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설교문을 전광훈 손현보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보낸다. ]
회개하라!
"삶과 죽음의 길: 예수가 이긴 세 가지 유혹"
(마태복음 4: 1-11)
- 박충구 목사 (감리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전제들
예수가 경험한 유혹을 기록하고 있는 이 성서 본문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본문 중의 하나다.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공관 복음서 중에서 마태와 누가의 기록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하늘의 인증을 받았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마 3: 13-17; 눅 3: 21-22) 반면 마가복음은 1장 12-13절에서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동안 머물렀다는 것과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는 것을 두 절로 요약하여 간단히 밝히고 있다.
마태복음과 병행기사로 볼 수 있는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시험의 순위가 바뀌어 있다. 광야에서 성전마루로 그리고 온 천하를 바라보는 지점으로 그 시험의 장소가 점점 넓어진다. 누가는 아마도 하나님의 성전이 세상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지점보다 더 높은 자리라 여긴 듯하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동일하게 예수가 (마귀, 혹은 사탄, 혹은) 유혹자에 의하여 세 가지 시험을 받았으며 이를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쳤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유혹자의 시험인 동시에 성령에 의한 연단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광야에서의 40주야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헤맨 40년(민수기 14장),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머문 기간 (출애굽기 34장), 엘리야의 고된 호렙산 여정 40일(열왕기 상 19장)과 같이 시련의 기간으로 상징되고 있다.
예수가 겪은 유혹은 그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밀접하게 연관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라는 칭호는 묵시문학적 메시아 칭호이기도(마 24; 눅 4; 요 20: 31; 롬 1, 3-4) 하지만 성서에서 사용되는 가장 폭넓은 의미는 그리스도인 혹은 하나님의 사람을 의미한다(마 5: 9; 6: 9). 따라서 성서기자는 예수의 시험을 통해 인간이 겪는 보편적인 유혹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본다. 인간의 삶은 간헐적으로 유혹자의 시험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본문은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를 유혹했던 유혹자가 예수 곁을 떠나갔다고 증언하지만 누가는 일시적으로 떠났다고 함으로써 예수의 생애에 다가올 또 다른 유혹이 있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눅 4: 13).
이 성서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많은 경우 사실적 진술로 이해하는 성서주의적 입장은 이 본문이 담고 있는 시간이동, 장소이동, 그리고 환상적 비전을 모두 사실화하는 무리수를 두게 된다. 예컨대 첫 번째 시험은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요구를 마술적 가능성의 요구로 이해할 수도 있다. 또한 두 번째 시험에서 마귀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의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는 순간 이동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시험에서도 마귀는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올라가 세상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언급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사실 그 어느 곳에서도 세상 모든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마련해 주는 정점은 없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이해하려면 이 본문이 인간의 삶에 다가오는 유혹의 양태를 상징하는 의미를 찾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따라서 나는 이 본문을 사실적 진술이 아니라 성서 기자의 창작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선호한다. 동시에 사탄 혹은 마귀, 혹은 유혹자로 상징되는 유혹의 주체를 객체화하는 데에는 신학적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죽음을 인격화하고 존재(存在)화하여 죽음의 사자라 타자화하여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 사탄의 유혹은 사탄이라는 신화적 존재의 유혹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주체에서 일어나는 유혹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심오한 신앙을 가진 이들 중에는 흉측한 마귀의 형성을 보았다는 진술이 간혹 있지만 이런 이해는 문화적으로 덧입혀진 것으로서 종교 심리학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사탄의 존재를 객체적으로 인정한다면 우리 모든 인간은 각자의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든지 아니면 사탄의 다중적 무소부재(無所不在)론을 불러들인다. 그러므로 이 성서 본문의 비신화화는 본문을 오해하기 쉬운 유혹에서 벗어나는 매우 중요한 전제가 된다. 그러므로 이 성서 본문은 신화적 현실이라는 모순을 담은 사실적 이야기가 아니라 특정한 삶의 현실을 드러내는 의미를 담고 있는 스토리로 보아야 한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이 본문을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에서 언급하고 있다. 예수가 광야에서 경험한 유혹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 3: 17)라는 예수에 대한 하늘의 인증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우리는 하늘의 인증 이후에 이어지는 예수의 유혹에 관한 성서의 증언을 읽으며 예수는 하늘의 인증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 왜 그는 성령에 이끌려 40일 동안 광야에 나가 금식하며 머물렀을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하늘의 인증을 받은 그가 왜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았을까? 라는 물음을 가질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 하늘의 인증을 받는 것 그것이 예수의 삶의 종료, 혹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깊은 종교체험에서 경험되는 순수한 영성적 차원과 영성적 관심에서 거리가 있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이처럼 이중적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현실과 세상 나라 현실 사이에 벌어진 틈을 우리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와 악의 현실이 겹쳐지고 있는 세상 나라로 이해하였다. 우리의 깊은 종교 체험은 얼핏 얼핏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맛보기, 혹은 순간적인 바라봄(erlebte Augenblicken)과 같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간혹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인식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불충분하고 온전하지 않다. 바울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희미한 것이다(고전 13: 12). 따라서 여기와 그곳, 지금과 그 때, 세상과 하나님 나라라는 이중성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경험할 수밖에 없는 신앙의 지평이다.
예수가 광야에서 40일간의 금식의 시간을 가지고 유혹자의 시험을 받은 것에 대하여 마태복음 기자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건임을 암시한다. 육체적으로 본다면 40주야의 금식은 인간이 지난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된 고행의 시간이다. 영적인 측면에서는 영혼의 깊은 밤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전적으로 의존하는 친밀성의 시간이다. 육체적 한계와 하나님과의 영적인 깊은 교제 한 가운데에서 유혹자의 유혹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 이런 순간에서, 예수의 영성이 시험을 받은 것이다. 예수를 향한 유혹자의 시험의 성격은 예수의 인간성에 근거한 것이다.
이 시험은 예수의 인간성의 약함을 영성적 능력으로 해소해 보라는 요구였다. 그리고 유혹자는 단서를 달았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증을 받았던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명하게 입증하라는 요구다. 육체적인 배고픔의 해소, 하나님의 사랑의 입증, 온 세상의 권세를 상속하라는 요구다. 이 요구는 명료하게 인간성의 한계와 결핍을 파고드는 시험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배고픔도 결핍이고, 현실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명료하게 입증할 수 없는 신앙조차도 일종의 결핍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권세를 획득하지 않은 상태도 결핍이다. 그런데 유혹자가 수단으로 삼은 이 결핍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이르지 못한 우리의 상태를 파고드는 유혹이다. 배고픔과 불안과 억압의 구조 속에서 해방 받지 못한 우리 존재의 현실을 파고드는 유혹인 것이다. 유혹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성적 능력을 이 인간성의 결핍을 선명하게 극복하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요구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배고픔을 해소하고, 안전을 보장받고, 세상의 권세를 누리라는 것이다. 왜 이러한 요구가 유혹일까? 이런 것이 유혹이라면 오늘의 한국 교회는 유혹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약속하는 하나님의 축복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닌가? 여기에 이 본문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유혹자의 유혹은 하나님과의 영성적 교제의 빈틈을 타고 찾아온다. 영성적 삶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확신을 우리의 일상에서 확인하는 것이 과연 영성적 삶과 병행하고 있는 굶주림의 해소, 하나님 사랑의 실증적 확증, 그리고 세상의 지배력의 소유와 같은 성격일까? 만일 이 본문의 저자가 이러한 성격에 동의했다면 예수는 매우 현실적이고도 놀라운 마술을 부리는 예수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본문의 저자의 신학적 윤리사상은 이러한 요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이 지닌 결핍은 유혹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 신앙의 깊이, 곧 영성의 깊이를 드러내는 기회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이 본문이 존재하는 이유다.
첫째 유혹: 빵만의 죽음
첫째 유혹은 결핍, 모자람을 지닌 인간성을 이용한 유혹이다. 부정할 수 없는 인간성의 취약성, 결핍에 대한 인식을 파고들어서 유혹자는 예수에게 돌을 들어 빵을 만들어 먹으라고 요구한다. 신적 능력을 행사하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라는 유혹은 에덴동산의 뱀의 유혹과 유사하다.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동산에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열매 앞에 서있는 이브를 향하여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될 것”(창 3: 5)이라고 유혹했다.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유혹자는 굶주린 예수에게 배부름의 만족을 취하라고 요구한다. 그의 결핍을 자극하고 욕망을 불러내어, 그것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 증명이 될 수 있다고 유혹한 것이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우리의 삶에서는 이러한 결핍이 기적처럼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유혹, 완전할 수 없는 삶에서 완전한 것을 요구하는 유혹, 선명하지 않은 삶에서 선명성을 실증하라는 유혹이다. 불완전한 우리의 삶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라는 요구다. 영성을 통해 번영과 성공을 이루라는 번영 신학인 셈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결핍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영성적 삶에 있어서 근본적인 장애가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여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똑같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다.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즐거운 것이든 고통스러운 것이든,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의로운 사람들은 더도 덜도 아니게, 다시 말해 하나를 다른 것과 똑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수가 유혹자의 시험을 이긴 것은 바로 이러한 동일성의 신학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하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본성을 믿었던 것과 같다. 이런 전통은 세계내적 신비주의 신앙을 전승했던 켈트 신비주의자들이나 알버트 슈바이처의 “아래로의“ 신학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다.
놀랍게도 예수는 유혹자가 보는 결핍만을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른 결핍, 즉 영적인 결핍을 더 큰 위기로 생각한다. 예수는 빵만의 삶은 하나님 말씀의 결핍이고 따라서 빵만의 죽음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로테 죌레도 빵만의 삶이 아니라 빵만의 죽음을 설교했다. 빵만의 삶은 곧 빵만의 죽음인 것이다. 생존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영성적 의미가 없는 삶은 곧 우리에게 있어서 “의미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육체적 삶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마술적 능력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통한 자유와 정의와 사랑의 지평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이며, 이런 지평이 결여된 빵만의 삶을 살라는 유혹자의 요구는 인간다운 의미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결핍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혹자가 보는 인간성의 취약성에서 나오는 배고픔이다. 그러나 또 다른 결핍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결핍이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인간의 삶에서 진보를 불러온 모든 계기를 결핍이라고 보았다. 무엇인가 “아직 아닌 것으로(noch nicht)” 결핍되어 있다는 인식은 곧 그것의 충만함을 그리워하는 희망의 동인(動因)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핍은 희망의 자리가 될 수도 있다. 이 희망의 지평은 의미의 지평을 연다. 우리가 존재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보가 싹트고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낮 꿈이 꿈꾸어지는 것이다.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지평의 끝에 하나님 나라가 다가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꿈은 역사적 과정을 지나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영성은 이러한 영성적 지평의 결핍을 결핍이라 보는 것이지 빵의 결핍을 결핍이라고 보지 않았던 셈이다. 역사는 실로 배고픔의 극복과정이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세상을 향한 것이고, 인간의 지배를 넘어선 하나님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향한 과정이다. 그런데 유혹자는 이 과정을 생략하는 마술을 부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는 마술적 능력을 행사하라는 것이다. 헛된 희망을 가지라는 요구다. 역사와 종말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이렇듯 유혹자는 역사적 과정과 종말의 거리를 제거한다. 기다림과 역사적 순화의 과정 없는 성취, 그것이 사탄의 유혹의 본질이다. 결핍은 희망의 동인일 경우 신앙인의 현실적 삶에 의미를 낳는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생존이 인간됨의 의미가 아니라 생존의 의미를 가지야 인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빵만의 삶은 이미 죽은 것이다. 유혹자는 이런 삶으로 예수를 불러들이려 했다. 예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의 의미 없는 생존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둘째 유혹: 안전만의 죽음
둘째 유혹은 믿음의 보상으로서 안전을 요구하는 유혹이다. 유혹자는 예수를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한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 하나님의 아들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입증하라는 것이다. 이 장면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향해 조롱했던 무리들의 요구와 흡사하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마 27) 예수를 향하여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대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는 요구와 이 본문에 담긴 유혹자의 유혹의 방식은 매우 흡사하다.
이 본문은 또한 2007년 한 교회의 선교단이 기독교에 적대적인 이슬람 세력 한 가운데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믿는다“는 고백을 하던 이들의 모습을 클로즈업 시키는 본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신앙고백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아우슈비츠의 경험과 동남아시아의 쓰나미, 세계 1, 2차 대전이 일어난 이 병든 세계에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 것은 겉으로는 멋진 신앙과도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 하나님 신앙과 상관없는 우리 인간의 기대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그들의 신앙 고백과는 달리 23명 중 2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무모한 믿음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런 너의 믿음을 실증하라는 유혹자의 태도는 마치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deus absconditus) 이 땅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 사이의 거리를 부정하라는 것과 같다. 죄와 악이 교차하는 역사를 살아가는 인간과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하게 지배하는 천상의 삶을 동일시하라는 요구다. 숨어계신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가 해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을 우리가 깨고 우리가 하나님을 소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성모독적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주술로 불어 내고 조정하는 자가 되겠다는 이교적 오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안전에 대한 욕망은 우리의 모든 욕망을 자극한다. 소유, 권력, 그리고 관계의 안전은 곧 우리 삶의 안전과 밀접하게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우리는 언젠가에는 죽음조차 홀로 맞아야 하는 존재다. 위험한 세계를 안전한 세계로 만드는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단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죽음조차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맞아야 한다. 안전한 세계,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어가는 이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어질 것이라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이런 지평을 신앙의 한 축으로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안전에 하나님 신앙을 걸어두면 안전하지 못한 우리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가 부정될 수도 있다. 유혹자는 이 점을 들어 안전을 보장하는 하나님 신앙을 실증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의 삶은 안전하지 않았다. 그는 공중의 새보다, 들판의 짐승들이 누리는 안전을 부러워하기도 했다(마 8: 20; 눅 9: 58). 예수는 헤르몬 산의 영광에 만족하며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라며 머물기를 소원하는 제자들의 청원도 물리치고 문제가 많은 세상 속으로 하산한다. 예수에게는 소명을 잊은 안전만의 삶은 죽은 것이었다. 안전은 좋은 것이나 안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에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빵만의 죽음이 있다면 안전만의 죽음도 있다. 빵만의 죽음이 의미 없는 삶을 뜻한다면, 삶의 의미 없는 안전만의 삶도 죽은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전 꼭대기에 서서 ‘내가 위험한 지경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안전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오만 그 자체를 예수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불신앙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예수는 안전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신을 안전하지 않은 자리, 곧 십자가에 내 놓았다.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릴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듯 예수가 보여준 신앙의 길은 안전보장의 길이 아니다. 예수를 따르는 신앙의 길, 그것은 예수가 말씀하신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다.
아마도 자본주의적인 남한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의 안락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매사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하심을 간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도 억압 통치 속에서 생존과 희망을 보장받지 못한 채 신음하는 북한 주민들이 있다. 아프리카에는 열악한 위생시절과 영양실조로 인하여 죽어가는 무수한 아이들이 있다. 안전의 요구가 신앙의 본질이라면 북한과 아프리카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증명이 불가능한 것이 된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우리의 욕구는 참된 하나님 신앙의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유혹은 더욱 클 것이지만, 북한과 같은 동토(凍土)의 땅에서는 안전은 신앙의 조건이나 증거조차 될 수 없다.
일본의 문학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1966)은 인간의 고통과 죽음의 현실에서도 침묵하는 하나님을 만난 인간의 고뇌를 다루고 있다. 슈사쿠는 이 소설에서 우리 삶의 현실은 하나님이 무섭도록 침묵하는 현실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그려주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서 슈샤쿠는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편에 서는 것이 배교로 개념화한 신앙보다 낫다고 말하는 예수를 고백한다. 그는 배교로 개념화된 성화판을 밟아도 좋다고 말하는 예수를 본다. 자기를 밟으라는 예수를 만난 것이다. 슈사쿠는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예수를 보았다. 유혹자가 선택한 유혹의 도구 안전의 욕망은 스스로를 버리는 예수를 유혹할 수 없었다.
셋째 유혹: 권력만의 죽음
유혹자는 예수를 온 천하를 바라 볼 수 있는 높은 곳으로 데려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지배와 소유 권력의 유혹이다. 예수의 생애에서 권력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성서적 진술은 여러 곳에 있다. 소유와 지배 권력에 대한 욕망은 예수 주변의 사람에게도 있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가 큰 권세를 잡을 것이라 짐작하고 제자 중에 누가 큰 자인지 다투기도 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에게 찾아와 자기 아들 형제를 예수의 우편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원을 할 정도였다(마 20).
그러나 예수는 권력의 욕망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권력만의 죽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소유만의 죽음, 권력만의 죽음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었다. 예수는 땅의 부요함의 어리석음을 간파했고, 권력을 가진 헤롯을 여우로 비유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의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 25-28).
이 유혹은 예수의 삶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게 만들려는 유혹이었다. “인자가 이 땅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는 그의 소명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의 그늘 아래에서 생의 의지를 견고하게 하여 초인적 삶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권력의지를 주장했던 니체는 현실 정치에 이용당해 나치의 권력의지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오용되었다. 권력의지는 자기 강화의 의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와 정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권력의지가 아니라 생명을 돌보고 섬기는 희생의 길에서 더 강한 생의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교회의 역사 속에서 종교권력은 언제나 세속권력과 거룩하지 못한 연대를 이루어 지배 권력에 편승해 왔다. 어쩌면 오늘의 종교는 유혹자의 종교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명료하게 말한다. 사람이 예배할 분은 창조주 하나님 한분이시다 라는 선언이다. 초기 퀘이커 신앙을 가졌던 윌리암 펜(William Penn)은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그의 주님이시므로 오직 그에게만 복종할 것을 약속했다. 따라서 그는 세상의 권세를 잡은 영국 국왕을 향하여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하여 국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런던탑에 갇혔을 때 그는 <No Cross, No Crown>(1682) 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 6장에서 오만이란 과도한 자기 영광과 영예를 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권력을 향한 유혹은 오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는 유혹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섬김의 길은 오만의 길이 아니라 겸비의 길이라 말하신다.
유혹자는 예수의 길과는 다른 탐욕과 권력을 향한 욕망을 자극했다. 탐욕과 권력의 유혹에 빠지면 우리는 경배의 대상을 하나님에서 유혹자로 바꾸게 된다. 결국 유혹자를 향해 엎드리는 길은 하나님 신앙을 배반하는 것이다. 이런 길을 가는 이는 신앙의 댓가가 소유와 권세의 강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다. 하지만 예수는 탐욕의 윤리나 지배 윤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겸비의 길에서 하나님을 향한 복종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의 길을 가르치셨다. 예수는 탐욕과 권력의 유혹을 하나님 신앙에서 배운 겸비와 희생의 영성으로 이기신 것이다.
결론
예수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 40일간의 시험 기간을 거쳤고, 이 시험에서 승리함으로써 공생애의 길로 나가셨다. 그는 유혹자의 유혹에서 빵만의 만족에 담겨있는 빵만의 죽음, 안전만을 요구하는 삶 속에 담긴 안전만의 죽음, 그리고 지배 권력의 소유 이면에 묻어있는 권력만의 죽음을 이긴 것이다. 유혹자는 예수에게 하나님 신앙의 영성에서의 이탈과 배반을 요구했다. 그러나 예수는 유혹자의 유혹에 담긴 불신앙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는 영성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영성은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면면히 흘러 전승되어 오던 죽음의 유혹에 단호히 저항하는 영성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주류 기독교는 어거스틴 이후 도덕폐기론에 오염되면서 빵의 유혹, 안전의 유혹, 권력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하는 종교로 전락했다. 에른스트 트뢸취의 분석에 의하면 기독교 역사는 대중을 얻기 위하여 세속적 가치들을 교회 안으로 수용해 들이는 타협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처방으로 타세계적 구원의 은총론을 강화했다. 소유와 안전과 권력을 향한 의지만의 죽음, 곧 죄스러운 삶은 내세의 구원 약속으로 처방을 받아 온 셈이다. 이 문제는 비록 복음이라는 명제로 포장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삶에서의 영성적 투쟁을 약화시킨 것으로서 비판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경험한 유혹자의 시험은 곧 사람으로서의 인간이 겪는 시험이며, 오늘의 그리스도인도 예외일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성서적 메시지가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로 인하여 약화되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일상에 다가오는 유혹의 본질을 알아보지 못하는 데 있다. 일상을 지배하는 빵만의 삶은 의미의 죽음을 의미하고, 실증적이며 효용론적 신앙이 요구하는 안전장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거래로 전도시켜 불신앙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소유와 지배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예수의 겸비와 자기희생의 길과는 정 반대의 방향을 향하게 한다.
우리가 오늘날 일상의 광야에서, 성전에서, 그리고 소유와 권력으로 유혹하는 세상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바로 이 예수의 따라 사는 (imitatio christi)의 길을 의미하며, 이 길은 예수를 닮은 영성적 분별력을 가진 이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다. 광야의 시험에서 승리한 예수의 공생애는 잠자는 신앙을 가진 이들을 향하여 “회개하라!”(마 4: 17)는 외침으로 시작되었다. 500년 전 루터의 종교개혁도 그의 명제 95개 항목의 시작도 “회개하라“는 재촉에서 시작되었다. 빵만의 죽음, 안전만의 죽음, 권력만의 죽음의 그늘 아래 있는 우리를 향하여 오늘도 주님은 명하신다: ”회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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