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8월 25일(오순절 성령강림 후 15째) 주일 설교

ree610 2024. 8. 20. 16:26

교회력 주일 설교 자료(8월 25일, 성령강림 후 15째)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9월 첫 주부터 적용한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부활은 깨어진 세계를 지금껏 해석하고 움직여 온 거짓 이론과 폭력적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이기에, “부활은 우리 모두를 반역자로 만든다”. 부활과 함께 새로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이라는 부조리를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부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수 24:1-2a, 14-18; 시 34:15-22; 엡 6:10-20;
요 6:56-69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여호수아 24:1-2a, 14-18}

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그 우두머리들과 재판관들과 공직자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섰다.
2 그 때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14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여러분은 이제 주를 경외하면서, 그를 성실하고 진실하게 섬기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상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오직 주만 섬기시오.
15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여러분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를 섬길 것이오."
16 백성들이 대답하였다. "주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은 우리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17 주 우리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을 이집트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큰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우리가 이리로 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고, 우리가 여러 민족들 사이를 뚫고 지나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18 그리고 주께서는 이 모든 민족을, 이 땅에 사는 아모리 사람까지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신학적 관점]

신명기적 역사관의 핵심인 유일신(唯一神) 신학을 떠받치는 본문이다.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유일신을 넘어 그 유일신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YHWH와 다른 이방 신과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유일신의 핵심은 형식이 아닌 그 내용에 있다.

왜냐하면 이는 서구기독교 국가들이 16, 7세기 식민지 정복시대에 아시아/아프리카/남미대륙에서 저질렀던 자기 절대의인화의 잘못을 반복하도록 유혹하기 때문이다. 저들이 믿었던 신의 이름은 YHWH였지만, 그 내용은 이방 신이 약속하는 행태였다.

이방 신은 자신의 이름으로 권력자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만, YHWH는 약자와 함께하는 자유와 해방의 하느님이다.

[목회적 관점]

조선에서의 기독교 선교 초기 백인선교사들은 “여러분의 조상들이 믿었던 신을 버리고 YHWH 하느님만을 섬기라”고 종용했다. 그리하여 조상 제사를 미신으로 여기는 풍토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나아가서 근대화의 이름으로 우리 민족의 고유하고 토착적인 문화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일에까지 나아갔다.
성서 안에도 오래된 중동의 문화적 요소들이 들어와 있듯이, 기독교 안에도 유럽 백인 민족들의 문화적 요소들이 들어와 있다. 우리의 핏속에는 수천 년의 조상들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피부 색깔을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듯이 우리 안의 고유한 생각과 전통을 바꿀 수는 없다. 곧 기독교의 토착화신앙이 필요한 이유이다. 오늘날 세계화의 시대에서 우리나라의 문화가 세계화의 이름으로 묻히는 것이 아닌 오히려 그 고유함과 독특성을 살림으로 K-Culture가 세계인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만의 고유함과 독특성을 되살리는 K-Christianity를 살려내는 일이 중요하다.

[주석적 관점]

“여러분의 조상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오직 주만 섬기시오.” 지금 여호수아는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탈출하고 40년의 광야생활을 거쳐온 이스라엘백성을 두고 한 말이다. 이스라엘(히브리) 민족이 애굽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시기는 약 BCE 13세기 이전 사백 년간이다. 바빌론제국의 지배는 BCE 7세기이다.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는 둘 다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이 두 문명을 접하는 시기는 각각 다르며 약 칠백 년의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는 바빌론 포로기 이후 신명기적 역사가들에 의한 제1성서(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편집 과정에서 첨가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과 흡사하다(신 30:15-20).

[설교적 관점]

메소포타미아와 애굽과 아모리족속의 신과 YHWH 신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여호수아의 외침은 엘리야의 용어로 옮기면, YHWH 하느님과 바알 하느님(열상 18:21)이 되고 예수의 용어로 옮기면, 하느님과 맘몬(눅 16:13)이 된다.

18절은 잘못하면 YHWH 하느님을 전쟁과 정복의 신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이스라엘은 결코 중동을 지배하는 제국으로 형성된 적이 없다. 다윗왕 시대에 큰 국가를 형성한 듯이 성서는 말하지만, 실제 역사에 있어서는 작은 변방에 불과했다. 이는 약자로서의 자기를 지켜나가는 일종의 자존심 회복을 위한 상징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 오늘날 국가 이스라엘 국민들이 오용하기 쉬운 말씀이다. 오늘날 세계의 최강국 패권국가인 미국이 God bless America!를 외칠 때, 잘못하면 약소국가들을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쉽다.

{시편 34:15-22}

15 야훼의 눈길, 의인들을 돌아보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다.
16 악한 일을 하고 야훼 앞에서 숨을 길 없다. 그 이름은 땅 위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리라.
17 살려 달라 소리치면 야훼께서 그 소리 들으시고, 모든 곤경에서 그들을 구해 주신다.
18 실망한 사람 옆에 야훼 함께 계시고 낙심한 사람들을 붙들어 주신다.
19 올바른 사람에게 불행이 겹쳐도 야훼께서는 모든 곤경에서 그를 구해 주시고
20 뼈 한 마디도 부러지지 않도록 고이고이 지켜 주신다.
21 악인들은 그 행실로써 죽음을 부르고 의인을 미워하는 자 멸망하리라.
22 야훼께서 당신 종의 목숨을 구하시니 그에게 피신하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에베소서 6:10-20}

10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을 받아 굳세게 되십시오.
11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비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12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한 날에 능히 대항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한 뒤에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비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14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를 하고, 버티어 서십시오.
15 발에다가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채비를 하십시오.
16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드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으로,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막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17 그리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십시오.
18 온갖 기도와 간구로 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또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며,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19 그리고 내가 입을 열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담대하게 복음의 비밀을 알릴 수 있도록,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20 나는 사슬에 매여 있으나, 이 복음을 전하는 사신입니다. 이런 형편에서도, 내가 마땅히 하여야 할 말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게 기도해 주십시오.

[신학적 관점]

본문에서 바울은 예수 복음이 갖는 반로마제국으로서의 정치신학적 관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곧 하느님 나라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영적 투쟁을 로마제국이 지향하는 세계패권국가로서의 투쟁에 비유하고 있다. 바울은 열성파 유대인들의 모함으로 로마제국의 죄수가 되었으나 바울은 예수의 복음을 십자가의 역설이 갖는 눌린 자들로부터 시작하는 평화의 복음(Pax Christi)을 통해 율법주의로서의 유대교의 비판을 넘어 전쟁 약탈로서의 반로마제국의 통치 이념(Pax Romana)을 비판하고 있다.

[목회적 관점]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사사로움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사사로운 반대(?)를 상대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은 세상 어둠의 세력들에 맞서 영적 투쟁에 앞장선 하늘 군사임을 자각해야 한다. 영적이라는 말은 세상 기피(忌避)의 의미가 아니라 세상 안 투쟁을 위한 전초(前哨)로서의 의미이다.

[주석적 관점]

악한 영과 어둠의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제국 군인들의 완전무장 장비: 가슴막이, 방패, 불화살, 투구, 칼이다. 하느님이 주시는 예수 따르미들의 완전무장 장비: 진리, 정의, 평화, 믿음, 구원, 성령, 말씀이다.

11절의 ‘맞서다’와 14절의 ‘버티어 서다’는 군인들의 전투 대형의 자세를 말하고 있다. (Feasting 377)

[설교적 관점]

그리스도인의 삶은 군인들의 삶에 비유할 수 있다.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생명과 죽음의 위태로운 갈림길에 서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이 세상 안에서 생명과 죽음의 위태로운 갈림길에 서 있다.
바울은 이 갈림길에서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외치고자 했다. 그가 외치고자 한 복음의 비밀은 무엇인가?

성례전 또는 성사는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CE 200년경 그리스어의 기독교 용어인 '뮈스트리온'(μυστριον, 신비, 특별한 것)을 라틴어로 '사크라멘툼'(Sacramentum)으로 표기하여 가톨릭에서 성례전을 뜻하는 단어로 발전하였다. 번역하면 ‘성별된 것이나 행동’이나 ‘성스러운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사크라멘툼'은 본래 로마 제국 군인들의 황제에 대한 복종 곧 제국의 질서에 대한 복종을 상징하는 표지를 뜻하기도 했으므로, 성사(聖事)는 기독교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을 상징하는 표지를 뜻하기도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상대해야 하는 영적 투쟁의 대상인 어둠의 세계의 지배자들은 누구인가?
때로는 인간 지성과 양심의 소리를 잠재우는 물질주의나 쾌락주의일 수가 있고, 때로는 지성과 양심의 소리를 억누르는 국가 권력일 수도 있다.

{요한복음 6:56-69}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이것은, 너희의 조상이 먹고서도 죽은, 그런 것과는 같지 않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것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60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하였다.
61 예수께서, 제자들이 자기의 말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
62 너희가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느냐?
63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64 그러나 너희 가운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부터 예수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이 누구이며, 자기를 넘겨 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계셨던 것이다.
65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버지께서 허락하여 주신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나에게로 올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66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고, 그를 따르지 않았다.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시기를 "너희도 떠나가려느냐?" 하시니,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69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신학적 관점]

본문은 저자 요한의 성찬식에 대한 신학적 이해이다. 요한신학은 크게 두 가지를 묻는다. 첫째는 신은 어떤 분인가? 그는 아버지이시다. 높은 곳에서 홀로 존재하는 분이 아닌, 관계 안에 머무시는 분임을 강조한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는 하느님의 독생자로서 사람의 살(sarx)로 세상에 오신 분이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의 현현으로 설명함에 있어 영지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요한은 공관복음서 저자들과 바울이 전하는 성찬 예전에서의 ‘이것은 나의 ‘몸’(soma)을 나의 ‘살’(sarx)로 말한다. 60절의 “말씀이 어렵다”는 의미는 인격체로서의 의미가 있는 soma 대신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식인종(食人種)이라는 오해가 생길 수 있는 sarx를 썼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모세 율법에서 마시지 말라고 하는 (동물의) 피를 마시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문자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63절에서 오해를 방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sarx를 쓰는 이유는 당대 예수공동체가 불의한 세력에 대항하여 골고다의 십자가 죽음을 향한 예수를 따르는 대신 예수를 믿는 것으로 그치고 마는 신앙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함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로 인해 다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곁을 떠나고 말기 때문이다. 아마도 열두 제자의 일부 그룹들마저 흔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제2의 모세로 여겨졌다. 특히 마태복음의 경우에 그러했다. 요한은 이를 넘어선다. 모세의 만나를 먹은 사람은 죽었지만, 예수가 준 살과 피를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예수 자신이 생명의 빵이다.

[목회적 관점]

8, 90년대에는 일 년에 두 번 부활절과 성탄절에만 행하던 성찬식을 요즘은 자주 하고 매주 하는 교회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성찬식이 단지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하나의 예전(Communion) 혹은 감사의 예전(Eucharist)만으로 그치는 것은 아닌가?
예수가 제자들에게 유언으로 부탁할 때 이를 당신의 죽음을 기억하는 하나의 기념 예전으로 진행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찬식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로마 군병들에 의해) 잡히시던 날 밤”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오늘의 일상화된 예배에서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까? 저자 요한이 가졌던 질문이자 목회적 도전이다. 가톨릭교회에서 화체설을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주석적 관점]

13장 발씻김(세족) 이야기에서 예수는 가룟유다를 가리켜 “내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고 언급하는데, 이는 어쩌면 당대 다른 예수공동체에서 진행되던 성찬의 부족한 이해를 지적하는 말일 수도 있다.

요한에게서 ‘제자’의 개념은 다양하다. 열두 제자라는 단어는 세 번 나오는데 그치고 명단도 따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관복음서에서는 언급조차도 없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와 같은 위상을 갖고 나타나고,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은 물론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 모두 제자라 불린다. 말씀이 어렵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도 제자(60절)라 불리고 다수의 떠나간 사람들도 제자(66절)라고 불린다.

69절의 예수를 일컬어 ‘거룩한 분’이라는 표현은 이곳에서만 나온다.

요한복음에는 신앙(‘믿는다’)을 말할 때, 명사형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동사형으로 80번 이상 등장한다. 이는 바울의 전체 편지보다 많다. (Feasting 385)

[설교적 관점]

요한은 예수의 살과 피의 나눔을 단지 십자가 죽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닌, 생명에로의 동참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조상들은 광야에서 하늘이 준 떡 만나를 먹었지만, 그들은 결국 죽었다. 그러나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말한다.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시간(無時間)적인 개념인가? 요한이 말하는 것은 ‘그는 내 안에 있고 나는 그 안에 있다’고 하는 일심동체의 관계성이다. 그러면 이는 단순히 하나됨을 강조하는 철학적 단어에 불과한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지향하는 언사(言辭)인가? 요한이 지향하는 삶은 창조주 하느님과 태초부터 함께 하셨던 Logos가 인류 구원을 위해 sarx로 화육하여 나누는 삶을 사셨듯이 우리 또한 타자 구원을 위해 하나의 sarx로 화육하여 나누는 삶을 살기를 바람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어떻게 보존되는가? 그건 자신의 존재 안에 이미 하느님이 계심을 깨닫는 현존(現存, Dasein) 의식이다.
유영모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몸나’와 ‘맘나’에서 벗어나 ‘뜻나’와 ‘얼나’로 솟나 하늘과 땅 사이에서의 ‘제 긋’을 다하는 ‘얼인’(어른)이 되는 일이고, 함석헌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씨ᄋᆞᆯ’로서의 자아 존재 이해이다. (만약 누군가가 유영모선생과 함석헌선생을 무교회주의자라고 비난한다면, 아마 요한공동체 또한 당시 기존의 예수공동체로부터 같은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