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겼고 (사 49:8~17)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헐벗은 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어떤 사람은 먼 곳에서, 어떤 사람은 북쪽과 서쪽에서, 어떤 사람은 시님 땅에서 오리라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사 49:8-17) 1 19세기 중반 죄렌 키르케고르라는 철학자요 신학자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발표하여 인류의 신앙 세계에 새로운 도전을 던졌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는 예수의 기적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육체적인 질병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 될 수 없음을 선포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온전하지 못하면 만나게 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이 있고, 그것이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선언합니다. 그것은 바로 ‘절망’입니다. 키르케고르가 말하기를 사람에게 나타나는 ‘절망’은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절망하여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경우이고, 둘째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경우이며, 셋째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만 하는 경우입니다. 19세기 중반에 저술한 내용이지만 오늘 현대 인류가 절망하며 몸부림치는 유형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절망하여 자기를 의식하지 않는 경우는 자신이 절망 상태에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목적을 잃어버린 채 분주하기만 한 인생입니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경우를 키르케고르는 ‘약함에서 비롯되는 절망’이라고 불렀는데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서 다른 사람이나 물질로 도피하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며 죽어라고 사람들의 무리 속에 파묻히려고 합니다. 한때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노스페이스라는 브랜드의 점퍼를 입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제품이 좋아서이기도 하겠지만, 그 옷을 입지 않으면 무리에서 배제된다는 왕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 비싼 제품이 유행처럼 팔려나갔습니다. 부모들이 그걸 사주려면 등골이 빠진다고 해서 ‘등골브레이커’라고 불렸습니다. 세 번째,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만 하는 경우를 키르케고르는 ‘고집’으로 정의했는데, 절망의 원인을 자신의 연약함에서 발견하고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여 강한 자신을 스스로 창조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경우입니다. 오늘날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자기 계발, 자기실현이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키르케고르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을 온전히 실현할 능력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자기 창조의 노력을 기울이며 자신에게 집중할수록 더욱더 절망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요약하면, 인간이 절망이라는 병에 걸리면, 아무런 의식도 없이 그날그날 주어지는 대로 살거나, 남들 사는 대로 대세를 따라 살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도 못할 목표를 향해 끝없이 자기 자신을 끌탕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이 모든 삶의 끝은 더욱 큰 절망으로 이어지며, 결국 인간을 영적 죽음으로 몰고간다는 것이 키르케고르의 진단입니다. 그는 인간이 이러한 절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인간은 한 손에 하나님을 붙들고 한 손에는 자신을 잡아 이 둘을 서로 연결시키는 관계 맺음을 통해 자기를 온전하게 실현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과 소명,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과 진리를 잘 깨닫고 그것을 따라 사는 길만이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과 기쁨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오늘 살펴볼 이사야 49장의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인간의 절망 같은 탄식도 보여주고 있고, 또한 그 탄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키르케고르식의 비결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49장의 배경이 되는 시대적 상황은 바빌론 포로 시기입니다. 바빌론 포로 경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요 절망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친히 돌보시는 백성이라고 믿었는데 이방인에게 나라도 빼앗기고, 성전도 파괴되고, 나아가 이방인들 밑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포로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한 탄식이 바로 14절입니다.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이 온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휩쓸었습니다. 포로생활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당시 바빌론은 최첨단의 문명을 자랑하는 나라였습니다. 학문의 수준도 놀라웠지만, 곳곳에 세워진 거대한 신전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혼을 지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빌론의 문화를 따르고, 바빌론의 신들을 섬기면서 살아갔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에 강점되어 그 식민 통치의 간교함이 극에 달하던 1920년대 <희망가>라는 노래가 유행했습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1.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히 누워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같구나 2.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담소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랴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좌절한 이스라엘 백성의 자포자기적 심정과 유사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렸고 잊으셨다고 절망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그들을 잊으신 적이 없다고 선포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15절)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과 해방을 향한 비전을 열거하십니다. 바빌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고향 땅으로 되돌아가도록 인도할 것이며, 되돌아가는 모든 여정과 황폐해진 고향 땅에서의 삶도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않도록 하고, 언제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여 기쁨과 찬양의 세월로 이끌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10절) 이 모든 약속의 정점은 16절입니다.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의 손바닥에 우리의 존재가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손바닥에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아예 새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문신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온 과거의 눈물의 길, 현재 당하는 고통,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래의 아름다운 삶이 고스란히 하나님께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16절 후반부에서 언급된 성벽은 이스라엘 부흥의 상징입니다. 지금은 무너져 황폐해져 있지만 곧 아름답게 회복될 성벽을 하나님께서는 예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비록 절망의 골짜기,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서 어둠 속을 걷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라는 성벽을 한눈에 보고 계시며, 곧 아름답게 회복된 성벽을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심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사업이 모두 하나님의 간절한 관심과 염원 안에 담겨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3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다양한 절망을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10-30대의 사망 원인 1위는 암 같은 질병이 아니라 자살이라고 합니다. 성적이 오르지 않는 학생이 자살합니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기 때문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따돌림에 힘든 학생, 내무반에 적응하지 못한 병사들이 자살합니다. 사업의 실패, 생활고에 시달리던 사람이 남은 자식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동반자살을 선택합니다.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다 죽음을 택한 연예인도 있고, 무료한 인생사를 견디지 못하거나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은 노부모가, 불치의 병을 안고 사는 사람이 자살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억울한 누명을 써서 결백을 주장하거나, 실수에 대한 책임을 지거나, 희망이 없는 삶을 이제 그만 정리하려는 사람들이 내린 결단이 자살입니다. 죽을 용기로 다시 살아보라고 권면하지만, 당사자에게는 마음 편한 제삼자의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만큼 세상은 녹록하지 않습니다. 무관심, 기댈 언덕이 없는 사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이 바로 그들을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40대 후반으로 가면 이미 ‘조기 퇴직’이라는 검은 구름이 몰려옵니다. 자식을 키우며 평생을 힘겹게 헌신해왔지만, 노년의 가난과 외로움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절망을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냥 되는 대로 자포자기하며 살아가시렵니까? 남들 사는 대로 어영부영 따라 살까요? 아니면 강한 자기를 창조하려고 부질없는 힘을 쓰시겠습니까?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구원자 그리스도에 대한 독실한 믿음만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 죽음의 악순환을 반복하는 불행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에게는 누군가 나의 말과 마음을 받아줄 대상이 필요합니다. 변함없이 언제나 진실하게 나를 인정해주는 그분, 주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을 이기도록 돕고 서로를 연결해주는 평안의 공동체입니다. 주님께서 핏값을 주고 사신 교회는 바로 절망이 가득한 세상에서 절망을 이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예수님과 연결되도록 돕는 곳입니다. 이것은 예배와 말씀, 그리고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특별히 감리교회의 ‘속회’나 장로교회의 ‘구역’ 혹은 ‘목장’ 같은 소그룹은 성도의 교제를 담당하는 중요한 조직들입니다. 주일에 선포된 말씀을 가지고 힘차게 세상에서 분투하고, 다시 그 분투한 열매를 갖고서 소그룹으로 모여 승리한 간증을 함께 나눕니다. 때로 패배하기도 하지만 패배의 이야기도 함께 나누며 중보기도를 통해 승리의 비결을 배웁니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 그것을 주님의 십자가 사랑과 연결하며 새 힘을 얻고 함께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는 용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살아야 절망을 이기고 기독교인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삶의 절망으로 인해 삶과 죽음의 길 사이를 헤매는 많은 이웃이 존재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와 같은 절망의 골짜기를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의 자녀들을 감싸고 도는 절망의 그림자가 심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그리고 이 놀라운 복음을 절망에 시달리는 우리의 이웃에게 그리고 자녀들에게 잘 전하고 또 가르쳐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 하나님께서 손바닥에 새기신 인생, 하나님께서 그리시는 여러분의 인생의 성벽을 발견하고, 그 길로 올곧게 걸어가는 인생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녀들의 인생을 ‘손바닥에 우리를 새기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는 결단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현실에 절망하지 마시고 주님께 나아와서 새로운 인생, 새로운 가정의 출발을 결단하는 2017년 새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종구 |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는 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박사학위 과정 중(선교학/중국교회사)이다. 감리교 동북아선교연구센터 소장, ‘애덕기금회’ 해외간사와 「중국교회」(중국교회 소식지) 편집자로 일하기도 했다. 현재 세신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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