변방이던 한국을 찾은 그들의 순교적 신앙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 주십시오’ 라는 안내 간판에 따라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묘원에 오르자 나를 반기듯 세찬 바람이 한바탕 온몸을 훑고 지나가며 날씨 탓에 인적 드문 묘원에서 친구가 되어준다. 달리 생각하면 선교사들의 힘겨웠을 선교 여정을 되새김하기에는 햇빛 화창한 날보다 오늘 같은 궂은 날씨가 어울릴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 위로부터 백정 전도에 힘쓴 무어 선교사와 독립을 위해 싸웠던 헐버트 선교사, 한국 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 일가와 아펜젤러 가족의 묘. 언더우드 선교사 시신은 미국에 있다가 1999년 양화진으로 이장됐으며 무어 선교사 묘에 총탄의 자국은 세월의 흔적을 말해준다. 
 

한국 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 일가와 아펜젤러 가족, 일제에 억눌린 한국인들을 대변했던 언론인 베텔, 백정 전도의 개척자 무어 선교사, 여성 교육의 선구자 스크랜턴 대부인, 대한성공회 2대 주교였던 터너 선교사,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헐버트 선교사 등이 이곳에 묻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잠들지 않고 묘비명으로 양화진을 찾은 순례자들과 대화를 나눈다.


“나에게 천 번의 생명이 있다 해도 나는 그 모두를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고 말한 켄드릭 의료선교사,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남긴 헐버트 선교사, “나는 섬김을 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라는 아펜젤러의 장녀 A. R. 아펜젤러 여선교사 등의 마지막 대화에는 한국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배어있어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묘원 넘어 보이는 강변도로에는 요란한 소릴 내며 달리는 차들이 가득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양화진 묘원에서는 그 소음마저 아득하게 들린다. 단지 재빠른 차량 행렬마냥 양화진은 지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갈 뿐이다.

121년 전이다. 양화진에 외국인선교사 묘원을 조성된 계기는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으로 고종의 시의였던 의료선교사 존 헤론의 유해가 안장되면서 시작됐다.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돌보다 이질에 걸린 헤론 선교사가 생을 마감한 때가 삼복더위가 기승하던 1890년 7월, 당시 유일하게 외국인 묘지로 사용하던 제물포까지 갈 수 없게 되자 언더우드 등 동료 선교사들은 그를 매장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우여곡절 끝에 조선 조정으로부터 지금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 자리를 얻어냈다.

이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이 땅에 복음을 전하고 우리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외국인 선교사와 그들의 가족 145인이 안장되면서 양화진은 한국 기독교의 성지로 거듭나게 된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1999년까지는 거의 방치되었으나 2000년부터 2003년까지의 묘원 정리사업을 거쳐 한국100주년기념교회가 관리하면서 어엿한 기독교 신앙유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작년만 해도 한국 기독교 선교 역사를 돌아 볼 수 있는 기억의 터에 7만 여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아갔다. 특히 한국 교회가 사회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는 최근에는 방문객의 수가 더욱 늘고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면서 사명을 되새기고자 왔다는 변혜란 씨(30.분당만나교회)는 “4번째 방문했는데 올 때마다 평안함이 스며들고요. 선교지였던 우리나라가 100년이 지나 선교하는 나라가 된 데에는 초기 선교사님들의 피땀 어린 믿음과 사랑이 있었음을 느낀다”고 방문 소감을 말했다.

주일을 제외하고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은 문은 항상 열려져 있어 방문객들을 반긴다. 양화진 묘원의 이성실 목사는 “이곳에 계신 선교사님들의 신앙과 숭고한 정신을 통해 기독교인으로서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 반성해 볼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며 신실한 신앙생활을 위해 방문할 것을 적극 독려했다.

양화진을 관리하고 있는 100주년기념교회는 양화진 안내와 관련하여 일체의 헌금이나 기부를 받지 않는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무료로 개방되며 사전 예약만 하면 숙련된 자원봉사자들로부터 양화진과 선교사 소개 영상 프로그램과 묘역 안내도 받을 수 있다.(문의:02-332-9174,www.yanghwajin.net)

‘원씨 가족’ 큰 발자취를 보다
언더우드가 기념관

  
 ▲ 언더우드가 기념관 전경. 언더우드가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6·25를 거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국의 선교와 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한국 근대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특히 학원선교와 의료선교가 근대교육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는 실로 대단했으며, 그 최대 수혜기관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단연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연세대학교일 것이다.


현재 연세대에는 교사로 사용하고 있는 언더우드관과 스팀슨관, 1987년에 일부 복원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 등 다양한 한국 기독교 유적이 보존 혹은 복원되어 있는 데 그중 한국을 사랑한 언더우드 일가의 흔적이 묻어나는 언더우드가(家) 기념관을 찾았다.

연세대 캠퍼스 서쪽 끝자락, 이과대학과 생활과학대학인 삼성관을 지나 안쪽 숲으로 걸어가면 담쟁이넝쿨을 입은 언더우드가 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언더우드가 기념관은 연세대 설립자인 언더우드 선교사와 한국의 근대교육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했던 그의 가족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2003년에 그들이 기거했던 연희동 사택을 새롭게 조성해 개관한 후 2006년 확장 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 기념관 내부는 은은한 조명과 서양식 가구들이 어우러져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전시실은 크게 생활 재현 공간 언더우드의 삶, 유품들이 전시돼 있는 한국과 언더우드, 그리고 정보를 제공하는 문헌자료실로 구분돼 신촌 원씨 가문의 발자취를 선명하게 그려낸다.


언더우드의 삶 전시실에서는 1885년 한국 땅을 밟은 언더우드 선교사와 그의 아들과 손자인 원한경박사, 원일한박사가 한국 문화에 동화되며 살아갔던 모습을 서재 내에 있는 저술한 책, 가족사진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한국과 언더우드 전시실에서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직접 작성한 한영사전, 타자기 회사의 회장이던 형 존 토마스 언더우드에게 대학설립의 꿈을 이야기하며 지원을 요청한 친필편지와 여러 대의 타자기,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원일한 박사의 군장물 등으로 이들이 한국 역사에 어떤 족적을 남겼는지 실감케 한다.
매월 2000여 명의 방문객이 찾는다는 언더우드가 기념관은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언더우드가의 손때 묻은 유물들로 가득 차 있고 관리 보전이 잘 돼 있어 꼭 찾아가 볼 명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