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28 '존 스토트' 별세.
'엉클 존'의 균형잡힌 그리스도인!
본문: 고린도후서2:14~17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고 "편지"
바울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각 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향기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냄새라고 말합니다.
이는 복음이 또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에게는 무례하고 불편한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필요하고 친절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받는 자나 망하는 자(고후2:15) 모두에게 "향기"입니다. 다만, 어떤 사람은 그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 그 안에서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는데 반해 어떤 사람은 복음을 배척해 사망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참 자유를 줍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말씀 안에 순종할 때, 말씀의 진리를 수호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어항 안에 있는 것이 갇혀 있고 답답한 것 같지만, 어항 안에 있지 않고 나오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안에 있을 때 참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와 현대교회의 문제는 이 말씀을 "혼잡"케 하는 것(고후2:17)입니다. 현대사회는 다양한 사상과 이데올로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하고 변괴케하고 있습니다. 영혼과 육을 나누어 성속을 분리하는 이원론, 맘몬의 가치를 쫒아가는 세속주의, 물질 만능주의, 그리고 말씀과 세속주의를 적당하게 섞은 혼합주의, 하나님의 말씀을 역사적 산물이나 문화적 작품으로 이해하는 자유주의, 율법주의와 신비주의 등..
바울은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였다(고후2:17) 고백합니다. 단순하게 말씀에서 가르치는 대로 그대로 가르치고, 그대로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믿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편지"(고후3:3)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돌판에 먹으로 쓴 편지가 아니라, 영으로 마음판에 쓴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 그 자체가 "편지"라는 것입니다.
영적 스승 엉클 존, 하나님의 나라로 가다
오늘 저는 이렇게 한 평생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편지로 살다가 지난 (2011년 7월) 27일 90세의 생을 끝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가신 영적 스승을 한 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이 스스럼없이 "엉클 존"이라고 부르는 분입니다.
그분은 '존 스토트' 목사 이십니다. 아니 정확히는 영국 성공회 사제시니 신부입니다. 편의 상 '목사'로 칭하겠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은 전 세계 신학자와 목회자가 인정하는 20세기 최고의 설교자요 신학자요 저술가였습니다. 또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 될 정도로 교회 뿐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인정받는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목회활동과 저술한 50여 권에 이르는 책은 당시 국가주의, 자유주의화 되어가고 있던 영국 성공회를 "복음주의"로 회귀시켰을 뿐 아니라 세계 복음주의 신학을 정립하고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복음주의 진영의 교황"(뉴욕타임스)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는 영국 "성서공회", "복음주의연맹"(BEA) 등 회장으로 영국 기독교를 이끌었으며, 청년들을 교육하는 IVF의 전신인 "대학기독인교류회"(UCCF)를 설립했으며, "복음주의문학재단"(현 국제랭함파트너십)을 설립했습니다.
반지성주의를 타파하고 일반성도들의 일관성 있는 신앙과 삶을 위해 "현대기독교연구소"를 창립했으며, 특별히 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협의회"의 "로잔대회"을 주도하며 "로잔 언약"을 작성하는데 기여했습니다.
이런 많은 활동 중에도 29살의 나이에 영국 런던 중심부에 위치한 '올소울즈 교회'의 목회자가 되어 30년 동안 사역하면서, 소홀함이 없이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는 성실한 목회를 감당했습니다.
그는 "기도 우선, 변증 전도, 정기적인 전도, 구도자와 회심자에 대한 세밀한 접근, 체계적 훈련 등을 통해 현대도시 사역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주중 점심예배, 주중 기도회, 환우를 위한 기도회, 어린이 교회, 가족 예배, 유학생 예배 등 획기적인 예배를 통해 '모든 영혼을 깨우는 교회'로 자리 매김"(국민일보, 김성원 기자) 했습니다.
또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기독인의 책임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전쟁이나 실업, 부패 등을 심각한 사회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일깨우기 위해 '현대 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등을 저술했으며, 환경단체 '로차'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균형잡힌 기독교'
그러나 이런 많은 화려한 경력과 활동보다 그를 가장 위대하게 하는 것은 그가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하여 어느 한쪽 극단에 치우치지 않은 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분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책 '균형잡힌 기독교'(새물결플러스, 2011.3.)에서는 양극단으로 흐르기 쉬운 주제에 대해 복음적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생각과 행동에 대해 간략하지만 강력하게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위대한 신앙인이었던 존 스토트 목사가 일생을 통해 저술한 50여 권의 책과 수많은 활동을 통해 이루고 싶었던 내용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내용들의 균형이야 말로 성숙한 그리스도인,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목적이며 목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존 스토트의 '균형 잡힌 기독교'에 쓰인 내용들을 소개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순전함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로 또 편지로 살아가는 법"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이 책에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몇 가지 내용에 대한 의견과 입장 차이로 인해 "분열"되어 있다고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어떤 문제는 신앙의 본질과 관련되어 양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비본질적인 것으로 다양성과 자유를 인정해야 하고, 사랑으로 이해하고 협력해야 할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존은 우리가 보수적인 견해만을 고집하는 "보수주의"가 아니라 분별력을 가지고 진리를 보존하려는 "보존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보수나 진보냐 양자택일이나 모두를 포용하는 중간이 아닌, 때로는 보수, 때로는 진보인 양쪽 다 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기준은 성경입니다. 성경에 위배될 때는 둘 다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그리스도인에게 양극화 되어 균형이 필요 4가지 영역과 내용을 제시하는데. 첫째 지성과 감성, 둘째 보수와 진보, 셋째 형식과 자유, 넷째 복음전도 사회참여 입니다. 4가지 모두 현대사회와 교회에서 신학적/신앙적 해석과 각자의 삶의 자리에 따라 정리하기 민감하고 때로 불편한 주제들입니다.
지성과 감성
첫째로 지성과 감성의 균형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 너무 차가울 정도로 지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어 때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너무 감성적이어서 지적인 기능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p23)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경험"을 진리의 표준으로 삼고 지성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습니다.(p25)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이성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이성적인 계시를 주신 이성적인 분이십니다. 따라서 이성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p26) 신앙과 이성은 양립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성을 활용할 때 더욱 신앙은 더욱 성장합니다.(p27)
반지성주의는 우리를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전략시킵니다. "세속주의"란 술이나 담배, 춤이나 화장, 영화나 미니스커트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시대정신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풍조를 분별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미 세속적 그리스도인 것입니다.(p28)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이성적인 존재로 만드셨던 것만큼 감성적인 존재로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으로서 사랑, 분노, 연민과 슬픔, 경외감을 느낄 줄 아는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p29)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가에서, 임박한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p30) 감정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어떤 느낌 같은 것으로 억제할 것이 아니라 당연히 표출되어야 하는 정당한 표현입니다.(p34)
그러면 지성과 감성 사이에 올바른 관계는 무엇일까요? 지성과 감성은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진리는 차가운 것도 메마른 것도 아니며, 오히려 따뜻하고 열정적인 것입니다.(p35)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의 뜻을 깨달을 때 새로운 진리를 알게 되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p36) 로이드 존스는 이에 대해 "설교는 불붙는 논리다"라고 했습니다.
보수와 진보
둘째 보수와 진보의 균형입니다. 대체로 "보수주의자"는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사람들로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보주의자"는 과거 유산에 반기를 들고 불편한 질문을 던지며 급진적인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p41)
그리스도인은 "부탁한 것을 지키도록"(딤전6:20, 딤후1:14),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다서3절)처럼 하나님의 계시, 성경을 보수하는 보수주의자입니다.(p42) 엄밀히 말해 주어진 복음을 보수하는 것으로 "보존주의자"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p44)
그런데 문제는 성경적인 가르침에 국한하지 않고, 기질상 보수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나 사회에 대한 시각, 삶의 양식, 패션 스타일, 기호 등 이들은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온갖 변화를 금기시합니다.(p45)
예수님은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요10:35),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 아느냐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처럼,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여는 분명한 보수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세기 동안 내려온 "장로들의 유전"을 과감하게 버리셨고(막7:1~13) 사회적 인습을 폐지하는데도 거침이 없었으며, 사회적으로 멸시받고 소외받는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셨습니다.(p48)
예수님은 성경에 대해 보수적이면서도, 폐단과 악습을 성경적으로 비평하고 변화시키는데는 급진적이며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셨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따라 보수할 것을 보수하고 변화 시킬 것을 변화시키는,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할 줄나는 "급진적 보수주의자"(Radical Conservatives)가 되기를 바랍니다.(p48)
성경은 변화지 않는 진리이지만, 문화는 교회의 전통, 사회적 관습, 예술적 창조물의 혼합체일 뿐입니다. 문화적 변화에 분노하거나 저항할 것이 아니라, 이런 변화에 인간의 존엄성을 더 진실 되게 표현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내용으로 변화도록 오히려 급진적인 변화를 제안하고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p50)
교회도 다양한 문화적 형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교리뿐 아니라 예배 의식이나 음악, 예배당이나 장식, 성직자나 일반성도의 역할, 출판이나 홍보, 목회와 전도방법 같은 사역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이 모든 것은 성경에 의해 정기적으로, 비평적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p54) 우리가 세속적인 반권위주의를 지나치게 수용한 나머지 하나님의 권위와 말씀의 권위까지 거부해 스스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p56)
교회에는 변화와 행동을 촉구하는 "잔소리꾼"들과 비성경적인 진리와 타협하지 않도록 꾸짖는 "감독관"들이 필요합니다. 이 둘은 교회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하며, 양족 모두 서로의 임무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며 자신들의 역할을 완수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p60)
형식과 자유
셋째 형식과 자유의 균형입니다. 존은 형식과 자유의 문제에 있어 교회의 구조와 예배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시합니다. 교회의 부패와 사회적 변화는 제도적 교회의 형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고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제도에서 탈피해 새롭고 탈구조적인 기독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p63)
그래서 구조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예배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교단과 교파에 매이지 않는 교회를 지향합니다.(p64) 그러나 교회는 비가시적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딤후2:19, 엡2:19~22) 또한 가시적 측면(고전3:16,12:27)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입교하는 의식인 세례와 교우들의 교제의 식사인 성만찬을 제도화 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양떼를 목양하기 위해 목자를 세우셨습니다(p66)
예배 형식이 자발적이고, 활기차고, 때로 요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가 꼭 그런 것에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성령은 바람과 불로 상징되기도 하지만 비둘기로도 상징되기도 합니다.(p68) 참되고 영적인 형식적인 집회가 아름다울 수 있고 형식이 없는 집회가 경건할 수 있습니다.
지역교회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주장하면 과거와 현재의 그리스도인들과의 연결을 무시할 수도 있게 됩니다.(p68) 성경은 진리 없는 연합을 지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연합 없는 진리 추구 또한 지지하지 않습니다. 독립은 정당하나, 우리가 고백하는 공동의 신앙 안에서의 교제 또한 정당합니다.(p70)
초대교회는 성전의 형식적 예배와 함께, 가정에서의 자유로운 교제를 함께 시행함으로 서로 보완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구조와 비구조, 형식과 비형식, 권위와 자발성, 독립성과 교제가 모두 필요합니다.(p71)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넷째 복음전도와 사회참여의 균형입니다. "복음주의"(Evangelical)라는 말은 "전도에 열정적인"(Evangelistic)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전도를 복음주의적인 것으로 해석해 소위 "사회복음"(Social Gospel)에 반발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p74) 그래서 사회참여를 하면서도 자선사업 같은 일에만 집중하고 제도적 개선 활동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p75)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비기독교 사회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책임이 복음전도, 즉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것뿐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p78) 반대로 'WCC'(세계교회협의회)가 73년 방콕에서 주최한 대회는 "오늘의 구원"이란 주제로 개최되어 구원을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용들로만 재정의 하였습니다. "우리는 경제적 정의, 정치적 치유, 문화적 갱신을 위한 투쟁을 하나님의 선교를 통한 세계의 전적인 해방의 요소라고 본다"(p76)
그런데 최근 복음적 그리스도인들 안에 환영할 만한 변화가 있습니다. 사회적 책임을 회피한 채 "작은 윤리"(흡연, 음주, 춤 등)에만 집착하고 "거대한 윤리"(인종 차별, 폭력, 가난, 환경, 정의 등)을 소홀히 했던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p78)
신학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며, 종교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삶 전체에 관심을 두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p78) 부활하신 예수님이 교회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명령'(Great Commission)을 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대치하는 것은 아닙니다.(p80)
그러면 복음전도와 사회참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은 이 둘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다른 사명을 주셨고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각자가 받은 소명과 은사에 따라 부르심에 따라 충성해야 합니다.(p81)
개인뿐 아니라 지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역교회는 교인 각 사람이 은사에 따라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교회적으로도 복음전파와 지역사회에 대한 사회참여를 함께해 나가야 합니다.(p82)
존 스토트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의 "진리"만큼 우리를 뜨겁게 하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안에서 지성과 감성, 보수와 진보를 동시에 강조하며, 서로를 보완해 주는 형식과 자유,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균형 있게 수행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존은 이를 가르칠 뿐 아니라 그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갈 순간까지, 설교를 통해, 목회를 통해, 50여권의 저술을 통해, 실천적 활동을 통해, 그리고 몸으로 섬기는 봉사를 통해 본을 보였습니다.
존은 마치 바울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그 뒤에 숨지 않고,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면서 실천한 것을 토대로 가르치며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고 말한 것처럼 그렇게 "연구하고 실천하고 가르치며" 한 세상을 살다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이며, 그의 편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순전함으로 따라, 우리 삶을 통해, 우리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멘!!
*
위 글은 존 스토트 신부가 소천한 2011년 7월27일에, 7월31일 주일예배에서 설교.
*
존 스토트의 장례식은 8.08 목회했던 올 소올즈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장례 예배에 참석한 최종상(국제오엠선교회) 백철규(CCC) 영국 선교사는 "너무나 검소하고 조촐해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고 밝혔다."
"스토트 목사가 82년에 설립한 현대기독교연구소의 마크 그린 소장은 "검소하고 조촐한 예배는 고인이 평소 원하던 것"이라며 "장례예배를 통해 어느 누구도 영광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십자가를 선포하며 주 예수를 찬양하는 것이 고인의 바람이었다"고 말했다."
"올소울즈교회 수석장로를 지낸 데이비드 터너는 "스토트 목사는 2006년 런던의 은퇴자 시설에 들어가면서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불필요한 치료를 하지 말 것을 당부했었다"고 소개했다. 더 나은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일찍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국민일보, 김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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