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세대학교에서 7, 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기독학생회(SCA)가 사라진 지 10여 년만에 동문들의 열정과 후원으로 재출발하게 되었다.
감사가 넘치는 이 공식적인 날(2025.5.16.)의 기념 예배에서 설교. 그 설교문을 공유합니다.
<남은 자를 다시 모으리라>
“야곱아, 내가 기어이 너희를 다시 모으리라. 살아남은 이스라엘 백성을 기어이 모아오리라. 사람만 보여도 술렁거리는 양떼들을 한 돌담 안에 모으듯 하리라. 한 목장에서 풀 뜯기듯 하리라.”(공동번역성서 미가 2:12)
2000년 9월 제가 교목실의 교수로 처음 임용되었을 때, SCA의 지도교수는 박명철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분은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셨고, 교목실장을 역임하셨으며,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의 기독교윤리학자로서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SCA의 지도교수로서 손색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때까지 교목실은 보수적인 성향의 선교단체들로 구성된 ‘연세기독학생연합회’(소위 연기연) 학생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고, SCA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도를 아끼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의 기억으로 당시 중앙동아리로 위치하던 SCA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던 학생들의 수는 다섯 명 내외였습니다. 동아리 간사로는 SCA 출신으로서 사회복지학과 동문이었던 강정모 간사가 수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일도 병행하고 있었기에 SCA에 올인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생활을 시작하던 1978년만 해도 SCA는 우리 연세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대표적인 동아리였고, 신학과 선후배 동기들 가운데서 가장 많이 참여하는 동아리였습니다. 당시 SCA에는 기라성 같은 회원들이 많았고, 회원들 간의 결속력 또한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00년 9월 교목실 교원으로 출발한 저는 학생담당 교목으로서 과학관에서 개강예배를 드리던 연기연 학생들을 품기로 작정하고, 연기연과 교목실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열정을 기울였습니다. 저는 2000년 종강예배부터 연기연의 공식적인 예배를 루스채플 예배실에서 드리도록 주선했고, 연기연 임원들, 간사들과는 ‘신입생신앙수련회’를 계획하여 교목실 이름으로 매년 개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교목실과 연기연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자, 저의 과제는 연기연과 SCA를 아우르는 새로운 기독학생 조직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소수이기는 했지만, SCA 학생들이 대강당 2층의 동아리 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003년의 일인데, 그때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연기연 학생들이 SCA를 기독학생 동아리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저 진보적인 학생운동 단체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SCA 학생들 역시 연기연 학생들을 함께하기 어려운 답답한 상대라고 치부했습니다. 결국 기독학생들의 연합을 위한 새로운 조직은 좌절되었고, 그러는 사이에 SCA는 동아리 방을 다른 동아리에게 내어주고 사라졌습니다. 심히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SCA의 사라짐을 안타까워하던 동문들께서 SCA를 재건하기 위해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습니다. 드디어 오늘 재학생과 동문이 함께 모여 재건을 감사하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 이루어져서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수고하신 모든 분과 기쁨으로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교목실 입장에서 볼 때도, 보수적인 기독 학생들 일색으로 구성된 연기연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으리라는 점에서, 그리고 보수와 진보가 서로 균형점을 이루며 상호 도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아마도 SCA 출신의 동문들께서 재학 시절 SCA에서 경험했던 삶의 도전들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SCA에서 만난 삶의 동지들이 인생의 귀한 선물이었음을 고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의 자신은 SCA에서 배운 개혁적 신앙 위에서 형성되었음을 자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 연세의 SCA 동문들께서는 과거의 SCA를 단지 복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재학생 후배들이 SCA의 전통을 잘 계승하여, 시대에 걸맞는 새 사명을 올바로 인식해서 사회변혁에 크게 공헌하기를 원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SCA의 재건, 우리 모두의 가슴을 벅차게 하는 사건으로 연세는 물론이고 한국 사회에도 희망을 주는 전기가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남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초창기 인류가 죄악 가운데 있을 때, 게다가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실 때, 왜 사람을 만들었나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만큼은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서 흠이 없는 사람으로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해서 노아와 그 가족들을 보호하셨고, 그들을 남은 자로 삼아서 새로운 인류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과 왕후 이세벨에게 맞서 바알 선지자 450명을 진멸한 후, 이세벨 왕후의 보복이 두려워서 도망갔을 때 이야기입니다. 엘리야가 “나만 홀로 남았는데 그들이 내 목숨을 찾는다.”라며 절규하자,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 이스라엘 사람이 아직 남아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엘리야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수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귀하게 여기는 남은 자들을 언제나 보호하시며, 그들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강대국 아시리아에 멸망하고, 유다가 강대국 바빌로니아에 멸망한 후, 포로로 잡혀갔을 때, 12지파 이스라엘 후손들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왕과 귀족들, 부자들은 재산을 강탈당했고, 노예로 살아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일부의 고위 권력자들은 눈이 빠지고, 사지가 잘려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누구도 그러한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예상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처럼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키는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 가운데 느헤미야를 지도자로 택하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를 향해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구약성서의 남은 자들을 보면서 대다수 사람이 죄악을 범하며 살고 있을 때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다수 사람이 절망하고 포기하며 살 때라도, 용기를 지니고 희망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다수 사람이 진리를 외면하고 예와 아니오를 임의로 말할 때라도, 진리에 상응하면 ‘예’라고, 진리를 거스르면 ‘아니오’라고 단호히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다수 사람이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살 때라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마 7:13-14)
우리는 역사를 올바로 이끌었던 사람들이 언제나 남은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틀러 정권 아래서 독일교회 다수는 히틀러를 아리안 민족의 메시아로 선전했고, 히틀러의 잔학한 전쟁과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침묵했습니다. 그러나 마틴 니묄러 목사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와 같은 고백교회 진영의 소수 인사들은 히틀러를 반대하며 저항했습니다. 미치광이 운전사를 끄집어 내리기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암살단에 가담했습니다. 저는 한 사진을 보고, 전율할 만큼의 감동과 도전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모두가 손을 들어서 ‘하일 히틀러’를 외칠 때, 어떤 한 사람이 두 눈을 부릅뜨고 히틀러를 바라보기만 하는 그 사진에서 ‘불의에 저항하는 양심자’로서의 남은 자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제주 4.3 당시 서북청년단을 비롯하여 국가 공권력, 경찰과 군대 구성원의 대다수가 무고한 주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할 때, 평화적인 해결을 시도했던 김익렬 연대장은 남은 자였습니다. 주민학살을 잔학무도하게 지시한 박진경 연대장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당해야 했던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남은 자였습니다. 경찰들 가운데서 ‘예비 검속자들’에 대한 학살을 거부했던 문형순 경찰서장은 남은 자였습니다. 서북청년단의 일원으로서 무고한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서 혼신을 다하며 노력했던 고희준 단원 역시 남은 자였습니다. 제주 4.3이라는 극악한 상황 속에서도 남은 자는 예외 없이 존재했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당시 노동자들이 저임금 정책으로 일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인권을 무시당하며 착취당할 때, 언론과 대다수 지식인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노동자들의 권리를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동청조차도 노동자들의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그리스도인 전태일 열사는 자기보다 어린 노동자들을 격려하며, 스스로 노동법을 배워 노동 현장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결국 그는 노동자가 기계가 아니라 외치며 노동의 열악한 현실을 분신으로 고발한 남은 자였습니다.
우리의 현대사를 보면, 이승만 독재정권과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시절, 12.12 군사쿠데타의 주역 전두환 군사독재정권과 그 연장선에 있었던 노태우 군사정권 시절, 그리고 최근 12.3 친위쿠데타로 파면에 이른 윤석열 검찰정권 3년 동안, 대다수 권력자와 그 측근은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를 내세우고, 법을 임의로 적용하며 독재를 정당화했습니다. 그러나 부패한 권력의 정치적 탄압 속에서도 민주주의와 사회정의, 인권 보호를 외치며 저항한 소수의 남은 자들이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그들의 예언자적인 외침과 저항으로 인해서 지금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K-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SCA 재건 감사예배에 참석하신 동문과 재학생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남은 자들로 부르셨습니다. SCA라는 돌담 안으로 다시 모으셨습니다. SCA라는 목장 안에서 사랑과 정의, 평화의 풀을 뜯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셨습니다.
여러분은 SCA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남은 자들의 역사를 새롭게 쓰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이자 특별한 선물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이 남은 자임을 자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해서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해야 합니다. 모두가 황금에 눈이 멀어 있더라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모두가 예수를 금관 안에 가두어 자신의 욕망만을 얻으려 할지라도, 여러분은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직시하며 그를 따르는 작은 예수로서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짙은 어두움 가운데 머물러 있을지라도, 여러분은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의 빛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모두가 ‘주여, 주여’를 외치며 부활의 영광만 누리려 할지라도, 여러분은 스스로 감당할 고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걸머지고 희생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남은 자로 살 것을 결단하는 SCA 재학생과 동문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언제나 함께하기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 정종훈 목사 (연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