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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신학공동체 수요일 연합예배 제목: 참 인간의 길 (시편 1:1~6) 이 자리가 익숙하기는 하지만, 채플 시간에 함께하게 된 것은 오랜만이다

ree610 2025. 5. 30. 20:28

연세신학공동체 수요일 연합예배
제목: 참 인간의 길 (시편 1:1~6)

이 자리가 익숙하기는 하지만, 채플 시간에 함께하게 된 것은 오랜만입니다. 2007년 봄에 말씀을 맡은 적이 있었고, 오늘 다시 말씀을 맡았습니다. 불러주신 학장님과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리며, 또한 소중한 자리에 함께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이렇게 집약되는 본문 말씀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간결하고 선명하게 제시합니다.

먼저 본문 말씀은 복 있는 사람, 곧 의인의 길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점층적인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악인의 길과 대비되고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인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악인의 꾀를 따른다는 것은 악인들이 모의하는 자리에 함께하는 것, 곧 악인들의 권유에 이끌려 같이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가장 직접적인 악행입니다. 의인은 그 악인들의 권유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의인은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들어서는 것은 악인의 전례를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직접적인 권유가 아니더라도 이미 이뤄진 악인들의 전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전통이나 인습, 또는 관습과 관행을 의미할 뿐 아니라 구조적으로 악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포함합니다. 권유를 따라 의식적으로 악행에 동참하지 않아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악의 길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게 나도 모르게 빠져들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 번째, 의인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않습니다. 이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을 말합니다. 직접 악행에 가담하거나 아니면 모르는 사이 악의 환경에 빠지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입니다. 오만(휴브리스)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의식, 자기를 내세우고자 하는 욕망, 다른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은 악의 근원이 됩니다. 한마디로 자기 우상화입니다. 의인은 자기밖에 모르는 그 오만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어서 본문 말씀은 악인의 길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악인은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고 그 귀결에 관해서만 말합니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 의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정의하는 가운데 악인이 어떤 사람을 뜻하는지 밝혔기 때문입니다. 다시 환기하면, 악인은 직접적인 악행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 끊임없이 악인들의 길을 동경하면서 악행을 누적시키는 사람, 무엇보다도 자기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악인은 하나님의 뜻과는 역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습니다. 그만큼 덧없다는 뜻입니다. 그 악인은 심판 때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의인의 모임에 들어서지 못합니다.
“의인의 길은 주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본문 말씀은 그렇게 간결하고 선명하게 결론 맺습니다.

본문 말씀은 모든 종교와 윤리의 근본적 가르침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과연 참 인간의 길일까 하는 물음이 제기된 이후 주어진 통찰이요 깨달음입니다.
인간 행동을 결정짓는 데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좋고 나쁨의 차원이요, 또 하나는 옳음과 그름의 차원입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인간은 좋고 나쁨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나에게 이로우면 좋은 것이고, 해로우면 나쁜 것이라는 인식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인식입니다. 그렇게 판단하며 살던 인간은 점차 자기만의 주관적 기준을 벗어나 성숙한 물음과 답을 구하게 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입니다. 그것은 주관적 차원을 벗어나 객관적 보편성을 지닌 물음이요 답입니다. 자기만의 생존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존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 각성에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각성은 모든 종교와 윤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시편의 말씀은 모든 종교적 가르침과 윤리의 기초를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본문 말씀은 현상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추구해야 할 옳고 그름의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상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당위의 차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따라야 할 가치 기준입니다. 그 말씀의 뜻이 통용되지 않는다면 통용되지 않은 현실을 문제 삼도록 우리를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밤낮으로 주의 율법을 묵상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진정한 복, 진정한 삶을 누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는 데 그 근본 뜻이 있습니다. 자기 편한 대로 생각 없이 악인의 권유에 빠지거나 악인의 전례를 따르지 말고, 밤낮으로 하나님의 뜻을 새김으로써 진정한 삶으로서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본문 말씀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의 뜻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정말 오늘 삶의 현실에서 옳음과 그름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지 난감한 상황에 봉착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의 언론인이자 교육가인 밀턴 마이어(Milton Sanford Mayer)는
그의 책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They Thougt They Were Free: The Germans, 1933-1945)를 통해 현대 사회 안에서 옳고 그름의 문제를 판단하는 것과 관련하여 깊이 통찰합니다. 이 책은 히틀러의 나치(Nazi)당원으로 활동한 10명을 인터뷰한 것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역사적 평가가 이뤄진 시점에서 나치의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는 자명하지만, 그것이 한 체제로 한 사회를 지배할 당시 사람들은 쉽사리 분별력을 잃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독일인들은 공산주의와 나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둘 다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평범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좀 더 지나서는 나치가 과도한 행동을 할 때는 반대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처음엔 ‘생각하지 않은 죄’로 시작해 이웃에게 벌어지는 비극을 외면하던 그들은 결국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평범한 악인들’은 침묵하고 동조함으로써 나치의 공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은, 바로 이 책이 소개하여 유명하게 된 마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목사의 시가 함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밀턴 마이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단지 주민으로, 교사로, 일개 판사로 자리를 지켰을 뿐 다른 아무 생각도 하려 하지 않았던 ‘평범한 악인들’에 의해 놀라운 범죄가 저질러졌다는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을 보면서 말했던 ‘악의 평범성’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과거의 한 사실로 머무르지 않고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를 섬뜩하게 합니다. 독재와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살아가는 국민들이 한편으로는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의 범죄자가 될 수 있는 이치를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역시 나치의 범죄에서 시작하여 죄의 문제를 깊이 있게 통찰한 카를 야스퍼스 (Karl Jaspers)는 『죄의 문제 - 시민의 정치적 책임』(Die Schuldfrage - Von der politischen Haftung Deutschlands)에서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공범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정의와 인권을 실현하는 권력을 지지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2024년 겨울에서 2025년 봄에 이르기까지 몇 달 동안 그 진실을 더욱 깊이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불의한 정치권력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한순간에 망가뜨릴 수 있는지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피땀 흘려 쌓은 민주주의가 무너져 내리는 위기 앞에서 저항하며 주권자로서 책임을 감당하였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중대한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차별 금지와 인권 존중”, 지난 몇 달 동안 광장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높이 울려 퍼진 목소리입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을 경쟁자로서가 아니라 서로 협력하며 존중해야 할 상대로 마주하는 사회에 대한 열망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옳은 길입니다.

작가 한강은 묻습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마땅한 인간의 길에 대한 그 물음을 우리 모두의 과제로 삼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연세신학 공동체에 뜻깊은 날입니다. 연세신학 창립 110주년을 함께 기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110년의 역사에 더하여 여러 자랑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학문 분야별 세계 대학 평가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한 것도 그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이며,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참 인간의 길을 묻는 신학 공동체에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큰 자긍심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신학은 삶의 기술(테크닉)을 가르치는 실용적 학문이 아닙니다. 그저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한 교회성장학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근원적 물음을 추구하는 학문입니다. 모든 삶의 밑바탕을 이루는 물음입니다.
이 공동체에 함께하는 동안 그 물음을 더 깊이 하기를 바라며, 그 물음 가운데 깨달은 통찰로 우리 사회에 희망을 밝히는 몫을 감당하기를 기원합니다.*
- 최형묵 목사(천안 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