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형배 재판관이 퇴임식에서 저를 언급한 이유, 이제야 밝힙니다>
- 그와 20년간 유지한 특별한 관계… '사법부가 신뢰 얻기를 바라는 마음' 같았다
김용국 2025.4.11 11:51
지난해 평온한 일상을 강타했던 12.3 비상계엄. 장본인 윤석열이 대통령직에서 쫓겨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계엄부터 파면까지 약 넉 달 동안, 인생 전부를 합친 기간보다 더 절절하게 희로애락을 경험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요건도 절차도 무시한 채, 어설프게 군사정권을 흉내 낸 시대착오적 비상계엄엔 노여움을, 그 위헌·불법행위를 '계몽령'이라는 해괴한 언어도단으로 옹호하거나 더 나아가 국민저항권 운운하며 법원을 습격하고, 폭력과 색깔론 공격을 자행하는 세력엔 슬픔을 느꼈다.
반면, 위헌·불법 세력이 민주적 사법 절차를 통해 단죄되는 것에 기쁨을, 일상의 소중함을 되찾았다는 안도감에 즐거움을 느꼈다. 넉 달간 광장에 나와 민주주의와 헌법 수호를 외친 시민들의 노력 덕분이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지난 4월 4일 오전 11시 22분의 감격적인 장면을 몇 번이나 다시 보았는지 모른다. 개인적으론, 남다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주문을 낭독한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나와는 20년 가까이 소중한 인연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설마, 사실이냐고? 믿기 어렵겠지만, '팩트'다.
- 나와 문형배
탄핵 심판 선고 2주 후인 지난 4월 18일, 헌법재판소는 6년의 임기를 마친 문 대행의 퇴임식을 열었다. 그는 마음이 홀가분한 듯 모처럼 여유 있고 웃음기 담은 얼굴을 보였다. 탄핵 심판 과정에서 언론에 비친 무겁고 진지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퇴임사 순서가 되자 그는 빈손으로 단상에 올랐다. 놀랍게도 퇴임사를 모두 외웠던 것이다. 5분 남짓 말을 이어가던 그가 말미에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생활법률상식사전>, 10만 부가 팔렸습니다. 그 책의 저자인 김용국 선생 … 감사드립니다,"
헌법재판소장(대행)이 퇴임사에서 내 책과 내 이름을 언급하다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럴 리가 없어. 이건 꿈일 거야.
그러나, 꿈이라기엔 너무 선명하고 생생했다. 더구나 그 순간 나는 퇴임식 현장에 있었다. 문 대행의 명예로운 퇴임을 축하해주기 위해서다. 바로 옆에 있던 지인도 놀란 듯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안면이 있는 헌법재판소 직원도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꿈이 아니구나.
'문형배 효과'는 컸다. 언론 생중계와 유튜브 등을 통해 퇴임식을 지켜본 사람들이 경향 각지에서 연락을 해왔다. 친한 친구나 연락 뜸하던 지인, 동문, 직장 내 상사, 동료들은 물론, 아는 기자, 심지어는 오래전 연락이 끊겼던 미국 사는 사촌 누나까지.
그날 오후엔 <생활법률 상식사전>을 펴낸 출판사 편집장이 오랜만에 문자를 보내왔다. 가끔 보내던 안부 문자와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열어 보니 이런 내용이다. "우리 책이 현재 교보문고 실시간 종합 29위예요. 주말 판매 상황을 보고 재판을 찍어야 할지 점검해 보겠습니다."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문형배 효과'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전화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문자와 카톡 메시지, 전화벨 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한결같았다. 문 대행과 내가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굳이 퇴임사에서 이름을 언급한 까닭이 무엇인지. 한 친구는 "도대체 네가 뭐길래 고결한 문형배 재판관이 마지막 자리에서 너 같은 인간의 이름을 부르냐"면서 분개(?)했다.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날은 4월 18일, 공교롭게도 퇴임식과 같은 날짜다.
- 2006년 4월 18일 첫 인연
당시 나는 30대 중반의 '열혈' 법원 공무원이었다. 공무원이 된 뒤로도 글쓰기와 세상에 대한 관심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을 시작한 지 1년쯤 되었을 무렵이다. 유일한 관심 분야는 법, 그리고 내가 일하는 직장 법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돌하지만, 어려운 법과 판결을 일반 시민들이 좀 더 쉽고 만만하게 대하게 하고(법의 대중화), 법원이 좀 더 사랑받도록 바뀌기(사법개혁)를 바랐기 때문이다. 나는 시민들이 법원의 사정과 판사들의 마음을 오해하는 부분을 해소하고 싶다는 야심으로, 다양한 분야의 판사 인터뷰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문 대행은 창원지법 부장판사였다. 그는 소장파 판사로, 사법부 개혁과 신뢰 회복에 관심이 있었고, 시민의 권리를 중시하는 주목 받는 판결을 선고하기도 했다. 그 역시 "법을 알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소신을 밝혀왔다(지금도 남아있는 그의 블로그 이름은 '착한 사람을 위한 법 이야기'이다).
나는 그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내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이내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거절 사유를 요약하면 이렇다. '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제기한 의제(법원의 개혁 등)가 중요한데 내가 언론에 노출되면 의제가 묻히는 경향이 있다. 또한 그동안 계속 거절하다가 특정 매체에만 인터뷰를 하면 오해를 살 수도 있다.' 그는 "제 나름대로 생존할 수 있도록 양해를 부탁드린다"는 말도 덧붙였다.
인터뷰를 더 이상 강요할 수는 없었다. 대신, 역제안을 하였다. 공식 인터뷰를 안 하는 대신, 앞으로 비공개적으로 법원의 개혁, 판례나 법률적인 사안에 대해 조언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평소에 나의 활동과 기사를 유심히 보았다면서 "앞으로 자문에 적극 응하겠다"고 답했다. 비록 인터뷰는 무산되었지만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 자문위원 겸 고급 취재원
그 이후로 나는 법률 기사를 작성하거나 법률 책을 출간할 때 '문형배 판사'의 법률적인 자문을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특정 사안에서 판사들의 의견이 궁금하거나 법률적 견해를 듣고 싶을 때, 법적인 해석이 어렵거나 확신이 없을 때 1순위로 조언을 해 준 사람은 문 판사였다.
내가 몇 권의 책을 낼 때마다 최종 원고를 보고, 법률 자문이나 교정, 감수를 해준 사람도 그였다. 그는 우편으로 교정지를 출력해서 보내주면, 그 교정지에 빨간 펜으로 오류가 있는 부분을 기재하거나 본인의 의견을 덧붙여서 다시 우편으로 보내줬다. 내가 민감하거나 난해한 문제를 질문하면 "왜 항상 어려운 사안만 가져오느냐"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지만, 한 번도 답변을 거르거나 허투루 답을 준 적은 없다.
어찌 보면, 나는 도움을 받고 그는 도움을 주는 일방적인 관계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견해를 솔직하게 얘기해 주었고, 나는 그가 "나름대로 생존할 수 있도록" 그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나에게 그는 자문위원 겸 익명의 고급 취재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런 표현을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최고로 존경하는 법조인이다).
근 20년의 관계를 유지해 오는 사이 그가 나를 부르는 호칭은 '김 실무관(법원의 직책)'에서 '김 기자'로, 다시 '김 선생'으로 바뀌었다. 어느샌가 서서히 서로 신뢰가 쌓여갔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산, 경남 지역에서만 판사 생활을 한, 이른바 '향판'인 그와 수도권 법원 직원으로 일한 내가 실제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았다. 헌법재판관으로 지명된 2019년 이후로는 새해 인사나 명절 안부 정도만 주고받았을 뿐 일부러 거의 연락을 삼갔다.
- 20년간 관계를 유지한 비결
어떻게 오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돌이켜보건대 세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첫째,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였다고 생각한다. 서로 단 한 번도 사적인 부탁을 하거나,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을 꼽고 싶다. 그는 기자들을 이용하는 '언론 플레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에게 특정 기사나 논조를 요구한 적이 없다. 나 역시 그의 조언만을 참고하였을 뿐 기자로서 '특종', '단독'을 의식하면서 그를 '활용'하려 하지 않았다.
둘째,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덕분이다. 그와 나는 20년간 만나면서 차를 마시며 대화하거나 전화나 메일, 서류 등을 통해 의견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된 뒤에는 집무실에서 몇 차례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기도 했지만, 진행 중인 특정 사건에 대한 언급은 철저하게 삼갔다.
그는 술을 즐기지 않는다. 어느 전직 대통령은 낮이고 밤이고 술친구가 넘쳐났지만 그에겐 술친구 자체가 없다. 개인적으로도 그와 술 한 잔을 한 기억도 없다. 그는 본업 외에는 독서와 문학을 좋아하고, 테니스를 좋아하고, 야구 경기를 즐겨 보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공적인 담론을 주고받았을 뿐 사적인 생활에서는 서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점이 오히려 득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사법부가 지금보다 더 믿음을 얻고 사랑을 받으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는 데 서로 뜻을 함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법원이 신뢰를 얻고 일반 시민들이 법원을 제대로 활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서로 통했다고 본다. 다만, 그는 법정 안이, 나는 법정 밖이 주무대라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그는 법관이라는 신분 때문에 법정 밖에서 자유롭게 주장을 펴기엔 한계가 뚜렷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하기도 어렵고, 왜곡된 주장에 반박할 방법도 거의 없다. 그는 우리법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는 이유로 색깔론에 시달리기도 했다. 최근에도 그렇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에 판사의 좌경화, 편향 판결 운운하면서 다양한 공격을 받아왔다.
2010년 참다못한 그는 "사법의 정치화를 경계해야 하지만, 정치의 사법화도 경계해야 한다"면서 당시 여당과 보수 언론의 우리법연구회 해체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기도 했다. 당시 나는 공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여 그의 동의를 얻어서 그의 주장과 입장을 소개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관련 기사: "우리법연구회 없애도 무죄판결 못막는다" http://bit.ly/bJWM7k)
- 퇴임식 전 집무실에서 나눈 말
지난해 11월 집무실에서 만난 그는 이듬해 돌아올 퇴임 이후를 고민하고 있었다.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사회에 도움이 될지 고심이 많다고 여러 가지 선택지를 들려줬다. 그 선택지는 모두 백지로 돌아갔다. 지금 보면 한가하게 들리겠지만, 불과 한 달 뒤 비상계엄 사태가 발생하고 대통령 탄핵심판을 맡게 되리라고 누가 예상했으랴. 그 뒤로는 엄중한 상황에 소장 권한대행으로서 얼마나 책임이 막중할지 알기에 아무런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4일 오전 11시 혼자서 숨을 죽이며 문 대행의 결정문 낭독에 귀 기울였다. 초조한 마음이 든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헌법재판은 재판소장(권한대행)의 뜻대로 결론이 나지 않는다. 재판관 8인이 각양각색이고 각자의 의견이 있는 만큼 당시의 선고 결과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행히 중반이 넘어가자 결과가 가늠이 갔다. 온 국민이 알고 있는 대로 11시 22분 탄핵 인용(파면).
퇴임식 당일 오전 집무실에서 만나 임기를 마치는 소회를 묻자 그는 "미련이나 섭섭한 감정은 전혀 없고, 아주 홀가분하고 시원하다"고 웃어보였다. 그는 "차라리 (대통령 탄핵사건) 선고를 하지 말고 그냥 떠나라는 조언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면서, 다만 "설득과 통합을 결정문에 담기 위해서 (선고까지) 시간이 걸린 측면도 있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그의 신중함을 엿볼 수 있었다.
2013년 5월 부산고법 부장판사 시절 그는 '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소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 글에서 그는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글을 언급하면서 "판사가 불의를 저지르는 삶을 살기는 어렵다. 그러나 불의를 묵과하는 삶을 사는 것은 가능하다"고 경계했다.
그러면서 "헌법이 법관에게 부여한 지위와 역할을 소명으로서 받아들이고 소명을 실천할 자질과 역량이 있는지 늘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까이서 본 그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다만, 판사를 천직으로 여기면서 보통 사람들이 법 때문에 억울함을 당하지 않도록 성찰하고 고민하는 법조인일 뿐이다.
- '자연인' 문형배와 하고 싶은 것
그와 나는 야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응원팀은 다르다. 그가 무슨 팀을 좋아하는지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10여 년 전 그와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한가해지면 부산 사직야구장에 함께 야구를 보러 가자"고 약속을 한 적이 있다. 그 약속은 아직 지켜지지 않았다. 평생을 법관으로 살아온 그가 아직 한 번도 한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올해는 법정이 아닌 사직야구장에서 자연인으로 돌아간 그와 함께 야구를 보고 싶다. 비록 응원팀은 달라도 함께 즐기고 응원하며 서로 상대의 승리는 축하하고 패배는 위로해 주고 싶다. 지역과 성별이 달라도, 생각과 주장이 달라도 관용과 배려를 우선하며 다양성을 존중하되 결과에 승복하는 사회, 법관 문형배가 꿈꾸는 세상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 덧붙이는 글 김용국 기자는 법원공무원으로, 일반인을 위한 법률대중서 <생활법률 상식사전>을 펴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