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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손

계수님께 읽을 책이 몇 권 밀리기도 하고 마침 가을이다 싶어 정신 없이 책에 매달리다가, 이러는 것이 잘 보내는 가을이 못됨을 깨닫습니다. 몸 가까이 있는 잡다한 현실을 그 내적 연관에 따라 올바로 이론화해내는 역량은 역시 책 속에서는 적은 분량밖에 얻을 수 없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독서가 남의 사고를 반복하는 낭비일 뿐이라는 극언을 수긍할 수야 없지만, 대신 책과 책을 쓰는 모든 '창백한 손'들의 한계와 파당성(派黨性)은 수시로 상기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오늘이 중양절, 그러고 보니 강남 갈 의논으로 전깃줄에 모여 그리도 말이 많던 제비들 모두 떠나고 없습니다. 구름에 앉아 지친 날갯죽지를 쉴 수 있다면 너른 바다도 어렵잖았을 텐데, 무리에 끼어 앉았던 어린 제비 한 마리 생각납니다. 불사춘광 ..

모리아/편지 2021.04.02

계수님께

계수님께 겨울 준비를 하느라고 비닐을 쳐서 바람창을 막고 작업장에 칸막이를 하는 등 서툰 목수일을 하다가 망치로 검지손가락을 때려 하는 수 없이 손톱 한 개를 뽑았습니다. 언젠가의 계수님의 여름처럼 불편한 한 주일이 될 것 같습니다. 손가락의 아픔보다는 서툰 망치질의 부끄러움이 더 크고, 서툰 솜씨의 부끄러움보다는 제법 일꾼이 된 듯한 흐뭇함이 더 큽니다. 더러 험한(?) 일을 하기도 하는 징역살이가 조금씩 새로운 나를 개발해줄 때 나는 발 밑에 두꺼운 땅을 느끼듯 든든한 마음이 됩니다. 형님, 형수님 오셔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 작은 가방에 많은 물건을 넣은 듯 두서 없긴 하지만 창문 하나 더 열어준 셈은 됩니다. 생남(生男)을 축하합니다. 낳을까 말까, 낳을까 말까..

모리아/편지 2021.04.02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발표

샬롬~?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 국민의 힘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의 ‘용산참사’ 발언에 관하여 1. 2009년 1월 20일 새벽 용산구 한강로2가 남일당 건물에 화염이 솟구쳤다. 오늘까지 ‘용산참사’라고 불리는 이 끔찍한 사고로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특공대원 한 명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2. 어떻게 생겨난 참사였던가? 망루에서 농성을 벌이던 사람들은 서울시의 도시정비사업으로 생계수단을 잃게 된 세입자들이었다. 결국 사람들만 내쫓고 땅값만 끌어올린 재개발 사업이었다. 그곳의 희생자들은 하루하루 평범하지만 세상을 지탱하던 성실한 시민들이었다. 3. 당시 청와대와 서울시 그리고 경찰청은 세입자들의 “여기도 사람이 있다”는 지극히 인간다운 호소를 ‘도심 테러’로 규정하고, 그날 새벽 경찰특공대..

모리아/현장 2021.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