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세가족 종강예배(2025.6.5.) 설교. 교직원들에게 메시지를 주라는 의미로 알고 설교를 준비했다. 전통적 설교 형식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삶의 일부를 나눌 수 있어 공유함 - 정종훈 목사 (연세대 교수)
작은 일에 충성하기 (마태복음 25:21)
1982년 대학을 졸업한 저에게 삶의 중요한 화두는 ‘인간’이었습니다. 이는 나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소중한 인간이고, 너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소중한 인간이라는 것,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소중한 인간들이고,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소중한 인간들이라는 것을 인식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나만 소중한 인간이 아니라, 너도 소중한 인간이라는 것, 우리만 소중한 인간이 아니라, 그들도 소중한 인간이라는 것, 그래서 세상의 모든 인간은 위도 없고, 아래도 없는 평등한 인간이라는 것, 이러한 인식이 저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는데, 언제나 지침이 되어왔습니다.
저는 1990년 11월 3일 목사안수를 받았는데, 목사가 되면서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나는 목에 힘을 주는 목사가 되지는 말자.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처신하기보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목사인 나나 평신도인 신도들이나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함께 만들어 가는 동등한 인간, 동등한 동역자로서 서로 협력하며 섬기는 목회를 하자.” 저는 그동안 여기저기에서 협동목사, 동역목사, 담임목사 등 목사로서 또는 교목으로서 30년 이상을 일했지만, “그래도 내가 목사인데”라며 신도들에게 대접받으려고 자청한 적은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는 1997년 3월 1일 관동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교수로 출근하던 날 아침,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나는 학생들보다 먼저 학문의 여정을 거쳤지만, 특정 부분에서는 내가 공부한 지식의 양이 학생들보다 많을 것이다. 반면에, 학생들 역시 한 인간으로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다른 부분에서는 더 풍성한 지식과 더 많은 경험을 지닐 수 있다. 이제 학생들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동등한 인간으로서 마음을 열고, 그들을 통해서 배우도록 하자.” 그래서 저는 수업을 운영할 때, 대개는 일방적인 강의보다 발표와 토론, 마무리 강의 형식으로 진행하거나, 강의 후 질의응답, 토론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2000년 9월 1일 연세대학교 교목실 교수로 부름받아 지난 25년 동안 교목의 보직을 수행했습니다. 신임 시절, 신과대학 선배 교수님들이 교목실에서 2년 정도 일한 후 신과대학 기독교윤리학 교수로 옮기자고 제안했고, 2년이 지났을 때 신과대학 학장님이 실제 옮기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연세대학교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계승하고 강화하고 발전시키는 교목의 직무가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제안을 즉시 거절한 바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연세대학교의 교목으로서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기독교대학의 교목들에 대한 책임 의식 아래 기독교윤리학자의 정체성보다 교목의 정체성으로 일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실력있는 교직원들과 함께 일하는 동안, “부족한 사람이 분에 넘치는 일터에서 일한다.”는 생각을 한시도 떨쳐버린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이 “하나님의 큰 은총의 선물이었다.”는 감사 역시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이제 8월 말, 정년 퇴임하는 제가 그동안 연세에서 경험한 것을 나누는 것이 마지막으로 감당해야 할 책무가 아닌가 싶어 연세 가족 여러분에게 그동안의 일부 경험을 나누려고 합니다.
교수로 취임한 2000년 9월 초 연세 교정을 걷다가, ‘연세기독학생연합회’, 소위 ‘연기연’이 주최하는 개강예배 포스터를 발견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목실과 연기연의 관계는 물과 기름 같았습니다. 교목실은 연기연에 속한 학생들이 너무 보수적이고, 심지어 근본주의적이라 생각하며 연기연 학생들의 지도를 외면했고, 한때 연세대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기독학생회(SCA)만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연기연 학생들은 교목들의 신학적 입장이 자유주의라며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임 교목인 제가 연기연 개강예배에 참석했더니, 학생들과 간사들이 “교목님께서 어떻게 연기연 개강예배를 참석하셨느냐”며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저는 연기연을 품겠다는 마음으로 임원들을 만나고, 선교단체 간사들을 만나고, 매달 정기적인 모임을 만들어 기도 제목을 나누고, 연기연 주최의 행사들을 지원하고, 하는 등 다각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목실과 연기연 사이에 깊은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신뢰 관계가 지금까지 잘 이어지고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2001년 2월, 한국의 거의 모든 대학이 총학생회 주관으로 신입생 오티를 할 때였습니다. 신입생 오티가 저에게는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술 먹이며 길들이는 시간처럼 보였고, 오티 중에 성폭력, 성추행 비슷한 사건 사고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대학생이 된 신입생들 대부분이 오티에 참석해서 첫 단추를 잘못 낀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부에 마린 심정으로 진짜 공부해야 하는 신입생들이 ‘먹자, 마시자, 놀자’로 대학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연기연 임원들, 선교단체 간사들과 의논해서, 이듬해 2월 ‘신입생들을 위한 신앙수련회’를 처음으로 계획했습니다.
예산이 없어서 연세 출신 동문 목사님과 지인 목사님들을 찾아가 후원을 요청했습니다. 약 3,000만 원의 후원금을 모아 전체 250여 명 학생들이 참가하는 2박 3일의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 후 ‘기독신입생 오티’는 신입생들뿐 아니라 재학생들까지 인생의 꿈과 비전을 확인하는 의미있는 행사로 자리잡았습니다. 오래지 않아 ‘기독신입생 오티’를 교목실의 증액된 예산으로 진행할 수 있어 참 감사했습니다.
2001년 3월 학기 이래로 매 학기 한두 명의 탈북민 학생들이 저의 강의를 수강했습니다. 경험해보니 탈북민 학생들이 남한 출신 학생들과 경쟁하며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탈북민 학생들을 만나서 격려하고 도와야겠다고 작정했습니다.
2003년 10월 연세대학교에 재학하는 탈북민 학생 20명 전원을 저의 연구실로 초대했습니다. 8명의 학생이 저의 초대에 응했습니다. 중간고사가 끝난 주의 금요일 저녁, 형제갈비에서 불고기를 먹고, 학기 말에 또 보기로 했습니다. 학기 말 모임에서 연락을 책임지는 총무를 뽑았습니다. 총무 학생은 활동적이고 리더십이 좋았습니다. 2월에 MT를 가자고 해서 우이동 민박집을 빌려 1박 2일 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참석한 16명의 학생이 남북통일의 교두보가 되자는 마음으로 지금의 중앙동아리 ‘통일한마당’을 조직했습니다. 저는 지난 20년 남짓 통일한마당의 지도교수로 봉사했습니다. 그동안 경험한 것을 글로 쓰려고 한다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하여튼 이들과의 희로애락과 다양한 경험들은 저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기회였습니다.
2005년 여름, 고려대학교 이장로 교수께서 기독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리더십학교’를 운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세대학교 기독학생들이 ‘한국리더십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저에게 추천서를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프로그램을 보니 기독교대학인 연세대학교가 할 일을 기독교와 상관없는 고려대학교의 기독인 교수 한 사람이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연세대학교가 직무유기한다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1학점짜리 수업으로 리더십 입문과정, 리더십 전문과정, 리더십 인턴과정, 리더십 캠프 등의 수업을 만들었습니다. 네 과정을 모두 마친 학생들에게는 수료증을 주었습니다. 이 일을 연세대학교 차원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보다 내실있게’ 운영하고자 2012년 교목실장이 되자마자 ‘언더우드학원선교센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센터의 주요 사업으로 ‘언더우드리더십과정’을 만들어 열정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이때 만났던 학생들이 저에게는 명실상부한 제자들입니다. 이 학생들이 교환학생을 지원할 때,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 진학할 때, 또는 회사에 취업할 때 추천서를 참 많이 썼습니다. 그들이 인생의 어려운 질곡에 놓일 때는 아버지와 같은 심정으로 격려하고 충고했습니다. 친구들이 결혼 주례를 부탁하면 네 권의 책으로 결혼 교육한 후 주례자로서 기꺼이 축복했습니다. 지금도 스승의 날에 찾아오는 친구들은 언더우드리더십 과정을 거친 동문들과 통일한마당 동아리의 동문들입니다. 이 친구들이 교수로서 또 교목으로서 누리는 저의 큰 보람입니다.
2014년 9월 알렌과 언더우드, 두 선교사만 알고 있던 제가 연세의료원 원목실장 겸 교목실장이 되면서 세브란스 역사를 상세히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언더우드 선교사 서거 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두 학교의 교장을 18년이나 겸직하며 발전의 초석이 되었던 에비슨 박사의 존재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교 캠퍼스 어디에도 에비슨 박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백양로 사업이 마무리될 때, 신촌 굴다리를 건너 캠퍼스 정문을 지난 바로 오른편 공간에 ‘에비슨 가든’을 명명할 것을 백양로 사업단에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에비슨 가든’이 조성되었지만, 아직도 우리 연세대학교의 구성원 대다수가 에비슨 박사도, 에비슨 가든도 잘 모르고 있어서 아쉽기만 합니다.
2010년 어간의 일입니다. 대강당 옆의 긴 계단을 올라서 음악대학으로 진입하다 보면, 자동차들의 빈번한 운행이 보행자들을 위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막혀 있는 낮은 담벼락을 터서 인도로 만들 것을 총무처에 제안했습니다. 그때 만든 인도가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안전한 길이 되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연세의료원에서 보직할 때입니다. 금화터널 방향으로 가던 차들이 세브란스 병원이나 장례식장으로 유턴할 때, 방향이 헷갈려 머뭇거리는 차들로 인해서 따라오는 차들이 충돌할 뻔한 것을 몇 번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방향 표지를 만들어 교통을 수월하게 할 것을 사무처에 제안했습니다. 그 결과 바닥과 전면에 표지를 만들어 지금은 머뭇거리는 차를 볼 수 없게 되어 감사할 뿐입니다. 최근 2023년 가을에는 간호대학 앞 도로의 표지판이 날카로워 누구라도 부딪히면 다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간호대학 사무실 팀장에게 연락해서 보행자가 위험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하면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지금 그 표지판은 삼각 둘레에 스펀지를 싸서 전혀 위험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쏟으면 우리가 생활하는 캠퍼스는 더욱 안전하고 편안한 캠퍼스로 탈바꿈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창영 총장님 시절, 정 총장님께서 아침 일찍 캠퍼스를 산책하시며 학교를 둘러보시다가 쓰레기를 직접 집어서 치우시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학교의 최고 어르신께서 작은 일조차 소홀히 하지 않음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달란트 비유에서 달란트를 맡긴 주인이 달란트를 잘 관리한 종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 동일한 말로 칭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존경하고 사랑하는 연세가족 여러분, 작은 일에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큰일을 하겠다고 벼르기보다 그때그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보직에 대해 욕망을 갖거나 보직을 권력처럼 생각하는 것은 연세공동체를 망가뜨릴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연세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며 우리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연세의 선교사와 선각자들, 선배들의 정신과 헌신을 배워서 실천할 때, 우리는 감동적인 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이 작은 일에 충성하기로 결심하는 여러분 한 분 한 분과 여러분이 섬기시는 기관 위에 언제나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