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좋은 설교

6월 23일 북한선교주일 설교 본문: 마가복음 4장 35-41절 제목: 저쪽으로 건너가자

ree610 2024. 6. 20. 09:18

본문: 마가복음 4장 35-41절
제목: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
잠깐 우리는 겨자씨 비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했습니다. 이 비유는 상식적으로 좀 이상한 비유였습니다. 왜냐하면, 들풀에 해당하는 겨자씨를 일부러 자기 밭에 뿌릴 농부도 없을 뿐더러, 겨자씨는 다 자란다고 해도 새가 깃들 정도의 나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래 저래 말이 안되는 비유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런 상식에 맞지 않는 비유를 드신 걸까요?

알고 보니, 이 비유는 원래부터 성서에 들어있던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니엘서에 나오는 꿈과 에스겔서에 나오는 예언을 읽어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그대로 갖다 쓴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백향목을 겨자씨로 바꾸어 버린 겁니다. 제멋대로 말이죠. 왜 그랬을까요?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오해했기 때문일 겁니다. 크고 곧은 것만, 바르고 좋은 것만 하나님 나라라고 착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마치 누군가에게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큰 집, 좋은 집에 살고, 그 집값이 오르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기라도 한 듯 말이죠.

하지만 겨자씨 비유의 초점은 작은 씨가 얼마나 큰 나무가 될지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원래 있던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비틀었다는데 있습니다. 원래는 백향목 나무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겨자씨를 넣어,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하나님 나라 비유를 뒤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꿈꾸고 기대하던 나라를 부순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백향목? 웃기지 마라. 겨자씨다. 하나님 나라를 품은 것은 겨자씨다. 버려지고 밭을 어지럽혀 늘 뽑힐 위기에 처한 겨자씨야 말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낸다. 거기에, 그 순간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 겨자씨와 같은 사람들, 자신을 겨자씨 밖에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겨자풀이니 뽑아 버리자!라는 판단을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배를 타고 거라사라는 이방 땅으로 건너갑니다. 오늘 본문은 배를 타고 거라사로 가던 중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35절을 보면 예수님은 느닷없이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합니다. 이방 땅인 거라사로 가자고 하시는 겁니다. 왜 갑자기 거라사로 가자고 하시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건너가자.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은 무덤가에 사는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추측해보자면, 이런 본문 나열은 백향목이 겨자씨로 바뀌듯, 유대 땅에서 이방 땅으로 건너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
본문 내용은 아주 짧고 간단합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바다라고는 하지만 유대에서 거라사로 가는 길에 바라는 없습니다. 아마도 갈릴리 호수를 바다라고 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상당히 큰 호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피곤한 예수님이 잠깐 자도 됐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배를 타고 거라사로 가던 중, 갑자기 바람이 거세지더니, 급기야 큰 풍랑이 되었습니다. 자칫하다 배가 뒤집히기라도 하면 꼼짝 없이 죽게 생긴 겁니다. 배에 물이 차고, 배에 물이 가득했다고 본문은 묘사합니다. 그러자 이리저리 애써보던 베드로가 결국 짜증을 내며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베드로의 원망을 들은 예수님은 그제야 일어나 아무렇지 않다는 듯, 풍랑을 꾸짖어 상황을 정리합니다. “고요하고 잠잠하여라”하고 말이죠. 그리고 도리어 베드로를 나무랍니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이죠. 제자들의 두려움과 믿음 없음을 탓하시는 겁니다.

()
그런데 솔직히 베드로가 충분히 이해되지 않습니까? 풍랑이 일어서 누구는 죽을 둥, 살 둥 생고생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란 양반은 속 편하게 자는 겁니다. 이쯤 되면 원망스러운 이유는 또 있습니다. 35절을 보면 저녁에 배를 타고 출발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날 밝을 때 가면 되지 왜 밤 중에 가자고 해가지고 다 죽게 만드나 하는 생각도, 저라면 했을 것 같습니다. 유대 땅도 아니고, 경계를 넘는 이방 땅을 말입니다. 그래 놓고 자기는 잠들어 있으니 베드로나, 이제 죽는구나 싶었던 다른 제자들 역시 당연히 예수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시는 겁니다. 방귀뀐 놈이 성내는 격이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이란 대체 뭘까요?

그것은 자연을 마음대로 지휘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일까요? 세상 풍파가 몰아 닥쳐도 예수님이 다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 그런 믿음일까요? 혹은 예수님과 같이 있는 한 자신들은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는, 배는 절대로 뒤집히지 않을 거라는 믿음일까요?

()
우선 성경에서 물은 자주 혼돈이나 죽음을 뜻하는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창세기에서 창조 전 있었던 ‘혼돈’은 아무것도 없던 상태를 뜻하는 게 아니라, 물과 땅이 뒤섞인 것, 혹은 물이 온 땅과 온 세상을 뒤덮은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카오스 즉 혼돈입니다. 그것을 윗 물과 아랫 물로 구분하고, 땅을 드러내어 생명이 살게 한 것이 창조입니다. 즉,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여 생명을 살게 한 것이 창조라고 성경은 말하는 겁니다. 그 뒤로도 물은 늘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로 나타납니다. 우선 창세기 6장에는 홍수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애굽을 탈출했지만 홍해를 앞에 둔 백성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은 바다를 가르고 자신들을 건져내신 하나님을 높이는 노래를 부릅니다. 시편이나 예언서들도 계속해서 바다를, 미지의 동물이 살며 다스리는 공간으로 표현합니다. 이처럼 물론 신비로우면서도 혼돈의 공간으로 표현되어 왔습니다. 본문 가까이에 있는 마태복음도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적을 행하려는 예수님을 말하는 게 아니라, 물이 뜻하는 혼돈 위를 걷는, 혼돈을 이긴 예수님, 즉 ‘그는 창조하신 하나님이다.’라고 말하려는 본문 중 하나입니다.

()
오늘 본문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 마지막절은 제자들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이분이 누구이기에’ 그것이 본문이 던지는 질문일 겁니다. 그리고 본문은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혼돈을 다스리고 잠잠케 하는 분입니다. 그는 혼돈에 질서를 부여한 하나님이며, 홍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물을 나누고, 땅을 드러내며, 생명이 가득하게 하신 것처럼, 예수님 역시 고요하고, 잠잠하라는 한 마디 말로, 물을 다스리는 분입니다.’라고 말이죠. 결국 본문은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을 독자들에게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첫 번째 이야기일 겁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관점으로도 본문 읽기가 가능해 보입니다.

()
본문은 이방인에게 가는 중에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이방인은 항상 민감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신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님이라고 자주 고백합니다만 그것은 힘이 가장 세다는 말이지, 다른 나라들에게도 같은 은혜와 자비가 내리는 것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밤중에 조용히 이방인에게 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는 말씀합니다. “저쪽으로 건너가자”라고 말입니다. 저쪽은 어디일까요?
앞에 나온 겨자씨 이야기를 이방인과 관련해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스라엘의 것으로만 받아들였던 사람들에게 ‘바깥’을 말씀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만을 백향목으로 여겼다면, 예수님은 이방인을 겨자씨에 비유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쪽에 있는 겨자씨를 향해 배를 타고 가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호수를 건너서 말이죠.

()
갈릴리 호수는 일종의 국경선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왼쪽은 말 그대로 갈릴리 지방이었고 호수에 붙어서 위로는 가버나움이 아래로는 디베랴가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계속해서 호숫가 가까이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호수를 가로지르면 거라사에 닿게 됩니다. 그곳은 유대 지방이 아니라, 다른 나라입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리 호수는 자연스럽게 경계선의 역할을 했을 겁니다.

그럼 어디까지가 갈릴리이고 어디서부터가 거라사였을까요? 분명하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호수이기 때문입니다. 땅이야 선 그어 놓고 여기까지가 내 땅, 저기서부터 니 땅, 넘어오면 죽어. 하면 알기는 쉽지만, 호수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물고기를 잡으러 멀리 나갔다가 저쪽 지방 사람들을 만났을 수도 있고, 그러다가 서로 싸우기도 했을지도 모릅니다. 경계이면서, 경계가 흐릿한 혼돈의 공간이 갈릴리 호수인 겁니다. 그곳에 풍랑이 이는 겁니다.

()  
그들이 풍랑을 만난 호수는 갈릴리와 거라사 사이에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거라사로 가던 길목에서 만난 풍랑입니다. 유대인 아닌 이방인에게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러 가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향목 아니라, 겨자씨에도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여정인 겁니다. 그때 만난 풍랑이고, 그때 혼돈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연한 풍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백향목의 자리에 겨자씨가 들어가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들풀과 전통 나무가 함께 뒤섞여 함께 자랄 수 있는지 물어지는 시간입니다.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논쟁적이며, 문제적일 뿐만 아니라 위협적일 겁니다. 저러다가 겨자씨가 우리를 망치는 거 아닌지, 겨자씨가 파도처럼 우리를 삼키는 거 아닌지 두려운 겁니다. 백향목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지만, 내 이야기가 되면 큰 풍랑이 이는 공포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나를 덮치는 파도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합니다. 바로 우리에게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저쪽’은 어디인 걸까요? 우리는 건너가야 합니다. 타인에게 나를 건네야 합니다. 우리에게 낯선 이방 땅으로 우리는 건너가야 합니다. 나에게 낯선 이야기로 건너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저쪽’은 어디인지를 이 세계를 보면서 따져 물어야 합니다. 그 이방세계가, 그 낯섦이 두려울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풍랑처럼, 폭풍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 혼돈이 우리를 위협하고, 내 삶이 뒤집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누가 망치를 들고 나를 때리거나, 칼을 들고 찌르려고 할 때만 두려운 게 아니라, 낯선 것을 만날 때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내면은 그 이방의 것이 나를 죽이려 한다고 느낍니다. 그때 낯섦에 대한 두려움은 상대에 대한 분노나, 혐오, 죽이려는 마음 등으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분노나 혐오, 죽이려는 마음을 쉽게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포장하죠. 하나님의 이름으로 상대를 규정하고 정죄하거나, 그 낯섦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우리 혹은 나처럼 만들려고 하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내 눈에 보이지 않게 뽑아버리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지만, 사실은 그런 태도들은 내 두려움을 기반으로 하는 혐오와 분노입니다.

()
한국으로 건너온 예멘 난민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하는 문제로 떠들썩 했습니다. 제가 충격을 받은 것은 청와대에 올리는 난민수용반대 청원이 20만명이 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큰 충격이었는데요.
그거 보고 제가 한 생각은 ‘아, 이거는 기독교가 한몫 했겠구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슬람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예상한 일 하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 카톡 메시지가 도는 겁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용은 뻔합니다. 난민들을 한국에 받아들이면 이슬람이 전파돼서, 나라와 교회가 망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난민을 위장해서 한국을 이슬람화 하려는 무슬림이라는 겁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뭔 놈의 교회가 그렇게 부실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술 마시면 교회가 망하고, 동성애 받아들이면 교회가 망하고, 좌파가 정권 잡으면 교회가 망하고, 여성이 목사 안수 받으면 교회가 망하고, 난민 받아들이면 교회가 망하고, 조금만 맘에 안 들면 교회가 망한다는데, 어떻게 안망하고 있는지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건 신앙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두려우니까 받아들이지 말자는 겁니다. 두려우니까 저들을 치료하고 고치고 바꾸자는 겁니다. 두려우니까 눈에 보이지 않게 격리하고 치워버리자는 겁니다. 근데 그거 신앙 아닙니다. 배제이고 혐오입니다. 신앙 아니고, 그렇게도 싫어하는 인간적인 감정에 기반한 겁니다. 그거 신앙 아닙니다.

도리어 신앙은 예수를 따라 저쪽으로 건너가는 겁니다. 건너가다 보면 우리도 풍랑을 맞게 될 겁니다. 사실상 예수님이야 말로 새롭고 낯선 존재였고, 끊임없이 경계를 드나드는 이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논쟁을 일으켰고, 문제적인 인물로 낙인 찍혔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위협한다고 느꼈고, 그랬기 때문에 결국 그는 풍랑을 맞게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으니까요. 그 또한 못박은 이들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맞은 자이기도 했지만, 그 자신이 풍랑이기도 했습니다.

()
저쪽으로 건너가자.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들리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꼭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교회가 건너가야 할 저쪽은, 나라를 잃고 하루 묵을 곳을 걱정해야 하는 예멘 난민들을 환대하는 일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제가 말씀 몇 절 만 빠르게 읽겠습니다. 레위기입니다.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 살 때에는, 외국인 나그네 신세였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출애굽기입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 붙여 살던 나그네였다.”

신명기입니다.
“당신들이 나그네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신들도 한때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입니다.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한 구절만 더 읽겠습니다. 마태복음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해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눈치채셨겠지만, 이 말씀들 말고도 수두룩합니다. 도무지 이 말씀들을 놔두고 어떻게 하나님을 핑계로 그들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지, 내쫓아야 한다고 하는지, 그것이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는지 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저쪽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풍랑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말입니다.

()
저는 이제서야 왜 두려워하느냐고 베드로를 책망하는 예수님이 조금 이해가 됩니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물으시는 말씀도 다시 이해해봅니다. 믿음은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는 예수를 따라 배를 타고 노를 젓는 일입니다. 우리가 만나게 될 혼돈과 풍랑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건너간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리고 [함께.걷는.]이 건너가야 할 저쪽은 어디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