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포럼

손에 손을 잡고서1

ree610 2005. 10. 5. 09:36

제9차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를 위한 주제 성서연구 1
: 손에 손을 잡고서 은혜의 날을 함께 나누기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자. 이 선포는 우리의 기도에 하느님이 응답한 것이다. 기도는 총회의 주제 속에 담겨져 있다. 루가복음4장은 예수의 선언(영의 선언)이다. 이 선언으로 예수는 자신의 봉사와 교회의 선교를 우선해야 함을 결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라틴 아메리카에서 이러한 반향이 일고 있다. 예수의 설교는 변혁하는 정의를, 가난한 자를 위한 좋은 소식을 그리고 치유와 해방을 성령/론에 결합시킨다. 예수는 설교한다. 이사야 61장이 지금도, 모든 인간과 모든 시대에 가치가 있다고. 누가복음 4장의 마지막 구절에는 예수와 백성 사이에 커다란 충돌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당대의 지도적인 사람들과의 충돌이다. 여기에는 벌써 예수의 죽음을 의미하는 십자가의 그늘이 드리워진다.

눅 4,16-30

사 61,1-4

   우리는 누가복음 4장 16절-30절 이해하기 위해서 그 전체의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 이런 조건은 의미심장하다. 결국 이 본문은 이사야의 말씀에 대한 예수의 경전읽기, 텍스트해석 그리고 실제적인 적용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적용이 예수를 배척하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다윗 왕가 출신성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가난한 자를 위한 등장은 청자들에게 그를 죽이는 장면까지 몰고 간다. 이 자체의 죽음을 부르는 소리는 이사야 61장에서 가로질러 퍼진다. 포로기에 또는 아마도 그 이후에 가장 침통한 빈곤이 덮쳐진다. 사람들은 빈털터리인 자신을 발견한다. 학개서에 분명이 설명되어 있다(학1,6). 이사야 61장 1절과 2절은 루가복음에서 반복된다.  하지만 2절 다음부터 이사야 61장은 다른 흐름으로 더 나아간다: 시온이 높여진다. 주 하느님은 인간과 공동체의 한 가운데 계신다. 우리는 이사야 61장을 이것의 전체맥락에서 지켜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이러한 “주님의 은총의 해”에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위한 선택이 왜 우선적으로 배치되어야 하는지 더 잘 알 수 있다.

   “지금 여기의 브라질과 너무 흡사하다!” 루가복음과 이사야서에서처럼 사람들이 성서의 오늘의 자리에 귀 기울인다면,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인간을 여기로 부르는 것이다. 당대의 누가복음과 이사야서는 따라서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그러한 일은 오늘 여기에서도 일어나고, 우리의 고유한 경험과 상응시킬 수도 있다. 그러한 일은 이사야61장의 시대에서처럼 그로부터 약 500 년이 지난 이후에 예수시대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오늘의 세상에서 일어난다. 그리하여 성서는 우리에게 다가온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그러한 일을 여기에 우리 자신의 터전과 땅에서, 우리의 삶과 희망으로 발견했다. 우리는 깜짝 놀랄만한 백화점에서보다 이러한 성서의 세상을 더 친근하게 느낀다. 그런 백화점은 화려하지만, 우리의 진짜 현실의 세계는 아니다. 성서에서 나오는 투쟁들이 우리의 현실에 훨씬 가깝다. 성서는 마음으로, 여기 있는 인간들 여성들, 어린이 그리고 남성들의 눈과 발로 포착되는 현재하는 실재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준 하느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우리 자신의 땅에서 경험할 수 있다. 성서는 우리 가운데 살아 있다.

   우리의 매일의 삶 가운데서, 특히 희망 없는 인간이 사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러한 묘사들을 구체적으로 동료인간에게서 볼 수 있다. 우리가 자기 것이 없는 인간에게 경청하면, 곧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는 것이다. 우리의 협력공동체에서 살면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 덕으로 사는 것이다. 고통당하고 더 좋은 날을 기다리는 이러한 인간들 통해서 성서는 우리를 위해 현실로 살아 있게 된다. 교회 안에 가난한 자는 우리에게 요청한다. 깨어서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라고(눅10,25-37과 행2-6 비교). 성서와 고통당하는 자들 간에는 부합점이 있다. 우리는 이것을 붙잡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언표 해야 할 단순한 관찰이 아니다. 그 이상으로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힘을 가진다. 결국 영은 바로 누가복음 4장 16절-30절에서 보면 사건의 과정을 이끌고 있다. 영의 힘으로 예수는 갈릴래아로 떠났고(눅4,14-15), 영 가운데서 배치되었고(눅4,18-19) 영의 의한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놀랄만한 말씀을 했다. 그 분은 이러한 말씀을 부분적으로는 이사야서에서 인용한다. 하지만 다른 방식, 그 말씀을 순례를 위한 자신의 안내하는 별로 옛 것을 새 것으로 만든다. 예수가 분명하게 만든 것은 이미 그 전에 있었다. 그 것은 예언자들이 이미 말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관찰할 수 없다. 이사야서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해석으로 예수는 예언함으로 새로운 삶을 제시한다. 그는 새로운 해석을 일상에서 그리고 이것이 주는 도전에 적용시킨다. 이러한 문서강독을 위한 방식은 “민중에게 가까이하는 성서강독” 방법이 된다. 이러한 강독으로 사람들은 가난한 자를 이들의 성서읽기의 방식으로 강화시키고 입증한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다시 생동감을 갖고 삶에 가깝게 다가온다. 동시에 이야기는 인간을 억압하고 이들의 자유를 빼앗는 구조에 맞서는 특성을 갖는다.

   존엄한 생명을 위해 본질적인 것은 근본 토대로 들어가기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아에게 다섯 가지 임무가 부여 되었다. 마지막 임무는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는 것”(눅4,19)이다. 그것은 최종적이며 가장 중요한 임무이다. 주님의 은총의 해는 약속의 땅(레25장)에서 공동체의 물건을 분배하도록 모든 인간의 권한을 선포한다. 존엄한 삶은 땅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땅이 없는 삶이란 인간존엄에 도움이 못 된다. 브라질에서 비극은 이렇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불과 소수만이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근거지 없이 살아 온 수백 년 현존의 땅이 불행한 빈민지역으로 전락했다. 오, 하느님이 우리에게 은총의 해를 누리게 하시고 문을 열고 울타리를 부수어 주신다면!

   주님의 은총의 해에 최고의 축복을 받는다. 다섯 가지 증거가 나타난다. 두 가지는 말씀으로 그리고 두 가지는 행위로 나타난다. 성서의 세계에서 말씀과 행위는 두 가지 형태의 현상인 그 자체로 현실화된다.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진다. 하느님의 은총이 이들의 불행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갇힌 자들에게는 자유가 선포된다. 이 두 가지 조망이 새로운 삶에 대해 인간들이 요구함으로 서로 각축을 벌인다. 주님의 은총의 해는 다음의 사실에서 드러난다. 눈먼 자가 볼 것이고 억압받은 자가 해방된다는 것. 주님의 은총의 해를 갈구하는 것은 값어치가 있다. 이것을 표현하는 말씀은 위력적이며, 그 해방하는 영향은 순수한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은총의 말씀”이다(눅4,22).

   예수는 자신의 말씀으로 가난한 자, 고통당하는 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를 위해서 그 누구에게도 닫혀 있지 않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이 배타적이라는 것. 이것은 문제가 있다. 사람이 자신의 소유를 베푸는데 인색 할수록 가난한 자를 위한 것은 더 적어진다. 예수는 교회를 세웠지, 배타적인 집단을 만들지 않았다. 이미 여기에 대한 예언의 증거들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성서 전반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시편에 의지해 기도한다. 지혜문학이 이것을 우리에게 알게 한다. 공동체 안에 과부와 억압받는 자를 위한 쉼터가 없다면, 하느님의 백성이란 무의미하다. 이사야서 전반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다. 어린 아이와 과부와 가난한 자가 “나의 백성”(사3,15)이다. 그리고 “종”은 하느님의 현재의 표시이다(사42,1-4;52-53). 희망 자체는 연약한 어린 아이 안에서 기인한다. 이들은 “주 제바옽의 이스라엘에 표현이며 지혜상징”이다(사8,18; 비교 사7,10-17;9,1-6;11,1-5).

   이것이 일반적으로 이사야 61장과 예언의 상황이다. 이것은 또한 나자렛 예수의 말씀의 토대이다. 이러한 예언하기는 더구나 단지 토대만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예언하기는 전체의 구조를 규정한다. 첫 계약과 두 번째 계약 사이를 가를 그 어떤 근거도 없다. 양 쪽 안에서 삶이 포괄적으로 파악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알게 된다. 삶이 믿음으로 자라난다고. 최상의 길이 있다. 우리가 신약과 구약의 가르침을 사람으로 여는 것이다. 이로써 백성을 함께 모은다. 실제로 누가복음 4장은 히브리 문서의 관계로부터 관철된다.

   이사야 61장은 망명 중에 비탄에 쌓여 있다. 이들 백성에게 모든 것이 마른 뼈들의 언덕이 되었다(히스37). 그들은 상실한, 상처 입고 고통 받은 얼굴을 한 노예들이다(사40-55). 하지만 이러한 지치고 황폐한 현존 속에서 새로운 백성이 탄생한다. 이사야서를 전체로 읽기란 힘들다. 바벨론포로기의 경험과 함께 얽혀 있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활동과 우리 고유의 역사를 모아서 세워야 한다. 우리는 가끔씩 이러한 결합을 목도하기도 하고 이것을 간과하기도 한다. 현대 브라질 인들에게 결국에 아마도 가끔씩 우리의 미국의 근원을 상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사람들이 유럽에 관해서 환상을 갖는다면 더 나은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의 상처는 너무 크며, 그렇다고 해결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원주민들과 아프리카계 브라질 여성들은 늘 울며 탄식하곤 한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느낀다.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지역은 살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라고. 우리는 종종 충분히 기뻐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일터와 거처에서도 많은 눈물을 뿌린다.

   은총은 용기를 갖게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온성으로 탈주해야 한다. 루가복음 4장 18-19에는 이사야 61장 1절과 2절이 인용되어 있다. 3절의 아사야 서에는 시온의 의미에 비중을 두었다. 이러한 고양은 우리로 하여금 루가복음 4장의 환상을 현실화하도록 한다. 그 대신 그런 환상은 황홀하고 선한 의도를 단순히 남게 한다. 루가복음 4장은 차라리 최종적으로 개인적인 증언을 위해 영감을 부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공동체의 관계없이, 서로 맞서서 힘을 내세우는 자들의 단체로의 관계없이. 마치 우리가 말하듯이. “투쟁을 위해 단결”하기로. 예언자가 시온에 관해서 말하듯이 우리가 이해한다면, 우리는 인식한다.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되어서 고통당하는 형제들을 구해낸다는 것을. 우리가 손에 손을 맞잡고 설 때에만 이 일은 가능하다! 이러한 종류의 힘만으로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어린이는 탁아소에서 연합한다. 우리가 모두인 것이 확인되지 않으면 우리는 끝없는 비참의 구렁텅이로 빠질 것이다. 이것이 3절에 나오는 “재난”과 “영예”의 차이이다. 우리가 최상의 의도를 지닌다고 하더라도 홀로 남게 된다면, 우리의 동력만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시온”이 된다면 “기쁨의 기름”이 사방에서 솟아날 것이다. 우리의 공동체는 우리의 삶을 위한 “기쁨의 기름”이 될 것이다.

   결국 3절과 4절은 환상적인 초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주목하지 않으면 의외의 에큐메니칼 처지를 지나칠 것이다. 그렇지만 몇 몇 사람은 성서에 조차도 두 갈래 의미를 갖게 하려 애쓸 것이다. 이들은 성서의 말씀을 사람들이 서로 맞서는데 적용시킨다. 가장 오래 된 사건은 그리스도인과 유대인을 구별하고 분리한 일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 하느님에게 새로운 에큐메니칼의 길을 간청하는 것이다. 이 길은 서로 다른 교회와 종교들이 공동으로 논의하면서 생긴다.

   그것은 우리에게 은총을 주는 자극이기도하다. 기름부음 받은, 왕관을 쓴 그리고 해방된 육체가 “정의의 나무”로 불린다.(사61,3) 이러한 예언하기는 새로운 창조에 대한 환상을 일으킨다. 한 번 더 피조물은 환영받고 이름을 갖는다(창2,19). 삶은 경험되고 연습된 정의의 토대 위에서 새롭게 창작된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인간은 다시 새롭게 사회의 그물망 속으로 들어간다. 인간들은 새로운 피조물이며, 정의의 정원에서 새롭게 거주한다.

   기도

   많은 이름을 가지신이여, 당신께 간구합니다.
   우리에게 오소서, 오셔서 우리와 같이 가소서.
   이로써 우리가 당신의 은총으로 그리고 평화로 변화되기를,
   우리를 희망으로 채우시어, 우리 앞에 장벽을 허물게 하소서.
   에큐메니칼 행진에 우리를 내 비추시고, 만남과 대화를 갖게 하소서.
   당신의 영을 보내주시고, 우리의 예언자적 위탁을 강하게 하사 해방을 선포하게     하소서.
   우리가 신뢰와 안전을 찾으려 한다면 당신의 영으로 부드러운 바람을 일으키소     서.
   그렇지만 우리가 너무 정주하고 우리의 소리를 높이려고 한다면, 성령으로 하여     금 강한 바람을 일으키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불어 넣는 평화를 우리 몸에 맞이하게 하소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교회들 사이에서 그리고 민족들 사이에서 평화의 행위     가 밝혀지게 하소서.
   당신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은총이 우리 안에 임하시고, 우리의 손을 정화시키시     고 당신의 사랑의 선물인 평화를 선포하게 만드소서.
   순례의 여정에 우리에게 당신의 축복을 부으소서. 이 여정에서 우리는      정의, 돌봄과 영접의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아멘

  (Milton Schwantes and Elaine Neuenfeldt)

이번 성서의 텍스트 읽는 법

   루가복음 4:16-30과 이사야 61:1-4를 읽은 후에 당신은 윗글의 필자들인 밀톤 슈완테스와 엘래이네 노인펠트에 동의 하는가? 즉 우리는 "대형 백화점“보다 이러한 성서의 세계에 더 친밀해지는가? 어디에서 당신은 자신의 매일의 경험과 이러한 성서세계와 관계 지을 수 있는가?

   루가복음 4:18-19에 따르면 영에 이끌리어 예수는 자신의 선교의 목적을 정하신다. 이러한 유도가 어떻게 가난한 자와 눈먼 자와 억압 받은 자의 선교사역의 능력으로 가능한가? 실제로 좋은 소식, 해방, 발견 그리고 자유를 가져오게 하는 우리의 교회는 무엇인가? 특별한 사례와 이것에 관한 설명을 담은 리스트를 만들어라.

   비신자로서 당신은  자연재해, 전쟁 그리고 가난한 자의 울부짖음을 상상해 보라.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은총의 해”에 관해 말하는 것을 당신은 들을 것이다. 우리의 (선교)사역이 “주님의 은총의 해”의 선포를 믿을만하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 밀톤과 앨레이네는 이사야 61:3-4의 내용을 “놀랄만한 초대”로 묘사한다. 그리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는 용기에 관해 말한다.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희망으로 가정과 일터에서 하느님을 경험하는 이야기를 나누라. 이러한 성서연구가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를 돕고, 이번 대회에서 주제인 “하느님, 당신의 은총으로 세계를 변화시키소서”라는 것에 어떻게 응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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