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가정 예배

6월 10일~15일 가정 예배

ree610 2024. 6. 9. 16:12

갈등을 극복하는 원리
본문: 행 15:36~41
찬송가: 220장

갈등은 성숙한 인간관계를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인 것이다. 성숙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갈등을 잘 극복해야 한다. 갈등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인생자체도 얼마나 힘든가? 그런데 갈등까지 겪게 되면 인생은 더욱 힘들어진다. 그렇지만 갈등은 성숙한 인간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거친 바다이다.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어떤 모임, 어떤 공동체에서 갈등은 피할 수가 없다. 본문에서도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피차 갈라지는 것을 보면서 아무리 완벽한 공동체나 성숙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갈등은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음을 인정하고 너무 괴로워 할 필요는 없다. 바나바는 탁월한 격려자 였고, 바울은 훌륭한 사도였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마가 요한을 데리고 다시 선교 여행을 떠나는 문제를 놓고 심히 다투었다. 선교여행 중에 도중하차한 마가 요한을 2차 선교 여행 때 바나바는 다시 데리고 가자고 했다. 그런데 바울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마가 요한 때문에 피차 심히 다투고 헤어지고 만다. 이것이 바로 갈등인 것이다.
 
첫째,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임을 이해해야 한다. 성령 충만했던 이들도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예수님도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갈등이 있었다. 영적으로는 마귀와 싸웠다. 십자가를 지시기전에는 자신의 뜻과 하나님과의 뜻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셨다. 그 갈등을 피땀 흘린 기도로 극복하셨다.
 
둘째, 갈등을 변화와 성숙의 기회로 만들어 보자.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한다. 그러나 있는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의 관심은 변화와 성숙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편안한 삶을 사는 것보다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아무 문제가 없는 삶을 사는 것보다 문제를 통해 더욱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사실, 많은 갈등의 원인은 잘못된 태도 자체에서 비롯된다.
 
셋째, 갈등을 101%의 원리로 해결하자. 무슨 일이든지 서로가 잘되는 길을 모색할 때 갈등은 해결의 실마리를 갖게 된다. 서로가 함께 유익을 누리며, 함께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서로가 함께 잘 될 수 있는 원리를 따라 대화해야 한다. 그리고 함께 대화할 수 있는 공통분모를 찾아야 한다.
 
갈등의 문제를 하나님께 나아가서 지혜를 구하자. 갈등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갈등은 우리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들어 주는 변장된 축복이 될 수 있다. 갈등은 우리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다.
 
오늘의 기도
101%의 원리를 통해 서로의 장점을 보고 공통점을 찾아서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소서!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임을 가르쳐주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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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본문: 렘 33:1~2
찬송가: 15장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로, 유다 백성들을 위해, 조국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던 선지자였다. 그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된다는 예언을 했고, 이로 인해 자신의 동족에게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눈물로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 그런 그에게 유다 백성들이 보인 반응은 '시위대 뜰에 감금'하는 것이었다. 시위대 뜰에 갇힌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날 소망이 없는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처한 예레미야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는가?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아직'이란 말에 주목하라. '아직' 아니라는 것이다. 예레미야에게 죽음이란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아직' 죽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이란 말은 희망을 상징하는 단초가 되는 중요한 단어이다. 왜 아직 아닌가? 예레미야가 있는 시위대 뜰, 그 죽음의 장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한 우리 인생은 '아직'의 인생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 있는 한 우리는 '아직'의 사람이 된다. 우리의 상황이 시위대 뜰과 같은 장소에 머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우리의 인생 속에 침투되어 들어오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 '여호와'란 말을 연거푸 3번 강조하고 계신다. 성경에서 3번은 최고의 강조이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강조하고 또 강조한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호와'라고 부르실 때는 가장 친밀한 관계에 놓여 있을 때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예레미야야! 네가 지금 혼자 죽음의 장소에 머물러 있다고 여기고 있느냐?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네 곁을 떠난 적도 없다. 실은 네가 행한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내가 행했고, 그것을 만들어가며, 그것을 완성시켰다."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환경 때문에 힘들어 한다. 때로는 그 환경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소망이란 단어가 사치스럽게 여겨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함께 하신다. 죽음의 장소인 시위대 뜰까지 내려오셔서 말씀으로 임하신다. 그리고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신다. 영적인 눈을 떠야 한다. 가정, 직장, 교회의 모든 사역 속에는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고 성취하시는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함께 하심을 믿고 나아가자.
 
오늘의 기도
소망이 보이지 않는 죽음의 자리인 시위대 뜰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말씀하심을 경험하게 하시고, 함께 일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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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없이함과 더함
본문: 창 30:22~24
찬송가: 310장

야곱 당시 문화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자식을 낳아주는 것이었다. 이는 혼인지참금과 연관이 있다. 당시 혼인지참금은 30~40세겔이었다. 이 금액은 목동의 3, 4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라헬은 요셉과 혼인하여 칠년이 되도록 자식을 낳지 못했다. 라헬은 당시 혼인서약서에 명시된 대로 자신의 여종을 통해 두 아들을 낳게 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미신처럼 여겨졌던 합환채 사건까지 만드는 것을 보면 많은 부담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라헬은 세상적인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보았지만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 라헬은 이제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마지막 돌파구를 찾기 위해 하나님께 엎드렸다. 지금까지 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동원한 것에 대한 통회의 기도이다. 하나님은 라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생각하셨다. 야곱과 라헬은 요셉의 출생을 통해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없이함이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필요를 없이 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째, 더함이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필요를 더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야곱과 라헬은 요셉의 출생을 통해 '없이함과 더함'이 하나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를 '노년에 얻은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것은 열 명의 아들을 낳을 때까지 알지 못한 사실을, 열한 번째 요셉을 낳을 때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 표시로 요셉에게 채색옷을 지어 입혔다. 야곱과 라헬은 요셉을 볼 때마다 '없이함과 더함'이 하나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았을 것이다. 채색옷은 편애하여 지어준 옷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깨닫게 해준 특별한 아들이라는 표현이었다.
 
야곱은 요셉의 출생과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게 되었으니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야곱의 제안에, 라반은 가지 말고 일을 좀 더 해달라고 부탁한다. 일을 하는 품삯은 야곱이 정하면 된다고 한다. 라반의 부탁에 야곱은 자신의 삯을 정한다. 이때 확률이 높은 것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확률이 낮은 것을 선택한다.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다. 이 부분을 통해 야곱의 신앙을 알 수 있다. 야곱은 아들 요셉의 출생을 통해 '없이함과 더함'이 하나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러니 확률이 높은 것을 선택해도 하나님이 손에 붙여주지 아니하면 자신의 것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계획되었고 운영이 되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으로 살아가시기 바란다.
 
오늘의 기도
오늘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께서 없게도 하시고, 더하게 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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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예수님을 보는 눈
본문: 눅 23:39~43
찬송가: 545장

사람은 누구나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 눈치는 다르다. 눈치가 있는 사람은 매사에 공동체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가고 일의 효율도 가져 오지만, 눈치가 없는 사람은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고 관계를 서먹하게 하기 쉽다.
 
그런가 하면 눈이나 눈치와 다른 영적 안목이 있다. 이것은 그냥 사물을 바라보고 물체를 투영하는 눈이나 분위기를 읽는 눈치와는 다른 차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인지? 저 사람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믿음 안에 바로 세워 놓을 수 있는지를 깨닫는 능력을 영적 안목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3장 제목을 붙인다고 하면 '십자가장'이라 할 수 있는데, 사복음서에 보면, 마태와 마가와 요한도 주께서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오직 누가 만이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예수께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빼놓지 않고 기술하고 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가장 빛나는 사역이기도 하고, 당사자인 한 강도는 구원의 막 차를 탄 행운아가 되었다.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 둘이 처음에는 동일하게 '예수를 욕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한 명이 마음을 돌이키고 회개한다. 한 강도의 태도는 예수를 비방했음에 비해서, 다른 한 강도는 예수님의 옳음을 알고 고백했다. 또 한 강도는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았지만, 다른 한 강도는 자기가 지은 죄를 인정하고 참회했다. 한 강도는 현세의 구원만을 구했지만, 다른 한 강도는 내세의 구원을 간구했다. 그 결과 한 강도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고 말았고, 다른 한 강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을 약속 받았다.
 
중요한 포인트는 '예수를 보는 눈'이다. 39절에 예수님을 비방했던 한 강도는 대제사장이나 로마군병과 군중들처럼 예수님을 '정신 나간 얼간이' 정도로 보았다. 한 편 강도만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옆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행동과 말을 들으면서 점점 '예수님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영적 안목이 생긴 것이다. 특히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주께서 기도 하시는 소리를 가까이에서 들었다. '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두 강도의 운명을 가른 것은 '예수를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을 누구로 보고 믿고 있는가? 그리스도요, 구원자요,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실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가? 여러분 자신을 확증하시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원죄와 자범죄로 인하여 소망이 없는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를 보내어 주셨는데,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지 않는 무지를 용서하여 주시며 내 눈을 열어서 주를 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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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령으로 변화된 사람
본문: 행 3:1~10
찬송가: 182장

성령을 받기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만큼 나약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는 달라졌다. 그래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놀라운 일을 일으켰다. 이러한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한 이유는 그가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사람답게 그 이전의 삶(생각, 가치관, 목표)를 과감하게 내려놓았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에게 일어난 변화는 무엇인가?
 
첫째, 주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주님은 항상 '한 사람'을 찾으셨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낮은 사람이었다. 주님이 그 마음을 만져주지 않으면 안 되는 불쌍한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기도 하셨다. 반면 제자들은 오직 자신의 공명심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던 베드로가 성령을 받은 후 달라졌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가 보였다. 우리가 진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토록 찾으셨던 '그 한 사람'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 그래서 우리도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사람을 주목하여 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사랑은 자신에게 주신 것으로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를 돕거나 무슨 일을 할 때 물질이나 세상의 권력, 성공과 같은 가시적인 것으로 하려고 한다. 우리에게도 이런 생각이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진짜 성령받았니?'라고 물어야 한다. 성령 받은 사람은 세상 사람과 똑같은 논리로 세상을 볼 수 없다. 그동안 베드로는 미문 앞에 앉은 앉은뱅이를 보면서도 자신에게는 은과 금이 없었기 때문에 외면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은과 금이 아닌 주님께서 이미 자신에게 주신 것들을 보게 되었다. 이처럼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은과 금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작은 것을 나누는 사람이다.
 
셋째, 모든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게 되었다. 성령을 받기 전에 베드로는 자신의 이름에만 관심이 있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런데 성령 받은 이후에 제자들은 자기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도록 이야기하고, 행동하고, 살아가게 되었다. 성령 받은 자는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온전히 높여지기를 기대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부족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갖는다. 설령 우리에게 대단한 모습은 없어도 아침과 주님과 시작하고, 잠자리에 들 때도 주님을 생각하며 잠들 수 있다면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오늘의 기도
우리도 주님이 찾으시던 그 한 사람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 주님이 주신 것을 나누는 사람,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만 사는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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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행복한 가정
본문: 시 128:1~6
찬송가: 559장

권력과 부와 지위 등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다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가정에 문제가 있으면 행복한 삶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내 가정이 행복한지 안한지조차 관심이 없다. 특히 남편들이 더한다. 가정의 행복지수를 알아보려면 "내 가정의 밥상은 즐거운가?" "나는 집으로 빨리 들어가고 싶은가?" "내 아내와 자녀는 사랑스러운가?" 등을 들 수 있다.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먼저 부부가 행복해야 한다. 가정의 기초는 부부이기 때문에 부부가 행복하면 가정이 행복하고 부부가 불행하면 가정도 불행해진다. 시편 128편은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특히 행복한 남편, 행복한 아버지를 보여준다. 행복한 남편이 있는 곳에 행복한 아내, 행복한 자녀가 있다. 이런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아내가 있어야 한다. 본문의 가정이 행복하게 보이는 이유는 아내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지만 아담이 홀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돕는 배필을 주신 것이다. 직장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살 짝이 더 중요하다. 직장은 떠날 수 있지만 배우자는 평생 함께한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은 아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아내가 행복해야 한다. 아내가 내실에 있되 결실한 포도나무가 되어야 한다.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가 되려면 농부의 많은 수고와 돌봄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실에 있는 내 아내가 결실한 포도나무와 같이 행복한 아내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남편들이 하나님이 짝지어준 귀한 아내와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아내와 함께 사는 법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깨 한 번 주물러 줄까?" 묻지 말고 그냥 주물러 주면 된다. "청소기 한 번 돌려줄까?" 묻지 말고 그냥 청소하면 된다. 욕실 하수구의 머리카락을 치우고 변기 한 번 청소하면 그것으로 아내는 행복해한다. 아내를 하인이나 소유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아내를 존중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늘 아내와 상의하는 남편은 존중받는다. 그 아내는 남편을 늘 떠받들고 사랑할 것이다. 그런데 남편을 행복하게 하는 법은 매우 간단 하단다. 먹인다. 재운다. 내버려 둔다. 웃자고 한 얘기일까. 정말일까. 재미있다. 사실 아내가 행복하면 남편은 저절로 행복해지고 가정이 행복하다.
 
아내가 행복해야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남편이 될 수 있는데 아내를 결실한 포도나무로 만드는 일은 내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능력이 나와 내 아내의 부족한 점을 좋은 점으로 만들어주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그래야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
 
오늘의 기도
저희에게 귀한 가정을 주셨는데 결실한 포도나무 같은 아내와 어린 감람나무 같은 자녀가 함께하는 행복한 가정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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