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요한복음 20:1-18)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 여러분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것을 믿습니까?
그러나 부활은 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희생과 대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위해 얼마나 많은 죽음의 대가가 필요한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한 주는 글자 그대로 고난주간이었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얼마나 센지 우리의 삶의 여기 저기를 할키고 간 자국들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죽음은 언제나 갑자기 찾아옵니다. 죽을 사자를 보십시오. 죽을 “사(死)”는 한 일자 밑에 저녁 “석”, 칼 “비”로 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어느날 저녁 갑자기 찌르는 비수같다는 말입니다. 낮에 오면 혹 막을 수도 있고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밤에 예기치 않을 때 오기 때문에 죽음을 막아낼 사람은 없습니다.
전도서 8:8 말씀이 아주 분명합니다. “죽는 날을 주장할 자가 없나니 지진처럼 흔들림이라”. 전도서는 죽음이 마치 지진과 같다는 것입니다. 지진을 예측할 사람도 없고 피할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도 죽음을 장담하거나 피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분명 죽음으로부터 다시 사는 것입니다. 죽음이 나쁜 것이지만 죽음이 있어야 부활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죽음을 어떻게 이기며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죽음을 이긴 부활의 날에 죽음을 넘어 영생으로 가신 예수님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임하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금요일에 십자가에 죽고 안식후 첫날을 맞이했으니 사흘이 지났습니다. 이 날 이른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나왔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마리아는 예수님을 무덤에 두고 편하게 잠잘 수 없었습니다. 간 밤을 자는 둥 마는등 지새고 동이 트자마자 무덤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예수님의 무덤이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요20: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마리아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무덤 문이 열리고 무덤을 가로막았던 돌이 없어졌으니. 마리아는 “내가 잘못 보았나?” 하며 두리번 거렸으나 분명 예수님 무덤은 열려 있었고 돌은 굴려져 있었습니다. 분명 큰 사고였습니다.
마리아는 깜짝 놀라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소리쳤습니다. "베드로, 요한 제자 여러분, 예수님 무덤이 열려 있어요. 돌도 없어졌어요. 빨리 가보세요”. 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향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둘이 같이 뛰었는 데 요한이 젊었기 때문에 먼저 도착했습니다. 요한은 무덤 밖에서 무덤안을 흘끗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 시신이 없고 옷만 보였습니다.
뒤늦게 달려온 베드로가 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예수님은 없고 세마포와 수건만 놓여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7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20:7,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여기 “놓여 있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푹꺼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나비가 부화할 때 몸이 빠져나오면 껍질만 남은 것처럼 예수님 몸이 쏙 빠져 나오자 그 몸을 감쌌던 옷과 수건이 움푹 꺼진 채로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때서야 밖에 있던 요한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둘이 함께 그 부활의 현장을 보고 있는 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은혜가 있었습니다. 8절입니다. 요20:8, “그때서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그 다른 제자는 요한입니다. 밖에 있던 요한도 안에 들어와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부활을 믿되 사실적으로 믿습니까? 사실적으로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을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떤 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적으로 믿게 되었습니까? 열쇠는 “보다”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5절부터 8절 사이에 “보다”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5절에서 요한이 밖에서 보고, 6절에서 베드로가 안에 들어가서 보고, 8절에서 안에서 둘이 함께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각각 다릅니다. 먼저 요한이 밖에서 본 것은 흘끗 본 것입니다. 헬라어 단어로는 “브레포”라고 합니다. 보기는 보는 데 별 생각 없이 보는 것입니다. 찬찬히 뚫어지게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눈으로 쓱 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불신자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습니다. 알아 볼 마음도 없습니다. “예수라는 분이 죽었는 데 살아났다고 하더라” 이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믿음은 밖에서 흘끗 봐서는 생기지 않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요20: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만 안을 흘끗 바라보는 신앙으로는 10년이 지나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무덤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았습니다. 6절입니다. 요20: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보았다"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 단어는 “테오레오”란 말인 데 이 말은 유심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마치 형사가 단서를 찾으려고 여기 저기 뒤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과학자가 증거를 찾으려고 뚫어지게 현미경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베드로가 보았더니 신기했습니다. 몸은 없고 옷과 수건이 그 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사람이 죽으면 머리를 수건으로 감고 몸은 향을 바른 후 세마포로 감쌉니다. 예수님의 몸은 니고데모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자세히 보니까 세마포는 몸이 누어 있는 위치에 그대로 있고, 머리 수건은 목만큼의 거리에 약간 떨어져 놓여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예수님을 믿을 때 꼼꼼하게 들여다 봅니까? 예수님 가까이 와서 자세히 들여가 봅니까?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무덤 안으로 들어와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자세히 살펴본 것중의 하나가 “튜린의 성수의”입니다. 이탈리아 튜린에 있는 성 요한 성당에 오래전부터 예수님의 수의라고 믿어지는 성수의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40명의 세계의 과학자들이 연구 프로젝트를 만들어 각자의 나라에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수의를 입은 남자는 몸무게 약 80킬로에 키 180센티 정도의 남자였습니다. 그를 덮고 있는 수의는 길이 약 4미터, 넓이 약 1미터의 아마로 된 천이었는 데 실은 직접 손으로 뽑아낸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많은 피를 흘렸는 데 그 피는 진짜 피였고 피에는 빌리루빈이라는 혈청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빌리 루빈 혈청은 매질을 많이 당했을 때 분비되는 담즙색소입니다. 혈액형은 AB형이었고 남자가 수의와 접촉했을 시간은 24시간에서 36시간이었습니다. 수의를 입은 남자는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습니다. 머리는 날카로운 물건에 찔린 흔적이 있고 오른쪽 어깨는 무거운 짐을 운반한 흔적이 있고 목에서 장딴지는 심한 매질을 당했고 얼굴은 부어 있었으며 손과 발을 관통하는 못자국, 창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 수의를 통해 사람의 얼굴을 네거트브 3차원으로 재현해보았더니 이런 얼굴이 나왔습니다.
물론 이 튜린의 성수의가 진짜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것은 튜린의 성수의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밖에서 흘끗 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안으로 들어와야 많은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성경 전체의 증거가 있습니다.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부활은 명백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것은 살리시는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죽었다 산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삭, 요나, 수넴여인의 아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죽었다 살았습니다. 신약에는 나사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 야이로의 딸, 다비다, 유두고가 죽었다 살았습니다. 부활은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사건만 봐도 부활은 분명합니다. 부활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예수님은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 시체를 훔쳐갈만큼 용감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후 꽁꽁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시체를 훔쳐갔다면 그 뒤 어디에서라도 발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완전히 죽지 않고 기절했다 깨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은 그러나 예수님이 완전히 죽었다고 말합니다.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의학적인 사망입니다. 다리를 꺽으려고 보니 이미 죽어 다리는 꺽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두려워 한 빌라도가 죽지 않은 사람을 장사하라고 내줄 리도 없습니다. 만에 하나 죽지 않고 살았다면 어디선가 죽었어야 하는 데 그 후에 예수님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를 통해서도 확실합니다. 그의 부활로 나눠진 BC와 AD의 역사가 확실히 다릅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는 더 확실합니다. 만일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 수많은 사람이 부활하지 않은 가짜 예수를 2천년씩이나 믿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일시에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습니다. 2천년은 적은 세월이 아닙니다. 교회는 아무런 군대도 경찰도 없지만 2천년동안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는 조직입니다. 로마도 망하고 징기스칸도 망했지만 교회는 그 많은 핍박속에서도 망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들어간 곳마다 세상은 달라지고 사람은 변화되었습니다. 바이킹족 영국에 들어가 세계적인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야만족 게르만족에게 들어가 세계적인 문명국가를 만들었습니다. 공산당의 나라 러시아에 들어가 공산주의를 붕괴시켰습니다. 우상과 가난의 한국에 들어와 세계적인 나라가 되게 했습니다. 가까이 가 봐야 합니다. 성경과 역사와 교회를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수많은 부활의 증거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활의 증거를 보아도 믿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오늘 말씀에 세 번째 “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밖에 있던 요한이 무덤안으로 들어와 다시 본 것입니다. 8절입니다. 요20:8, “그때서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여기서 “보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이돈”입니다. 이 말은 이해하고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머리로 안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안 것입니다. “아하” 하고 마음으로 깨닫고 믿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활의 증거를 역사적으로 성경적으로 연구하고 알아도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부활 자체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이것이 인간의 생명 법칙입니다. 그런데 “죽어도 다시 산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논리적으로 깨닫고 알았다고 믿어집니까? 믿게 한 분이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안에서 영으로 믿게 합니다.
이스라엘에 있을 때 유대인 교회를 잠시 출석했습니다. 한번은 아랍 청년 하나가 간증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자기 민족이 믿는 모하멧을 믿었습니다. 이슬람교는 알라신과 모하멧외에 다른 신을 믿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부모를 따라 어릴 때부터 코란을 읽고 모스크에 갔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성경을 접하고 읽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안 읽으려고 숨겨 두었지만 어쩌다 몰래 읽는 성경은 읽을수록 끌리는 책이었습니다. 그가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아, 예수님은 살아 계신다. 그는 부활하셨다”. 그때부터 그가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예수믿는 것이 알려지자 문중에서 그를 잡아다 재판을 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우리가 믿지 않는 예수를 믿느냐?”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니,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다니 말이 되느냐?” “예, 저도 처음에는 예수를 믿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다가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 네가 믿는 믿음이란 무엇이냐?” “제가 믿는 믿음은 한 마디로 예수님은 살아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제가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길을 가는 데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왼쪽으로 갈까 오른 쪽으로 갈까 망설이고 있는 데 거기 두 사람이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니 한 사람은 죽어 있고 또 한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누구에게 길을 묻겠습니까?” 문중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그거야 당연히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냐?” 청년이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당연히 살아 있는 사람에게 묻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모하멧이 살아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알고보니 죽었습니다. 지금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무덤도 없고 그를 믿는 세계와 역사는 달라졌습니다. 저는 죽은 사람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아주 분명한 말입니다. 부활을 믿었더니 이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그 후 그는 문중에서 쫓겨나 집을 나왔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결국 자기 민족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기적은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 기적이요 더 큰 기적은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지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믿는다”는 말은 수동형으로 씁니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니느라”. 여기서 “시인하는 것”은 능동형입니다. 내가 시인하고 내가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서 믿기 때문에 수동형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부활은 초자연적 사건입니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사건입니다. 몇 년 전 하나님께 돌아온 한국의 지성 이여령도 그의 책 “젊음의 탄생”에서 말했습니다. “과학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요, 예술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며, 종교는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부활은 설명이 안되는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믿어지는 세계입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주시고 2천년 교회사에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에게 주시고 저와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부활이 믿어지는 기적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최고 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활을 믿게 하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개인적 삶에 역사하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은 우주적인 사건이지만 또한 개인적인 사건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막달라 마리아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요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니”. 여러분은 이 막달라 마리아를 보십니까? 왜 마리아는 무덤앞에서 울고 있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눅7장에 보면 7귀신 들린 창녀였습니다. 그가 왜 일곱 귀신들렸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가 누구를 상대로 왜 창녀로 살았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학자들은 이스라엘 갈릴리 믹달이라는 곳에서 가난하게 태어난 그가 로마 주둔군을 상대로 생계를 위해 창녀의 일을 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일곱 귀신이 들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많은 부분에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가 상처받은 여인이었다고 하는 것과 예수님 만나서 치유되고 회복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를 사랑했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묻혔습니다. 그나마 가슴 아프게 죽었습니다. 그리고 묻혔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이른 아침에 슬픔과 그리움의 눈물로 울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사랑하면 눈물이 많습니다. 또 사랑받으면 눈물이 많습니다. 부활은 언제나 눈물 많은 사람, 상처받은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시인 정호승이 쓴 시가 있습니다. 제목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이 없으면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눈물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늘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요20:15,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리고 16절에서 이름을 부릅니다. “마리아야”. 무덤앞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야” 부르시며 우리앞에 서신 분,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여러분도, 이 아침에 부활하신 주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며 여러분 앞에 다가오시는 것을 믿습니까? 내 이름 아시는 분, 내 생각 아시는 분, 내 흐르는 눈물도 아시는 분, 그가 다가와 내 이름부르며 흐르는 눈물 닦아주시는 것을 믿습니까? “내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부활은 우리 개인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위로요 능력입니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시는 부활의 주님, 저는 그가 마리아에게 다가오실 때 마리아는 적어도 세 가지에서 벗어났다고 믿습니다. 첫 번째 운명주의에서 벗어났습니다. 운명주의는 “내가 일곱 귀신들린 것은 운명이다. 내가 창녀가 된 것도 운명이다. 팔자를 거역하지 말자. 받아들이자”라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철학과 종교가 이 운명론입니다. 그러나 부활은 운명론을 거부합니다. 바울이 쓴 위대한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장은 그리스인들의 운명론을 거부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고전15:17,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이요”. 19절, 고전15:19, “만일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운명주의는 “모든 것은 다 팔자소관이다. 죽으면 끝난다”라는 생각입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면 시작입니다. 부활은 운명주의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둘째 패배주의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패배주의는 “해봐도 안된다. 나는 안돼“ 하는 생각입니다. 부활은 패배주의를 거부합니다. 우리가 실패할 수 있고 고난받을 수 있고 병들 수 있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저 앉아 있지는 않습니다. 다시 일어납니다. 독일의 본회퍼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부활절을 아는 사람은 절대 절망할 수 없다“. 세 번째는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죽으면 끝난다 할 때 두려움이 있지 다시 사는 데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라틴어로 좋은 말이 있습니다. “스페로 스페라”. “숨을 쉬는 한 희망은 있다”. 부활신앙은 숨을 쉬는 한 희망은 있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운명주의, 패배주의, 두려움 대신에 부활을 믿는 사람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바울의 일생을 연구한 유명한 바울신학자가 내린 결론입니다. 첫째 “세상사람과 문화에 대하여 기죽지 않고 당당하다”. 바울이 복음전했던 당시 그리스, 로마는 세계 첨단의 지성과 문화 국가였습니다. 모든 철학, 문화, 지식이 거기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에 기죽지 않았습니다. 그것들과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부활만 전했습니다. 둘째 “어떤 병마와 죽음 앞에서도 겁내지 않는다”. 바울은 평생 몸이 약했습니다. 때로 많은 육체적 위기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겁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 부활의 복음 전하고 죽으면 천국에서 부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사람들의 태도와 배신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바울은 평생 적이 많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수많은 적들로 가득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에 대하여 어떻게 대하느냐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진실은 변하지 않고 자신은 오직 하나님만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부활신앙이 있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처럼 운명주의에서 벗어났습니까? 더 이상 패배주의에 묶이지 않겠습니까? 다시는 근거없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겠습니까? 대신 세상사람과 문화에 대하여 기죽지 않고 당당하겠습니까? 어떤 병마와 죽음 앞에서도 겁내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의 나에 대한 태도와 배신에 연연해 하지 않겠습니까?
스티브 세인트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번은 남미에 세계 최대 이과수 폭포에 갔는 데 두 사람이 보트가 뒤집혀 급류에 떠내려 오고 있었답니다. 그때 강가에 있던 사람들이 이들을 발견하고 급히 밧줄을 던졌답니다. 다행히 두 사람은 모두 밧줄을 잡았는 데 한 사람을 재빨리 밧줄을 잡아 강둑으로 올라왔지만, 한 사람은 밧줄을 버리고 옆에 떠내려 오던 통나무를 보고 그것을 붙잡았답니다. 결과적으로 밧줄을 붙잡은 사람은 살고 통나무를 붙잡은 사람은 폭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생각했습니다. “그렇다. 험한 세상에 무엇을 붙잡았느냐가 문제다. 강가에 있는 사람과 연결된 것을 붙잡아야 산다. 사람이 붙잡고 있는 밧줄을 잡으면 살고 그냥 떠내려가는 통나무를 잡으면 죽는다. 아,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민 부활의 밧줄을 붙잡았으니 나는 사는구나. 주여, 예수님이 붙잡으신 부활의 밧줄을 나도 붙잡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끝까지 그 밧줄 붙잡고 영생에 이르게 하소서”. 여러분도 이 부활의 아침에 그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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