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좋은 설교

연세대 신과, 대학원 신학과, 연합신학대학원, ‘Global Institute of Theology’(GIT) 학생들이 함께 드리는 예배 설교!

ree610 2025. 4. 2. 14:40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일반대학원 신학과, 연합신학대학원, ‘Global Institute of Theology’(GIT) 학생들이 함께 드리는 수요연합예배의 설교자로 초청받았습니다.
오늘 설교하며 학생들과 나눈 생각을 원고로 공유합니다.

* 연세 신학도의 길
(The Path of a Yonsei Theologian, 마 5:13-16)

1978년, 제가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의 일입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모태신앙인으로서 목사가 되기 위해 입학했으니, 신앙이 얼마나 순수했겠습니까. 성경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약문학사’ 수업 첫 시간에 들어갔을 때, 교수님께서 창조 이야기를 ‘창조 신화’라고 표현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있었던 창조 사건을 창조 신화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당시의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진학하겠다고 할 때, 연세신학은 신신학을 가르치니 자유주의신학을 가르치니 하며 반대하신 분들이 적지 않았는데, 교수님께서 신신학자 또는 자유주의 신학자라서 창조 사건을 신화라고 표현하는구나 생각하면서 머리가 뒤흔들리는 쇼크를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2학기에는 ‘종교와 문화’라는 과목을 수강했는데, 교수님께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불교의 대표 경전인 금강경, 반야심경 등을 교재로 사용하셨습니다. 신과대학 수업에서 기독교 관련의 신학책이 아니라, 예상치 않은 책들을 교재로 사용하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강의 중에는 한국인의 무속신앙에 대해서 비중있게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인의 심성에는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과 무속적인 복의 욕망이 깊이 흐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강의하시는 교수님의 신앙이 의심스럽게 여겨졌습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서 교수님의 연구실을 찾아가 질문했습니다. “교수님, 수업에 참석해 보니 교수님이 진정한 기독교인이신가 혼란스러웠습니다. 교수님은 기독교 신앙인이 맞습니까?” 제가 아주 맹랑한 질문을 했는데, 교수님께서 친절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나는 기독교 신앙인이라네. 나는 예수 때문에 살고 있고, 필요하면 예수를 위해서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네.”

돌아보면 신과대학 1학년 때 많이 헤맸습니다. 학점도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학교를 그만둘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걱정반’이라는 중앙동아리를 만나 친구들과 매주 책 한 권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 즐거워서 견딜 수 있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내면의 갈등을 느끼는 한편, 문학, 철학, 역사, 사회학 등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책들을 다양하게 읽으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남북 분단 시대를 사는 지식인들이 왜 이념의 갈등을 하고 있는지, 사회적인 약자들이 왜 억압과 착취를 당해야 하는지, 지식인들은 민중과 어떻게 연대하며 살아야 하는지, 나라는 존재는 어떤 정체성을 갖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과 씨름하는 동안 3학년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이미 신학으로 인한 내적 갈등이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저는 연극 배우의 재능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하지만, 1, 2학년 때 연극공연이 있을 때마다, 작은 역할을 맡아서 참여했습니다. 예언자 아모스 연극을 할 때는 군중 1, 군중 3의 역할을 했고, 디트리히 본회퍼를 다루는 전율의 잔 연극을 할 때는 어린 본회퍼의 역할과 본회퍼에게 충고하는 주교 역할을 동시에 했습니다. 연극이 좋아서 했다기보다는 연극을 하는 친구들이 좋아서 그 친구들을 돕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4학년 때는 학생회 임원이 되어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주관했고, 5월 축제 대동제 때는 신과대학 학술제에서 주제 발표를 했습니다. “일제하 기독인의 자기반성”이라는 주제로 순수한 신앙을 강조하던 일제하 기독교인들은 삶의 자리인 식민지 속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교회 안에만 머물렀다고 비판했습니다. 일제에 대해 저항을 도모하던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뿌리를 외면한 채 교회를 독립운동의 수단으로만 활용하고자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일제하에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신앙의 자기 정체성을 뿌리로 독립운동을 통해 자주독립을 이루는 데까지 나아가야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대학 생활 4년 동안 거의 매일 아침을 청송대에서 시작했습니다. 저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종달새 형의 인간이라서, 주로 월수금 1교시, 화목토 1교시 수업을 수강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학교에 8시 전후한 시간이면 도착했고, 사람이 거의 없는 청송대에서 성경책을 읽으며 QT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 제목에는 배우자에 대한 항목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기꺼이 목회할 배우자를 만나도록 도와줄 것을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두 가지를 늘 암송했습니다. 하나는 주기도문이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다른 하나는 민족시인 윤동주 선배의 서시였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저의 신앙과 영성, 오늘의 ‘나 됨’은 아마도 대학시절 청송대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신학공동체를 여러분보다 먼저 거친 선배로서, 그리고 정년을 앞둔 교수로서
지금 재학하고 있는 후배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폭넓게 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연세대학교는 창립 140주년을 맞이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역사 깊은 대학일 뿐 아니라, 신학은 물론이고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최고를 차지하는 종합대학입니다. 각 교단에서 운영하는 신학대학들은 교양과목이 있다고 하지만, 대개가 신학 관련 과목들을 주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배우는 시각이 좁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물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을 세상의 전부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연세대학교에서는 우리의 주전공인 신학에 복수 전공 또는 일반 선택 과목으로 문학, 철학, 역사학, 사회학, 법학, 언론학, 경제학 등 인접 학문의 과목을 자유롭게 수강할 수 있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신앙인은 한 손에 성경을, 한 손에 신문을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신앙의 뿌리인 성경을 제대로 읽어야 하고, 신앙이 행위로 표현되어야 하는 삶의 자리 세상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신앙공동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세상 공동체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합대학 연세대학교에서 재학하는 후배 여러분은 신과공동체 내에서만 공부하지 말고, 우리 주변에 있는 문과대학과 법과대학, 경영대학과 상경대학 등에도 들락날락하면서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둘째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 또는 그 진영에 매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정국에서 탄핵을 찬성하는 학생들과 탄핵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서로 비난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나는 보수진영이니 탄핵을 반대한다, 나는 진보진영이니 탄핵을 찬성한다고 하면, 기독교 신앙과 거리가 먼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보수주의자라고 할지라도 보수진영의 주장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다면 그 주장을 거부해야 합니다. 내가 진보주의자라고 할지라도 진보진영의 주장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없다면 그 주장을 거부해야 합니다. 반대로 보수진영의 주장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내가 진보주의자라고 할지라도 찬성해야 합니다. 진보진영의 주장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면, 내가 보수주의자라고 할지라도 찬성해야 합니다. 제가 4학년 때 신과대학의 은사이신 한태동 교수님께서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애들아, 누가 오른손을 자를까, 왼손을 자를까 질문하면, 나는 오른손잡이니까 왼손을 자르라 한다든지, 왼손잡이니까 오른손을 자르라 하면 안 된다. 오른손도 왼손도 둘 다 필요한 것이니 모두 안 된다고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보와 보수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양자택일하기보다는 항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어디에 있는지 질문하며, 그 질문에 정직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셋째는 신학도의 길이 교회의 목사가 되는 것, 또는 신학교의 교수가 되는 것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공하는 신학은 교회와 신학교에서만 적용되는 학문이 아닙니다. 신학적 통찰은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 다양한 영역에서 주요한 지침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복지나, 교육, 예술이나 체육, 환경 운동이나 인권 운동 등 삶의 모든 분야에서 신학적 가치와 원리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저의 세대는 신학도들이 교회의 목사나 신학교 교수가 되는 것을 일반적인 길로 보았지만, 지금은 아주 다를 수 있습니다. 신학도들이 자신의 재능과 열정에 따라 다양한 직업과 사역을 선택하고, 신학적인 통찰을 배경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연세대학교에서 신학도의 길을 걷는 여러분이야말로 작가나 예술가, 판검사나 변호사, 영화감독이나 PD, NGO 활동가나 미디어 전문가 등 폭넓게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의 정말 중요한 삶의 자리에 엉터리 같은 인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누가 목사나 신학 전공 교수가 되려고 한다면, 흔히 기대되는 전통적인 목회나 학문의 틀에서 벗어나 창의성을 발휘해 신학적 소명을 실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한 복음 전파라든지, 사회적 기업의 창업이라든지, 또는 문화 사역이라든지 등등 현대 사회의 변화와 필요에 부응하는 새로운 방식을 얼마든지 창의적으로 강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연세신학공동체 후배 여러분,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음식의 맛을 내는 역할을 합니다. 불의한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한국교회는 인권 보호와 민주주의를 위해서, 사회복지 영역의 섬김과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서 적지 않은 기여를 했습니다. 소금의 역할을 어느 정도 감당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한국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상식적인 수준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되었습니다. 요즈음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광화문과 여의도에서 집회하는 극우주의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곳을 지나노라면 할렐루야와 아멘이 연발되고 있습니다. 과연 그곳에 하나님이 계실까요, 과연 그곳에 예수를 따르는 예수의 제자가 있을까요. 지금 개신교인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서 한국개신교와 한국 개신교인들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전체의 14%가 되지 않습니다. 가톨릭이 48%, 불교가 51%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낮습니다. 한국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는 상황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라도 우리 연세의 신학도들은 세상의 부정과 부패와 불의를 제거하고, 자유와 평등과 연대가 자연스러운 세상,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넘실대는 모두가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 정종훈 목사 (연세대 교수)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빛은 어두움을 물리치고 세상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지 말아야 할지 길을 훤히 밝혀 줍니다. 초창기 한국교회는 척박한 세상에서 상놈이라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어두움을 물리치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가도록 길을 비추었습니다. 여성이라고 해서 부모와 남편과 자식에게 종속되어 살아야 하는 어두움을 물리치고, 세상에서 자신의 인생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길을 비추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교회가 세상보다 더 어둡지 않나 싶습니다. 세상이 바른길을 걸어가도록 길을 비추어 주기는커녕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우리 연세의 신학도들은 먼저는 교회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동시에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또는 영성적으로 탁월해서 세상을 더욱 밝히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이 우리 연세 신학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득 넘쳐서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