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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기독교인들이 날뛰는 한국교회 상황에서 신학자들 신학운동의 방향 - 정종훈 (연세대학교 교수) 1. 극우 기독교인들의 부끄러운 현주소 :

ree610 2025. 3. 23. 20:12

극우 기독교인들이 날뛰는 한국교회 상황에서 신학자들 신학운동의 방향

- 정종훈 (연세대학교 교수)

1. 극우 기독교인들의 부끄러운 현주소

지금 우리 한국 사회가 매우 혼란하다. 혐오와 분열이 난무하고,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부분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정국이다.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 되어야 할 한국교회는 표류하고 있다. 아니 수동적으로 표류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12.3 계엄과 탄핵 정국을 거치는 동안 극우 기독교인들의 반민주적이고 폭력적인 민낯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법질서를 무시하고, 폭력을 사주하거나 돌격대가 되고 있다.

광화문에서는 전광훈이 태극기 집회를 주도하며 극우 기독교를 구성하고 있다. 그는 더 이상 목사가 아니다. 그는 2016년 20대 총선 당시 사랑제일교회를 주축으로 기독자유당을 창당했고, 21대 총선에서 기독자유통일당과 국민혁명당을 거쳐 22대 총선에서 당명이 바뀐 자유통일당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자유통일당은 반공주의와 이슬람 혐오, 반동성애를 강령으로 하는 전형적인 극우 정당이다. ‘기독’의 이름을 뺏다고 해서 일반 정당으로 전환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 연고주의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전광훈은 8개 사업장에서 대표 또는 임원을 맡은 딸을 통해서 10여 개의 사업장을 운영하는 빅브라더로서 노인들을 가스라이팅 해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다단계 사기꾼일 뿐이다.

여의도에서는 손현보가 ‘SAVE KOREA’ 집회를 주도하며 극우 기독교의 또 다른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는 보수적인 고신교단의 목사이지만 “기도로 위험에 빠진 나라를 구하자”라는 기치 아래 ‘목사의 도’를 벗어나고 있다. 그는 교회의 예배와 설교를 왜곡하고 있다. 설교는 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비난하는 정치선전이다. 설교 제목이 가관이다. “이재명이 죽어야 대한민국이 산다”, “이재명 치하에서 배급받고 살지 않으려면 일어나 항거하라!”, “작은 행동 위대한 역사, 이재명은 끝났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회의 이름으로 지역을 바꾸어가며 윤석열 탄핵 반대 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는 1980년 민주화 항쟁의 성지인 광주에서조차 극우 집회를 개최할 정도로 안하무인이다.

신학자들 가운데도 극우 기독교 집회에 등단해서 목소리를 키우는 극우적 인사들이 있다. 윤석열은 흑암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큰 빛을 비추어서 대한민국을 빛의 나라로 바꿀 수 있는 예수에 버금가는 인물로 주장했던 장신대 김철홍 교수가 있다. 최근 “이재명 대표 암살계획의 성공을 빈다”는 장신대를 은퇴한 소기천 교수가 있다. 3월 15일 광화문 태극기 집회에는 영락교회 담임목사였다가 갈보리교회를 세운 91세의 박조준 목사까지 나와서 “정치에 관심이 없었지만 최근의 사태가 심상치 않다. 지금 벌어지는 싸움은 지역 간 갈등이 아니라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 대결이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라고 역설한 바 있다.

2. 극우 기독교에 동조하는 대형교회 목사들과 침묵하는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대형교회의 적지 않은 목사들은 극우 기독교인 선동자들에게 심정적으로 동조하거나 실질적으로 지원했다. 그 결정체가 2024년 10월 27일 종교개혁기념주일, 광화문과 시청 일대에서 개최된 ‘악법 저지를 위한 2백만 연합예배’였다. 차별금지법과 동성애 반대를 목적으로 한 연합예배였다고 말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는 목적도 잠재하고 있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와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가 공동대회장으로서 물적 지원과 교인동원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행사를 주도한 주요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수치스럽다. 학력을 위조해서 구설에 올랐고 교회 불법 건축의 시정명령을 외면해 온 오정현 목사, 정부의 코로나 정책을 반대하며 문재인 정부와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지속적으로 비난하는 손현보 목사, 800억 원의 비자금을 만들어 불법으로 교회를 세습했고 여전히 상왕 노릇을 하는 김삼환 목사, 대학을 운영하며 60억 원을 횡령했고 그 때문에 감옥생활을 했던 장종현 목사, 역대 보수정권 대통령들의 멘토를 자처하며 어느 대학교에다 자기 흉상을 설치한 김장환 목사 등이 행사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들은 시대적인 문제에 대해서 예언자적 사명을 외면하고 값싼 은혜만을 남발해온 부류들이다.

이들 대형교회 목사들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서는 후보자 시절 이래로 무속 또는 신천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간과하며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태원 참사 1주기 때는 유가족과 전혀 상관없이 기획된 예배를 위해서 윤석열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교회에 방문한 것을 환대했다. 국회의원 총선거 10일 전 부활절 예배가 개최되는 명성교회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총선지지를 호소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국가조찬기도회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을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로 치하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당한 주일에는 용산 대통령 관저를 방문해서 위로하는 예배를 드렸고, 감옥에 수감됐을 때는 성경책을 넣어 주며 격려했다. 이렇게 윤석열 대통령에게 기독교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주고, 기독교가 그를 지지하고 환영하는 것처럼 연출한 것은 보수정권 친화적인 대형교회 목사들이었다.

사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은 곧 한국교회에 대한 탄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의 대다수 목회자는 침묵하고 있다. 정치 현실에 대한 예언자적인 설교가 교회에서 금기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대다수 목회자는 이미 극우 기독교의 아젠다인 동성애 마녀사냥과 빨갱이 이념, 윤석열 대통령 지지에 길들여져 있어서 스스로 자신의 설교를 검열하고 있다. 아니 극우 기독교의 아젠다에 익숙해진 교인들을 고려해서 자신의 목회 생명을 위해서 자제하고 있다. 한국교회 개신교 신도의 수를 870만 명이라고 말하지만, 이 가운데 100만 명 이상이 사이비 이단에 속한 신도들이고, 200만 명 이상이 가나안 신도들이라고 추정한다면, 한국 개신교의 실제 신도는 500만 명은 될까 모르겠다. 문제는 아직 바닥을 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한국교회와 개신교인들에 대한 비개신교인들의 신뢰도를 보면 14%가 되지 않는다. 가톨릭 48%, 불교 51%, 원불교 18%에 비추어 볼 때, 11%인 천도교보다 조금 높은 수준인데, 한국의 비개신교인들이 개신교로 개종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한국교회는 교회 세습과 성 스캔들, 경쟁적인 개교회주의 등의 문제들로 인해서 세상의 상식보다 저급한 수준에 있다.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기보다는 세상이 오히려 교회의 소금과 빛이 되어 주객이 전도된 양상이다. 이러한 한국교회가 과연 극우 기독교와 극우 기독교인들을 정리할 만한 자정능력이 있을까. 이것이 작금의 한국교회가 당면한 과제이다.

3. 한국교회의 흑역사와 기독교 정체성이 왜곡된 개신교인들

일본 제국은 1930년대 중반 이래로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신사참배는 일본의 신도(神道) 의식으로, 일본 천황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상징하는 행위였다. 이는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과 충돌하는 것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적지 않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탄압받았지만, 결국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도, 조선감리교 연회도 신사참배를 국가 의례로 허용할 것을 결의했다. 일본의 압박과 협박, 교회 재산의 몰수, 목회자 투옥 등 강압적인 상황에서 결의한 것이었지만, 신학적 정체성을 포기한 것이었다. 1941년 일본 제국주의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을 때, 한국교회는 일본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서 기도회를 열었고, 전쟁 채권을 구매하도록 권유했으며, 심지어 젊은 신도들에게 학도병이나 정신대로 나갈 것을 독려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제국주의의 도구로 전락해서, 신앙 공동체로서의 정의와 평화의 사명을 저버렸지만, 그 과오를 철저히 청산하지 못했다.

1946년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 대학부와 청년부 소속 회원들을 주축으로 극우 반공단체인 서북청년단을 결성하는 것을 격려했다. 이 단체는 북한에서 재산을 몰수당하고, 신앙의 자유를 억압당한 월남한 기독교인 청년들이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좌익세력과 대립했고, 이후 한국 사회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확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제주 4.3에서 무고한 시민들에게 가한 그들의 폭력과 잔학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이들의 폭력적이고 잔학한 행위를 묵인하거나 간접적으로 지원함으로 기독교의 사랑과 평화의 가치를 저버렸다. 그후 한국교회는 자기 내부에 똬리를 튼 반공주의를 통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고, 신앙공동체로서의 본질을 잃으면서 오히려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다.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산실이 되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과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진압하고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이 된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시기에 한국교회는 군사독재 정권과 밀접히 관계 맺으며 자기 이해관계를 추구했다. 군사독재 정권은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 단체를 통제하는 동시에 활용했다. 교회 지도자들을 포섭했고, 정치적 지지를 요구했다.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군사독재 정권과의 협력을 통해 정치적, 경제적 혜택을 얻기도 했다. 국가 발전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교회의 목표와 일치하기나 한 것처럼 선전했다. “잘 살아보자”는 정치적 구호에 비판없이 합류했다. 군사 독재 정권에 맞서서 민주화와 인권을 외친 예언자적 목소리가 교계 내부에 일부 있었지만, 주류 교회는 이들을 ‘정치꾼’이라 비판하며 배제했다. 또한 한국교회는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로 출발한 ‘국가조찬기도회’를 통해서 군사 독재자들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했다.

한국교회 초창기 ‘조선예수교연합 공의회’로 출발한 공교회 기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한국교회의 대표성을 갖고,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해서 민주화와 인권, 통일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1988년 2월 29일 발표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선언’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보루 역할을 한 한국교회 다수와 달리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주장함으로 사회적인 경종을 울렸다. 많은 보수적인 교회 인사들과 단체들이 반발하며 ‘좌경이다’, ‘종교적 이단이다’라고 비판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직선제 선거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여전히 군사정권의 연장선에 있었다. 그때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NCCK의 진보적 성향을 견제하기 위해서 보수적인 기독교 기관을 만드는 데 한몫했다. 안기부가 지원한 수억의 기금으로 창립된 것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었다. 창립 이래로 한기총은 보수적 교회의 입지를 강화하고 진보적인 목소리를 억압했다. 지금 한국교회는 진보성향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중도성향의 ‘한국교회 총연합’(한교총), 보수성향의 ‘한국교회엽합’(한교연), 극우성향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로 분열되어 경쟁 관계 가운데 있다.

한국교회의 이러한 흑역사를 거쳐온 한국 개신교인들은 삼박자 구원류의 샤마니즘적인 복을 추구하느라, 다른 사람들에게 복의 통로로 작용하는 복을 외면하고, 자기에게 배타적으로 주어지는 복에 집착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관되게 표현되어야 하는 생활신앙으로서의 기독교 신앙을 외면하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액세서리와 같은 신앙생활에 안주하고 있다. 세상에서 법(헌법, 법률, 시행령 등)이 충돌할 때 상위법을 우선으로 하는 것과 달리, 신앙인의 정체성 위에서 사랑과 정의와 연대의 보편적인 가치를 외면하고, 정당과 진영의 정체성 위에서 특정 이념을 주장하고 있다. 관계성으로 나아가는 정체성과 이웃사랑으로 나아가는 하나님 사랑을 외면하고, 전투적인 배타성에 함몰되어 있다. 한국교회 개신교인들의 이러한 신앙적 삶의 행태는 과거 역사 속에 벌어졌던 교회의 과오에 대한 철저한 참회를 요구하고 있다.

4.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하나님 중심주의와 예수의 제자도

한국의 개화기 당시 한국교회는 양반과 상놈, 천민이라는 신분 차별사회에서, 그리고 여성을 차별하는 남성 가부장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 인간 존엄의 민주주의 토대를 마련했다. 3.1 운동 당시 한국교회는 민족의 자주독립과 사해동포적 평화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3.1 운동을 확산하는 통로로서 역할했다.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한 주요 인사들 김구, 이승만, 김규식, 이동녕 등의 면면을 보면 개신교 신도들이었고, 특히 임시정부의 기초 이념이라 할 수 있는 개인, 민족, 국가 간의 균등과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핵심으로 하는 삼균주의를 주창했던 인물은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던 조소앙이었다.

소수이지만 한국교회는 박정희 유신 독재정치에 저항해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증진하고자 노력했고,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인사들의 피난처였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에는 산업선교회를 조직하여 노동자들의 노동 3권을 대변했고, 민중신학을 통해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당파성을 견지했다. 또한 한국교회는 분단을 정권 안보의 차원으로 악용하던 군사 정권 아래서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했고, 통일운동을 선도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다수의 교회와 목회자가 군사독재 정권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동조할 때 소수의 선각자적인 개신교 인사들과 목회자들이 남은 자로서 예언자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소금과 빛으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중심주의와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에 충실할 때였다. 지금 교계의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전인수격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편으로 도구화하기보다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편이 되도록 도구로 내어드리는 것이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신 5:32, 17:11)고 했던 것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게 우선권을 두라는 지침이었다. 예수의 말씀으로 표현한다면,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 6:33)는 것이고, 바울의 가르침으로 표현한다면, “너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전 10:31)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수주의자들만의 하나님도, 진보주의자들만의 하나님도 아니시고, 모든 인간이 당신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하나님이시다. 사실 좋은 것을 지키자는 보수나, 잘못된 것을 바꾸자는 진보, 보수와 진보의 중간에서 경우에 따라 처신하는 중도는 인간의 유익한 삶을 위해서 모두 필요하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보수와 진보와 중도는 인간 공동체에 어떤 형태로든 공헌할 수 있기에 한국교회는 민주주의 질서 안에서 보수와 진보와 중도가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며 나아가게 하는 역동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제자로서 그를 따르기 위해 주시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무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왕은 하나님께 위임받은 권력으로 백성들 위에서 다스렸다. 그러나 그는 그 권력으로 백성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존재가 되었다. 구약의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죄를 해소하기 위해 동물이나 곡식을 제물로 삼아 제사를 집례했다. 그러나 그는 제사를 빌미로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하며 자기 생업의 도구로 삼았다. 구약의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전하는 대언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전한 말씀 그대로 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왕으로 오셨으나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신 왕이었다. 예수께서는 제사장으로 오셨으나 동물이나 곡식을 도구로 한 제사장이 아니라 자기 몸을 대속물로 드린 제사장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 오셨으나 말씀 그대로 사신 언행일치의 예언자이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무를 체화시켜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을 섬기는 왕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계급과 계층의 양극화를 해소하고 더불어 살도록 화해시키는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증오와 반민주가 팽배한 세상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정의·평화·생명을 옹호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렇게 살아낼 때,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기쁨이자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5. 한국교회가 확장해야 할 새로운 에큐메니칼 운동

에큐메니칼 운동은 다양한 교파와 전통 간에 일치와 협력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이 운동의 핵심 원칙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 모든 것에서는 사랑을!”이라는 구호로 요약할 수 있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와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에서는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이외의 예배 형식과 다양한 전통은 상호 인정함으로 자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어떤 일을 도모할 때는 분열과 갈등을 넘어서 서로 사랑하며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시민들에게 혐오가 아닌 사랑을, 배제가 아닌 환대를, 그리고 차별이 아닌 연대를 도전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에큐메니칼 운동을 교단과 교파 간, 가톨릭, 개신교, 성공회, 정교회 간의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제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이 모든 에큐메니칼 운동의 원형인 것은 틀림없지만, 더욱 성숙한 에큐메니칼 운동을 위해서는 그 범주를 확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는 종교 간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 세계의 주요 종교들이 보편적인 공공선을 이루기 위해서 한마음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둘째는 목회자와 평신도 간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계급적인 상하 관계가 아니고, 각자의 은사와 직업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동역자로서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동양과 서양, 남반부와 북반부를 뛰어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으로 서로를 폄하하지 않고, 부유한 북반구와 가난한 남반구가 지구적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서로 연대하는 것이다. 넷째는 성적 지향 간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이성애자가 다수인 세상에서 소수자인 동성애자들을 정죄하지 않고, 성적 지향의 차이를 인정하고 책임적인 성의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장애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장애가 불편한 것이지만 차별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더불어 사는 인간 공동체를 함께 만드는 것이다.

여섯째는 원주민과 이주민 간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원주민도 언젠가는 떠도는 나그네였고, 원주민 이전의 원주민에게 환대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원주민으로 살고 있지만, 원치 않는 상황으로 인해서 이주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주민은 이주민에 대해서 적대감을 해소하며 환대하고, 이주민 역시 원주민을 정복할 대상이나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친구로 삼자는 것이다. 일곱째는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칼 진영 간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복음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진영과 복음의 관계성을 강조하는 에큐메니칼 진영은 복음의 양면을 보여준다. 두 진영은 서로를 통해 자신의 장점을 객관화할 수 있고, 자신의 약점을 보충할 수 있다. 복음은 언제나 정체성에 기인한 관계성이자 관계성을 지향하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6. 하나님의 나라와 의의 구현을 꿈꾸는 신학자들이 전개해야 할 신학운동의 방향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나라,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인 사랑과 정의와 평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 생명과 청지기인 인간이 책임지며 공존해야 할 생태 생명의 보전 등은 모든 신학자가 직시하고 구현해야 할 과제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회의 목회자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자들이 자기 과제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신학자가 자신의 과제를 책임있게 감당하기 위해서 주시해야 할 것은 신학자 자신의 정체성이고, 신앙 공동체인 교회이며, 삶의 자리인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로, 책임에 민감한 신학자는 자신의 신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강화해야 한다. 자기 분야의 전문성 위에서 국내외의 학문적 결과를 섭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학문적 결과물을 인지하는 수준을 넘어서 우리의 교회 현장과 삶의 자리에 창의적으로 접맥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현실의 구조적인 모순에 순응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겠다는 남은 자로서의 자긍심 속에 함께할 수 있는 동료 신학자들과 연대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상호 토론의 장으로서의 포럼을 개최하고, 그 결과를 공유할 학술서의 제작은 당연한 일이다.

둘째로, 책임에 민감한 신학자는 한국교회의 개혁과 새로운 교회의 구성을 도모해야 한다. ad fondes reformanda 운동과 새 술은 새 부대에 붓는 운동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 아직 존재하는 교회를 폐기 처분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다. 개신교회는 일회적으로 개혁된 교회가 아니라 언제나 자기 개혁을 실천하는 개혁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병들어 있고, 썩어 문드러져 있다. 병을 치료하고, 썩어 문드러진 부분을 도려내야 한다. 자체적인 환골탈태의 노력을 다해 건강성을 회복해야 한다. 동시에 한국교회는 기존의 교회와는 다른 형태의 대안적인 교회, 대안적인 교단을 창출해야 한다. 200만 명 이상의 가나안 신도들이 기존 교회에 대한 실망의 이유로 떠난 것이므로 그들이 기존 교회로 다시 복귀한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이들이 헤쳐모일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야 하지 않을까. 목사의 이중직과 6년 주기의 신임투표, 교회 직분의 임기제와 전체 예산 50%의 사회선교기금 배분, 뜻을 함께할 수 있는 교회들의 연대와 새로운 교단의 구성 등이 대안적으로 필요하다.

셋째로, 책임에 민감한 신학자는 사회 대전환을 위한 공공신학 정책을 개발하기 위한 활동을 모색해야 한다. 독일개신교협의회(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EKD)는 공공신학위원회를 두고, 교회가 사회적, 정치적,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 신학적 입장을 정립함으로 공공 영역에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공공신학위원회는 독일 교회와 사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신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신학자, 교회 지도자, 윤리학자, 사회과학자, 현장 실무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되며, 이들은 신학적 깊이와 현실 문제에 대한 이해를 결합하여 공공 영역에서 교회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탐구하고 있다. 공공신학위원회는 기후 변화, 이민 문제, 사회적 불평등, 전쟁과 평화 등과 같은 긴급한 사안에 대해서는 성명서나 논평의 간략한 형식으로 교회의 입장을 발표하기도 한다. 문제에 대한 중장기적 대안으로서 교회와 사회정책 결정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심도 있는 토론과 연구의 과정을 거쳐 사회백서와 교육서를 제작한다. 공공 신학의 중요성을 알리고,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도록 교회 지도자와 평신도를 대상으로 교육 프로그램과 세미나를 개최한다. 공공신학위원회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생명 윤리, 기술 윤리, 경제 윤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독교 윤리적인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남북 간에, 그리고 한국사회 내부적으로 대립과 증오, 갈등이 넘치는 상황에서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빛의 혁명을 주도하는 젊은 응원봉 세대와 호흡하기 위해서,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에 공공신학적 노력을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책임있는 신학자들의 절실한 과제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