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좋은 설교

다른 삶을 꿈꾸는가 (삼상 16:1~3)

ree610 2024. 1. 22. 11:09

 

다른 삶을 꿈꾸는가 (삼상 16:1~3)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삼상 16:1-3)


중앙역-驛은 逆이다
이제 이곳에선 / 떠나는 사람은 없다
누구도 떠나려 / 이곳에 오진 않는다
떠나려는 자에게 / 이곳은 최종목적지이다
그래서 / 지금 이곳에선 / 아무도 떠날 수 없다
이제 이곳에선 / 도착한 사람은 없다
누구도 내리려 / 이곳에 오진 않는다
내리려는 자에게 / 이곳은 최초출발지이다
그래서 / 지금 이곳에선 / 아무도 내릴 수 없다
떠나려는 사람은 / 내리기 위해 이곳을 뜨고
내리려는 사람은 / 떠나기 위해 이곳에 온다
그렇게 / 오늘도 / 떠날 수 없는 자들이 내리고
내릴 수 없는 자들이 떠난다
아니, / 떠날 수 없는 자들은 떠나고 / 내릴 수 없는 자들은 내린다
驛은 逆이다


우리는 날마다 반란을 꿈꾼다
‘중앙역’은 미국 뉴욕에 있는 역인데, 이제는 실제 역보다는 관광지로 더 유명하다. 역 아닌 역을 보면서, ‘역(驛)은 역(逆)’이라는 생각을 했다.
반역(叛逆). 그리고 반란(叛亂).
아무리 봐도 이 말은 평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쓸 만한 말은 결코 아니다. 반란은 곧 반역(叛逆)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반역은 가장 극단적인 정치적 행위이다. 현 정치질서를 부정하고, 그것을 뒤집어 무너뜨려서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려는 역모(逆謀) 행위가 바로 반란이며 반역이다.
그런데 이런 거시적 정치 차원도 있지만, 미시적 정치라는 개념으로 우리 삶을 살펴보면, 우리가 살면서 행하는 모든 일은 크든 작든 다 정치적인 행위이며, 그래서 반란과 반역도 거시적 차원에 속하는 정치 행위만이 아니라 미시적 차원에 속한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거시적인 차원에서 행하는 정치적 행위가 훨씬 더 복잡하고 힘들겠지만, 양상 자체는 미시적 차원이나 거시적 차원이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인간은 누구나 반란 또는 반역을 꿈꾸는 게 사실이다. 현재 자신이 속한 정치적 질서에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그것을 뒤집어엎고 무너뜨리고 싶은 강력한 심경을 대다수가 느낄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가 문제일 따름이다. 반란을 실행하느냐, 아니면 현 체제를 받아들이면서 사느냐가 문제라는 말이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날마다 반란을 꿈꾸며 산다는 것이다.

반역자 다윗? 반역자 다윗!
“전혀 그럴 맘도 없었고, 그럴 의도도 없었다.”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하고 자주 듣는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명확한 사실은 실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분명히 그럴 맘도 있었고, 그럴 의도도 있었다. 이게 나중에 반드시 드러나는 사실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반역을 했는가? 많은 사람이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다윗은 그럴 맘도 없었고 그럴 의도도 없었다.” 사실이 그렇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할 것이다. 어찌 다윗 같은 사람이 그런 세속적이고 불순한 맘을 가졌겠는가. 그랬다면 다윗은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었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충성을 다했는데, 사울이 악신이 들려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탓에, 충성을 다하는 다윗을 곡해하고 심지어 살해하려 했다. 사울은 나랏일을 놓아두고,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죽이려고 끝까지 추적했는데, 다윗은 사울을 피해 다니기만 했고, 심지어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죽일 수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사울을 살려 보낸다. 이렇게 순수하고 신실한 다윗인데, 사울 왕 때문에 불가피하게 어떤 일을 했겠지만, 다윗이 자의적으로는 결코 악한 일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대체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바보지만,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현자(賢者)이기도 하다. 다윗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다윗을 훌륭한 인물로 치켜세우려고 해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말처럼, 모든 게 다 가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너절하게 너덜거리는 옷자락 사이로 모든 것을 통째로 뒤엎을 증거들이 언뜻언뜻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당시 사람들은 다윗을 그렇게 충성스러운 신하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윗 자신도 그렇고 다윗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다윗을 치켜세우려 하는 까닭에 대해 오늘날 독자들도 의문을 가질 텐데, 이것은 매우 합리적인 의심이다. 성서 기자가 다윗을 추켜세우려 하면 할수록 그 합리적 의심도 따라서 커진다. 당시 사람들, 특히 사울 가문이 속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다윗을 그렇게 충성스러운 신하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며, 역대기가 다윗 즉위의 정통성을 왕권신수설로 뒷받침하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사람들에게 의심을 산다. 그러니 차라리 다윗이 반역자임을 인정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반란과 반역을 긍정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다윗이 사울을 왕좌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반역했다.”라고 누군가 말하면, 다윗 같은 신앙인이 그럴 리가 없다고 대꾸할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심 깊은 다윗이 역모를 하고 반역행위를 했다는 것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다윗이 행한 일들이 얼핏 봐도 명백한 반역 행위인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나님이 반란과 반역을 지시하시고, 예언자들이 그것을 행하는 장면들이 구약성서 여러 곳에 나오는데도, 상당히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모든 정치적인 행위를 거부하는 것을 성서적이라고 고집하기도 한다. 이들은 대체로 친(親)정부적인데, 그런 기독교인들은 예언자들이 전혀 정치적이지 않았으며,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기독교인들이 정부를 비판하는 행위를 비난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결코 비(非)정치화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이 오늘 본문에 명확하게 나타난다.
다윗은 역모에 휩쓸리는데, 다윗이 스스로 역모를 꾸몄다기보다, 사무엘로 인해서 역모에 가담하게 된다. 사무엘이 몰래 다윗을 찾아가서 기름 붓는 장면을 보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네게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삼상 16:1-3)

여기서 보는 대로, 사무엘로 하여금 다윗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도록 지시하는 분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역모를 기획하시고 진행하시는 반역의 수괴(首魁)인 것이다. 하나님은 물론이고, 사무엘과 베들레헴 사람들, 그리고 이새를 비롯한 그 집안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명확하게 알았다. 사무엘은 역모가 드러날 경우 사울이 그를 죽일 것이라고 두려워했고, 사무엘이 베들레헴을 은밀히 방문했을 때, 그를 맞이한 베들레헴 장로들은 “떨며 그를 영접하여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4절)라고 묻는다. 그러니 사무엘이 베들레헴을 방문해서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역모임을 그들은 알았고, 그 사실을 사울이 간파할 경우, 그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도 알았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왕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사울도 역모 콤플렉스가 심했으며,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즉각 조치를 취했다. 특히 다윗에게 호의를 베푼 자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사울은 요나단이 다윗과 친하다는 이유로 요나단에게 격노해서 그를 죽이려 한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줄 알고(삼상 20:30-33)

그리고 사울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역모에 가담한 것으로 의심하고,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삼상 22:8)라고 질책한다.
사무엘상 22장을 보면, 사울은 다윗에게 먹을 것을 주고 다윗이 죽인 골리앗의 칼을 다윗에게 준 아히멜렉을 비롯한 제사장 85명을 반역죄로 몰아서 죽였고, 놉 성에 거주하는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다.(삼상 22:18-19) 사울이 아히멜렉을 반역죄로 몰아가는 장면을 보자.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에게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냐(삼상 22:13)

다윗과 내통했다는 죄명으로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할 것이 명약관화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런 역모를 통해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고, 다윗은 그런 역모를 통해 왕으로 부름받았다. 그래, 하나님도 반란을 꿈꾸신다! 에리히 프롬은 『존재의 기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실 부처도, 성서 속의 예언자들도, 예수도, 에크하르트도, 스피노자도, 마르크스도, 슈바이처도 ‘물렁이들’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들은 고집 센 현실주의자들이었고, 그들 대부분이 박해받고 중상모략을 받은 것은 그들이 덕을 설교했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덕이 아니라 진실? 이 구절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들은 덕이 아니라 진실을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덕이 아니라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들에게 몰려들었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중상모략과 같은 어려움을 당했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하늘나라의 진실을 들려주시던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했다.
에리히 프롬의 말을 여러 번 읽으면서 생각했다. 요즘 설교자들은 무엇을 설교할까? 그들은 진실을 말할까? 그렇다면 그들은 성서 속 예언자들보다, 아니 우리 주님보다 탁월한 초월적 설교 능력을 가진 신적인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진실만 말하면서 수만, 수십만 명의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겠는가? 예언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주님마저 실패한 일을 요즘 설교자들은 정말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 감당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그들이 보는 게 우리가 읽는 것과 같은 성서라면, 성서를 읽고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들은 예언자들, 그리고 주님과 저렇게나 다른 걸까? 그리고 그럴 것이라고 굳게 믿지만, 만약 만에 하나라도 그렇지 않다면, 설교자들이 설교단에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도대체 설교단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다고 하면서, 그들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걸까? 결코 그럴 리 없겠지만, 이런 게 궁금하다, 정말로.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을 정리해보자.
그대, 다른 삶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먼저 반역을 꿈꾸라. 그리고 하나님도 반란을 꿈꾼다는 사실을 알라. 새로운 삶을 꿈꾸는 반역! 그것은 주님이 다윗에게 명령하신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른 삶을 꿈꾸는 우리에게 주님이 들려주시는 명령이다.

이종록 | 전남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장로회신학대학교(M. Div., Th. M.)에서 구약학(Ph. D.)을 공부했다. 삶이 있는 성서읽기(삶의 해석학)와 시적 상상력이 풍부한 글쓰기를 시도하며, 몸, 디지털에 대한 성서학적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저서로 『성서로 읽는 디지털 시대의 몸 이야기』, 『아름다운 말 한 마디를 나누러 가고 싶다』, 『성서와 반제국주의』 등이 있다. 현재 한일장신대학교 구약학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