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 설교 자료(9월 22일, 창조절 4주)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9월 첫 주부터 적용한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부활은 깨어진 세계를 지금껏 해석하고 움직여 온 거짓 이론과 폭력적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이기에, “부활은 우리 모두를 반역자로 만든다”. 부활과 함께 새로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이라는 부조리를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부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잠 31:10-31; 시 1; 약 3:13-4:3, 7-8a; 막 9:30-37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잠언 31:10-31}
10 누가 유능한 아내를 맞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뛰어나다.
11 남편은 진심으로 아내를 믿으며 가난을 모르고 산다.
12 그의 아내는 살아 있는 동안, 오직 선행으로 남편을 도우며, 해를 입히는 일이 없다.
13 양털과 삼을 구해다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일하기를 즐거워한다.
14 또한 상인의 배와 같이, 먼 곳에서 먹을거리를 구하여 오기도 한다.
15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서 식구들에게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여종들에게는 일을 정하여 맡긴다.
16 밭을 살 때에는 잘 살펴본 다음에 사들이고, 또 자기가 직접 번 돈으로 포도원도 사서 가꾼다.
17 허리를 단단히 동여매고, 억센 팔로 일을 한다.
18 사업이 잘 되어가는 것을 알고, 밤에도 등불을 끄지 않는다.
19 한 손으로는 물레질을 하고, 다른 손으로는 실을 탄다.
20 한 손은 펴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다른 손은 펴서 궁핍한 사람을 돕는다.
21 온 식구를 홍색 옷으로 따스하게 입히니, 눈이 와도 식구들 때문에 걱정하는 일이 없다.
22 손수 자기의 이부자리를 만들고, 고운 모시옷과 자주색 옷을 지어 입는다.
23 남편은 마을 원로들과 함께 마을회관을 드나들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24 그의 아내는 모시로 옷을 지어 팔고, 띠를 만들어 상인에게 넘긴다.
25 자신감과 위엄이 몸에 배어 있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26 입만 열면 지혜가 저절로 나오고, 혀만 움직이면 상냥한 교훈이 쏟아져 나온다.
27 집안 일을 두루 살펴보고, 일하지 않고 얻은 양식은 먹는 법이 없다.
28 자식들도 모두 일어나서, 어머니 업적을 찬양하고 남편도 아내를 칭찬하여 이르기를
29 "덕을 끼치는 여자들은 많이 있으나, 당신이 모든 여자 가운데 으뜸이오" 한다.
30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는다.
31 아내가 손수 거둔 결실은 아내에게 돌려라. 아내가 이룬 공로가 성문 어귀 광장에서 인정받게 하여라.
[신학적 관점]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아내)에 대한 칭찬은 잘못하면 사회구조 차별 모순을 눈감게 만들 수 있다. 여성신학적 관점에서 재해석이 필요하다. 31절은 여성(아내)들의 영광을 독차지 해온 남성(남편)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여성들이 받아야 할 영광을 가로채지 말라고.
[목회적 관점]
대부분의 교회에서 여성 신도의 비율은 60-70%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최고의 결기구에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교단이 있다.
[주석적 관점]
‘유능한’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이 보다 훨씬 강력한 뜻을 갖고 있다. 우리말로는 ‘생활력이 강한,’ ‘억센’ 이라는 표현이 보다 적절하다.
10절로 31절까지는 매 문장의 첫 단어가 히브리어의 알파벳, 말하자면 우리말 ‘ㄱㄴㄷ’순(acrostic)으로 시작하여 ‘ㅎ’으로 끝을 맺는 한 편의 시와 같다.
[설교적 관점]
남한은 세계 최고의 자살율 국가이자 동시에 최저 출산율의 국가이다.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최악의 나라이다. 여성들이 출산을 꺼려하는 이유는 여럿 있지만, 근본적으로 출산에 대한 사회적 제도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혼관이나 가족관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 목사의 설교가 고리타분하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 교회 내의 젊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설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본문의 목회적 관점을 쓴 케네디 카터 목사는 자신의 막내딸을 동성애 두 여성에게 입양을 시켰다. (Feasting 78)
{시편 1}
1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2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3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4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5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6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
{야고보서 3:13-4:3, 7-8a}
13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생활을 해서,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14 여러분의 마음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파당심이 있거든, 여러분은 헛되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
15 이것은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가 아니라, 세속적이고 육욕적이고 악마적인 것입니다.
16 시기심과 파당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더러운 행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17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8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1 무엇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 싸움이나 분쟁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싸우고 있는 육욕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다가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4 간음하는 사람들이여, 세상과 벗함이 하나님과 등지는 일임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살게 하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 한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 합니다.
7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러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8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신학적 관점]
신도들의 삶을 다루는 윤리신학이다. 서구신학은 야고보서를 지혜문학의 일부로 보지만, 필자는 바울의 오직 ‘믿음 구원론’에 대한 비판으로 지혜를 넘어 실천을 강조한 ‘행위 구원론’으로 본다.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는 바울이 비판한 유대교의 ‘공로사상’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저자 또한 하느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6절). 믿음과 행위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상호보완의 관계에 있다. 저자는 하느님의 길과 악마의 길의 근본 차이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두 가지 약점이 있다. 하나는 약자가 당하는 현재의 고통을 간과하는 종말론적 관점과 사회구조의 문제를 간과하는 개인 심리적 관점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목회적 관점]
공동체는 항상 이견이 존재한다. 여기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고 이를 평화로운 방식을 통해 일치된 의견을 만들어가는 일이 목회이다. 여기서 전제는 목사는 언제나 자신의 의견을 내려놓고 듣는 일이다. 이를 위해 기억해야 할 두 가지는 첫째, 장로교의 관점에서 목사는 교회의 회원이 아니다. 노회원으로서 파송을 받은 사람이다. 둘째, 그러기에 목사는 투표를 할 때, 가능한 가부동수일 때만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이 좋다.
[주석적 관점]
야고보서 108개의 구절 가운데 절반인 54개의 구절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서구신학에서는 일종의 율법서로 폄하하기도 했다.
[설교적 관점]
하느님과 세상(4절)을 적대적인 관계로 설명하는 일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인간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개인 욕망이 서로 부딪히는 장(場)으로서의 세상이다.
본문은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정의는 칼자루를 누가 잡는가에 달려 있다. 불의한 권력 또한 수단을 항상 정당화한다. 부(富) 또한 마찬가지이다. 부의 축척은 누군가의 부를 가져오는 일이다. 신앙은 그 목적을 하느님의 영광에 둔다. 그러나 문제는 신앙은 사람들을 저마다 자신이 하는 일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고 믿는 자기의인화에 쉽게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18절은 정의가 목적이라면 그 수단은 평화로운 길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평화의 길은 강자의 양보가 전제된다. 겸손은 상대가 이를 인정하고 함께 낮아질 때 의미와 실효성이 있다. 강자가 양보하고 낮아지는 경우가 역사에서 얼마나 있었는가? 교회나 사회가 통상 택하는 다수결의 원칙은 언제나 강자를 정당화하고 있다. 경우의 수는 많겠지만, 일반적으로 다수가 소수를 좇을 때와 소수가 다수를 좇을 때, 둘 중 어느 길이 진정 평화의 길이 되겠는가? 인류 역사의 진보는 달리 말해 소수가 다수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마가복음 9:30-37}
30 그들은 거기에서 나와서, 갈릴리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31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그가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뒤에 살아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께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다. 예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
34 제자들은 잠잠하였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서로 다투었던 것이다.
35 예수께서 앉으신 뒤에, 열두 제자를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36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뒤에, 그를 껴안으시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신학적 관점]
섬김의 신학으로 종으로서의 리더쉽(servant leadership)을 강조한다. 어른으로서의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것은 그들의 기대가 세상 권력 지향적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강점은 권력 그 자체를 밑바닥에서부터 뒤집어 놓기 때문이다.
[목회적 관점]
필자가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미국교회협의회 회장과 미장로교총회장을 역임한 고 이승만목사의 설교 제목은 ‘걸레’였다. 필자가 교회와 사회의 더러움을 닦는 목사로 살았는지는 의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많은 민족지도자를 배출한 오산학교의 이승훈(장로)교장은 겨울에는 학교 변소의 똥이 얼어붙어 솟아오르기 마련인데 이를 도끼로 깨는 일로 유명하다. 똥파편이 얼굴로 튀기기 일수이다. LA의 한 대형교회 목사는 평일 방문객으로부터 청소부로 오해받기도 했다.
[주석적 관점]
‘어린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세상에 때 묻지 않았다는 순수의 관점(childlike)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세상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는 철부지(childish)의 관점이다.
종(pais)과 어린이(paidon)를 함께 언급하는 이유 중 하나는 희랍어의 근사성에 있다. pais의 변화된 형태 중 ‘d’를 지니기도 한다. (Feasting 97)
31절, 인자의 수난 예고는 예수의 직접 말씀인지 아니면 저자 마가의 창작인가? 예수께서 하셨다면 왜 일인칭 ‘나’ 대신 삼인칭 ‘인자’라는 용어로 바꾸었는지? 마가의 창작이라면 이는 신학자 브레데의 주장처럼 예수 부활 전과 부할 후의 서로 다른 제자들의 신앙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 된다. 만약 이것이 예수의 본래 말씀이라면 예수 자신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사람의 아들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사용하였을 것이다.
[설교적 관점]
우리말에서 ‘어린이’는 ‘얼’이 어린 사람 곧 아직 여물지 못한 상태를 두고 한 말이고, 어른은 ‘얼인’ 곧 얼이 여문 사람이라는 말이다. ‘어르신’은 어른의 높임말로 더 높은 단계에 이른 사람을 칭하는 용어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어린이’는 당시 사람의 숫자에 포함되지 않는 열외의 존재였다.
예수께서 자신을 어린이에 비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개방성’이다. 어린이들은 놀이를 할 때,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사람을 분류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은 물론 죄인으로 불리는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함께 먹고 마시었다. 당시로는 불가촉천민과도 같았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불가촉천민은 누구인가? 빨갱이?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