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9월 10일 제27회 조선장로교총회는 신사참배에 굴복하였다. 본래 신의주에서 모이려던 총회는 평양 서문밖교회로 옮겨졌고, 삼엄한 분위기에서 9월 9일 개회되었다. 참배의 요구에 굽히지 않고 강하게 저항하는 대의원들은, 이미 구금되었으니 참석할 수 없었다. 부득이 끌려오다시피 참석한 총대는 목사 88인, 장로 88인, 선교사 30인 모두 206명이었다.
10일 오전 10:50에 준비된 대로 긴급동의와 제청으로 신사참배 안건이 상정되었다. 회장 홍택기 목사는 “이 안건이 가하면 예라고 대답하십시오”라 물었는데, 제안자 등 10명도 안 되는 대표들만이 “예”라고 대답을 했다. 의장은 서둘러,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음을 선포하였다. 반대의견을 묻지 않은 절차상의 하자를 두고서 항의하다가, 퇴장당한 선교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바로 신사참배를 실행하자는 안이 채택되었다. 부회장 김길창을 필두로 노회장들은 평양신사에 가서 절하였다. 아래의 사진이 참배하는 23인 대표들이고, 당시 총회 임원들이다.
신사참배 문제는 해방 이후 장로교가 분열하는 원인으로 작동하였다. 세 차례나 반성하며 취소한다고 결의하였지만, 진정성 있는 회개가 되지 못한다는 반론을 잠재우지 못하였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이에 대한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친일이라는 오욕의 역사를 제때에 청산하지 못한 우리 현대사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 김인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