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국 교회의 유물들이 수백 점에 이르고, 전국 각지에 새로운 기독교 시설들이 잇따라 건립되는 시대다. 주5일 근무제의 확산으로 주말이면 가족 단위 혹은 교회 단위로 여행을 떠나는 성도들의 발길도 늘어가고 있다. 이런 추세에서 금수강산 방방곡곡에 기독교 유산들을 발굴, 소개하여 독자들에게는 유익한 여행정보와 선교초기 순수신앙을 알리고, 한국 교회의 소중한 자산들을 널리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 붉은 벽돌로 쌓은 하나님의 집, 벧엘예배당. 정문에 들어서면 초대 목사 아펜젤러 선교사의 흉상과 최초의 한국인 담임 최병헌 목사의 흉상이 온화한 표정으로 벧엘 예배당을 바라보고 있다. | ||
서울 한복판의 고요한 섬 정동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화사한 햇살, 싱그러운 봄바람을 따라 예쁘게 단장한 정동길을 걷노라면 각박한 삶의 시름이 어느새 달아난다.
연인들의 추억이 서려있는 덕수궁 돌담, 길게 늘어선 가로수,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오래된 건물, 길모퉁이에서는 어느 화가가 화폭을 채우고 있고 그곳에 자리한 사람들 얼굴에는 여유로움이 만연하다. 그 길에 서면 발걸음이 더뎌진다. 다른 곳이라면 스치고 지나칠 벤치에도 잠시 앉힌다. 정동(貞洞)보다 정동(停洞)이 더 어울리는 곳. 서울 한복판에 고요한 섬과 같다.
정동의 본래 이름은 정릉동,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의 묘가 있던 곳이다. 신덕왕후의 묘는 지금의 서울 성북구 정릉으로 옮겨졌지만 이름은 그대로 남아 정동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미국, 영국, 러시아의 공사관이 들어서면서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 됐고 근대문물을 받아들인 이곳에서 자연스레 기독교 선교의 첫 장이 펼쳐졌다.
한국 최초의 기독교 교회 건축물이 서 있는 곳, 근대 교육을 처음으로 시작한 곳, 여성교육의 발상지, 한국 기독교의 요람이라 말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정동이다.
정동 유적의 중심, 정동제일교회
대한문 옆 덕수궁 돌담을 따라 펼쳐지는 정동길을 걷다보면 붉은 색 건물의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과 마주한다.
정동 사거리에서 한 눈에 들어오는 벧엘예배당은 114년 전 지어진 교회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세련돼 보이지만 예배당에 기대면 빛바랜 붉은 벽돌이 역사의 향기를 뿜어낸다.
정동제일교회의 역사는 1885년 한국에 온 아펜젤러 선교사가 같은 해 한국 최초의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시작된다. 복음전도활동이 금지되어 한국인 대상의 공식적인 집회를 가질 수 없던 상황에서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1889년부터 기독교에 대한 반사회적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참석하는 교인 수가 늘어가 1892년에 200명이 넘어섰다. 1894년, 비좁은 장소가 문제가 되자 교인들은 정식으로 예배당 건축을 결의했다.
8000달러가 넘는 건축비는 한국 교인들도 헌금했지만 대부분 아펜젤러 선교사가 미국에서 모금해왔다.
1895년 9월에 착공한 공사는 차질 없이 진행되어 1897년 12월 26일에 벧엘예배당 봉헌예배를 드리게 됐다. 설립 당시 벧엘예배당은 한국 최초의 빅토리아식 고딕 서양 건축물로 장안의 명물이 되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1920년대 교인이 1000명으로 늘어나면서 증축하게 됐고 한국전쟁으로 예배당이 손상되어 1953년에 복구했다. 1987년에는 화제가 일어나 또다시 복구, 2001년 대보수작업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다행히 몇 번의 증축과 보수를 했으나 벧엘예배당은 완공 당시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예배당 내부로 들어가면 옛 향기가 물씬 풍긴다. 고딕 양식의 건축물임에도 대형 기둥이 대신 지지하고 있는 오래된 나무기둥과 세월을 이겨낸 빅토리아풍 창틀은 옛스러움을 더한다. 강단에는 한국 최초의 강대상과 파이프오르간이 고고한 기품을 뽐낸다. 첫 예배 당시의 유물인 강대상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제작됐으며 이후 한국 개신교 모든 교회가 같은 형태로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다. 파이프오르간은 1918년 하란사 여사의 모금운동으로 마련된 것으로 한국전쟁 때 유실됐다가 2003년에 복원됐다. 이 파이프오르간을 중심으로 찬양대가 구성되어 김애식, 이흥렬, 현제명 등 많은 음악가들이 배출됐다.
사적 256호로 지정되어 문화재예배당이라고도 불리는 벧엘예배당, 전쟁과 개발 시대를 거치면서 살아남은 이 곳에 교파를 초월해 연간 4000에서 5000명의 방문객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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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교육 출발지는 ‘단장 중’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 공사 중인 심슨기념관 입구. 크지 않은 출입구가 적당한 개방감과 폐쇄감을 보여준다. | ||
정동제일교회를 중심으로 배재학당과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이 설립한 이화학당은 모두 담을 같이 하여 붙어 있었다.
이러한 지형구도는 학원 복음화를 통해 복음을 전파했던 한국 기독교 초기 선교전략에 촉매제 역할을 했고 그 중 이화학당은 봉건적 사회 분위기가 팽배했던 시기에 여성 신교육의 출발지가 되었다.
당시 교사로는 메인 홀, 심슨기념관, 에드가 후퍼 기념관이라 불린 보구여관, 프라이 홀이 있었으나 폭격, 화재 등으로 헐러 지금은 심슨기념관만이 이화 교정 안에 유일한 초기 건축물로 자리 잡고 있다.
심슨기념관은 중학과와 대학과의 창설로 메인 홀만으로 교실난을 해결하지 못하자 1915년 미국인 사라 J 심슨(Sarah J. Simpson)이 위탁한 기금으로 세워졌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심슨기념관이란 명칭을 붙였다.
이 건물은 전형적인 고딕풍의 3층 벽돌 건축물로 창문 아치 중앙과 모서리를 흰 화강암으로 장식하여 벽면에 붉은 벽돌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현대 학교건축에서 느껴지는 몰개성과 대비되어 더욱 가치를 지닌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역사적 상징성이나 문화적 기념성 등이 두드러져 등록문화재 3호로 지정됐다.
아쉽게도 근대교육사의 유서 깊은 장소인 심슨기념관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조금의 기다림이 필요할 것 같다. 현재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심슨기념관은 1922년 증축 당시의 원형으로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라 건물 안을 살필 수 없다. 그러나 올해 5월 이후면 공사가 끝나 새롭게 단장한 이화박물관으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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