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가 무엇이기에
본문: 롬 12:6~8
찬송가: 316장
아들이 목사임직을 했다. 부모가 목회자이면 강단에 올라와 안수에 참여하라고 해서 등단했다. 그런데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아들을 바라보니 눈물이 흐른다. 안수를 받는 아들도 눈물을 흘린다. 옆에서 안수 받는 분도 흐느낀다. 안수 후 모두 일어나니 눈물샘이 폭발하고 말았다. 아들이 조용히 "아버지, 울지 마세요." 그러면서 자기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옆에 계신 목사님이 "감격스러우시죠?"라고 묻는다. 필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들이 자기 십자가 지고 고난의 길을 가겠다고 나섰는데 그 길을 먼저 걸어온 아비된 입장에서 그것이 어찌 감격스러운 일인가. 아들이 신학을 시작하기 전 한 선배와 대화를 했다고 한다. "네가 목사를 안 하면 뭐하고 살래? 너는 목사밖에 할 거 없어." 어디 목사뿐이겠는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모든 신자들은 저마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있다. 그 은사를 유익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먼저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해야 한다. 성실하다는 말은 정성스럽고 참되다는 말이다. 베푸는 삶은 정성으로 해야 하고 진실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시작했으면 끝까지 진실하게 해야 하나님께 받은 은사의 참 모습이 아니겠는가. 요즘 세상은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다른 사람이나 사회 일반에 대해서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다. 하나님께 은사를 받은 신자들은 이기주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성실하고 진실하게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해야 한다. 다스린다는 말은 지배하여 권력을 행사한다는 말이 아니라 보살펴 이끌거나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보살피려면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끌고 관리하려면 게으를 수 없다. 대통령이 게으르다면 그 나라는 어찌 되겠는가? 기업의 대표가 부지런하지 않다면 그 기업은 어찌 되겠는가? 한 집안의 가장이 게으르다면 그 가정이 어찌 되겠는가? 다스리는 자, 즉 보살펴 이끌거나 관리하는 자는 부지런해야 한다.
나아가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긍휼이라는 말은 불쌍하고 가엽게 여겨서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신자가 이웃을 불쌍하게 여기고 가엽게 여겨서 도와주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한데 그것을 억지로 하거나 마지못해 남의 눈을 의식하며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세상에는 즐겁게 하는 일도 있지만 불평하며 마지못해 하는 일들도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께 받은 귀한 은사를 즐거움으로 행해야 한다.
오늘의 기도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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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령의 사람이 되자
본문: 행 8:14~24
찬송가: 182장
"세상에는 말은 많으나 말씀이 너무 희귀하다."
말씀은 성령님과 교통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이 충만해야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교훈하신다. 마음 문을 열어야 말씀을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우리 심령 가운데 찾아오셔서 내주하시는 것이다. 보이는 유형교회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무형의 교회가 더 중요하다. 이미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직접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몸이 곧 성전이요 교회이다.
본문의 배경은 유대주의자요 율법주의자였던 사울로 인해 복음전도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당했고, 이 일로 인해 사도 외에는 다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파했다. 사마리아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고 여겼던 예루살렘 교회는 이 소문을 듣고 진상조사위원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했고, 두 사도가 성령 받기를 기도하매 성령을 받았다.
오늘 우리도 성령을 받지 못한 분들은 성령 받기를 기도해야 하고, 성령을 받은 분들은 성령의 충만을 사모해야 할 것이다. 찰스 피니는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하지 않은 것은 죄"라고 했다. 우리가 죄를 범했던 때를 돌아보면 한결같이 성령 충만하지 못했을 때였음을 알 수 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시몬이란 사람이 있다. 그는 복음전도자 빌립의 전도를 받고 빌립을 따라다녔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안수 하매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는 욕심이 발동해 그 권능을 돈을 주고 사려 했다가 은혜의 자리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바르지 못한 것이 죄다. 베드로사도는 회개하고 기도하라고 했지만, 시몬은 죄 사함의 기도는 고사하고, 자기 자신은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하든지 신발에 물 안 묻히려고 남의 등에 업혀서 강을 건너려는 사람처럼 중보기도만 요청했던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서 부활하여 성령으로 거듭나는 축복을 누려야 한다.
나의 자아와 욕심과 정욕과 교만과 불평과 열등감과 우월감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성령님은 교회를 통해 역사하고, 거듭난 기도의 사람을 통해 강력하게 역사하신다. 예배와 성찬과 선한 일에 힘써 참여하고, 성령 하나님을 인정하고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동참하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자.
오늘의 기도
교회를 세우시고 성령으로 감화 감동케 하사 주의 일들을 이루어 가게 하시며 우리로 그 거룩한 사역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성령의 사람으로 충만케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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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특별한 사람이 되자
본문: 딤후 2:20~21
찬송가: 327장
돈 많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들, 좋은 대학이나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특별하게 바라보고 특별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그렇게 특별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을 특별한 사람들과 비교하거나 스스로를 비관하기도 한다. 이런 마음은 신앙인다운 마음일까? 본문을 보면 집에는 여러가지 그릇이 있다고 말한다. 금 그릇, 은 그릇, 나무 그릇, 질 그릇. 이 그릇들 중에서 어떤 그릇이 가장 좋아 보이는가? 당연히 금 그릇이다. 꼭 금 그릇이 아니면 은 그릇이라도 괜찮지만 나무 그릇이나 질 그릇은 곤란하다. 그래서 이왕이면 더 좋은 그릇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더 비싼 그릇이 되려고 한다. 그런데 주인이 사용하는 그릇은 금 그릇이나 은 그릇과 같은 재료의 가치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한다. 그러면 어떤 그릇이 주인이 사용하는 그릇인가? 바로 깨끗한 그릇이다.
우리 모두는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쓰임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더 좋은 도구가 되기 위해서 힘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몸집을 키우려고 한다. 이를 위해 목회자들은 더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려고 한다. 노회에서도 더 높은 위치에 이르려고 한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더 높은 직분을 가지려고 하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고, 함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금 그릇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환상을 쫓느라 주님께서 내가 어떤 모습일 때 더 좋아하셨는지를 잊어버린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금 그릇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 어떤 그릇이든지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깨끗한 그릇이 되기를 원하셨다. 내가 번듯한 교회의 담임목사가 아니어도, 내가 남들이 다 되고 싶은 항존직이 되지 못해도, 누구처럼 많은 헌금을 하지 못해도,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가장 깨끗한 그릇이 되기를 원하신다. 더러운 금 그릇이나 은 그릇보다 깨끗한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구별됨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구별되면 하나님께서 구별된 우리들 속에 거룩한 주님을 담으셔서 사용하실 것이다. 나는 보잘 것 없어도 나를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도록,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오직 주님의 눈에는 보이는 믿음의 사람들로 쓰임받을 줄로 믿는다. 우리 모두가 깨끗한 그릇, 특별한 사람들이 되어 주님을 위해 사용되어지기를 소원한다.
오늘의 기도
주어진 현실이 어떠하든지 나를 깨끗하히 주님께서 사용하시기에 합당한 도구로서 쓰임받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는 도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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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본문: 고전 3:10~15
찬송가: 204장
성경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건축자'라고 부른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아름다운 집을 짓기 위한 몇 가지 준비에 대해 말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지어야 한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올바른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믿음의 집을 짓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이유는 신앙고백의 터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건축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믿음의 집을 짓는다.
둘째, 설계도대로 건축해야 한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하신 후, 모세에게 돌판 외에도 한 가지를 더 주셨는데 바로 성막 설계도이다. 모세는 이 설계도대로 성막을 완공했다. 다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임재 상징으로 구름이 성막 가운데 빽빽했다. 설계도대로 짓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설계도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다. 오늘 진리의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셋째, 좋은 재료를 사용한다. 여섯 가지 재료가 소개된다. 금, 은, 보석 세 가지와, 나무, 풀, 짚 등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금, 은, 보석을 재료로 사용하는 건축자이다. 가격이 비싼 것을 사용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재료들은 불에 타지 않는 재료들이다. 마지막 날 심판 때, 불에 타지 않는 재료로 집을 지었다는 뜻이다. 건축자의 삶이 하나님 말씀 순종, 섬김, 희생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변화와 성장과 부흥과 발전을 이룬 사람들이다. 어떠한 상황과 환경에서도 그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을 성경은 지혜로운 건축자들이라고 말한다. 둘째, 나무, 풀, 짚을 재료로 사용하는 건축자들이다. 나무, 풀, 짚의 재료는 불에 타버리는 재료들이다. 마지막 날 심판 때 이 재료는 불에 타버려서 재 밖에 남는 것이 없다. 이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기 때문에 삶의 변화와 성장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과 상관없이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으로 집을 짓는다. 평상시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그때는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다. 하나님은 오늘도 믿음의 집을 잘 짓는 사람을 찾으신다.
오늘의 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지으며, 설계도대로,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인생의 집을 짓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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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진정한 개혁은 나로부터
본문: 대하 34:14~21
찬송가: 586장
6.13 지방선거가 다음주에 실시된다. 모두들 자기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부터 뼈를 깍는 자기개혁이 있어야 한다.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미국, 영국,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는 선진국으로 진입했으나, 쿠바,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나라들은 선진국 진입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볼 때 개혁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본문은 유다왕 요시야가 일으킨 개혁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중 요시야 왕의 개혁을 살펴보자. 요시야 왕이 유다 왕들이 더럽히고 헐어버린 성전을 수리하게 한다. 이같은 성전 수리는 단지 낡은 건물을 손질하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그의 선조들이 이방 종교를 받아들이면서 훼손한 여호와의 성전을 본래의 모습대로 되돌리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성전을 수리하던 중 율법 책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요시야 개혁의 결정적인 사건이다. 개혁의 갈 길을 가르쳐주는 것은 단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 선지자 훌다가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에 적힌 말씀의 뜻을 풀어 주는 일을 한다. 여 선지자의 등장은 교회 개혁에 있어서 여성들의 역할을 암시하고 있다. 요시야의 개혁 운동의 특징을 말한다면, 모든 사람, 온 국민이 함께 이 일에 동참했다는 것이다. 우리 총회에서 여성총대 비율을 얘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 선지자 홀다로부터 율법책과 말씀이 뜻하는 바를 확실히 알게 된 요시야 왕은 그 내용을 온 백성들로 하여금 언약을 세우게 한다. 그 언약의 내용은 온 백성으로 하여금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고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말씀에 순종할 것을 약속하는 일이다.
요시야 왕은 예루살렘 성전과 유대 전역에 널리 퍼져 있던 이방 종교의 요소들을 제거하는데 힘썼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과 해와 달과 별들을 위해서 만든 모든 그릇과 아세라 상을 끄집어내어 성 밖 기드론 골짜기에서 불살랐으며 여기 저기에 세워진 산당들을 헐어버렸다. 요시야 왕이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통곡했던 것은 이방 종교를 받아들인 선조들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훼손된 것이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안일하게 권위주의에 머물던 로마 가톨릭교회를 뒤흔들어 놓았고, 새로운 교회를 탄생시켰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과거의 영광에 연연하여 안주할 때,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뒤흔들리게 될 것이며, 자칫 잘못하면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나 자신의 개혁을 이루도록 준비하여야 하겠다. 진정한 사회개혁은 나로부터, 진정한 교회개혁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요시야왕의 개혁처럼 나부터 철저히 개혁의 대상으로 놓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모두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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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한 문장의 인생
본문: 신 34:9~12
찬송가: 213장
우리는 성경에서 한 개인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 부분을 만나게 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솔로몬은 '지혜의 왕'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정리 정돈해 본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이다. 한 문장의 인생! 그 속에는 자신의 과거의 삶을 성찰해 보고, 더 나은 미래를 소망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게다가 자신의 삶 속에서 바르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면 이제는 그러한 삶을 살지 않겠다는 마음의 교훈이 담겨져 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기억하길 원하신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다하는 그 날에 주님께서 우리를 맞아주시면서 우리 이름을 부를 때 함께 불러줄 그 한 문장, 과연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이 어떤 한 문장으로 표현되길 원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본문에 등장하는 모세의 120년 일생을 단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계신다.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이다. 지난 120년의 삶을 살았던 모세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대면했다, 그리고 알았다는 것으로 그의 삶을 평가하고 있다. '대면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파님 엘 파님'으로 '얼굴과 얼굴'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얼굴과 얼굴은 맞대는 친밀한 소통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모세에게 보이시면서 서로 친밀한 소통의 관계를 이루었고,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셨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40주야를 함께 하면서 친구처럼 대화하셨고, 이 대면의 시간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 이후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헌신했다. 그리고 이제 120세의 노인이 되었다. 그 노년의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친히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로 부르신다. 그리고 고백하신다. "내가 너를 대면하여 알았다." 이것이 모세를 향한 하나님이 마지막 고백이시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고백인가? 모세는 마지막 때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 이는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한 문장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너를 대면하여 알았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 속에 위대한 한 문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인생이 갈무리 되는 날, '내가 너를 대면하여 알았다'고 나를 향해 고백하시는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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