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창조절 3주) 주일 설교 자료
글쓴이 : 조헌정, 참고:『Feasting on the Word』(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9월 첫 주부터 적용한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부활은 깨어진 세계를 지금껏 해석하고 움직여 온 거짓 이론과 폭력적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이기에, “부활은 우리 모두를 반역자로 만든다”. 부활과 함께 새로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이라는 부조리를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부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본문]
잠 1:20-33; 시 19; 약 3:1-12; 막 8:27-38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잠 1:20-33}
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그 소리를 높이며,
21 시끄러운 길머리에서 외치며, 성문 어귀와 성안에서 말을 전한다.
22 "어수룩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어수룩한 것을 좋아하려느냐? 비웃는 사람들아, 언제까지 비웃기를 즐기려느냐? 미련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지식을 미워하려느냐?
23 너희는 내 책망을 듣고 돌아서거라. 보아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보여주고, 내 말을 깨닫게 해주겠다.
24 그러나 너희는, 내가 불러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내가 손을 내밀어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25 도리어 너희가 내 모든 충고를 무시하며 내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26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비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운 일이 닥칠 때에, 내가 조롱하겠다.
27 공포가 광풍처럼 너희를 덮치며, 재앙이 폭풍처럼 너희에게 밀려오며, 고난과 고통이 너희에게 밀어닥칠 때에,
28 그때에야 나를 애타게 부르겠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겠고, 나를 애써 찾을 것이지만, 나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29 이것은 너희가 깨닫기를 싫어하며, 주님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30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내 모든 책망을 업신여긴 탓이다.
31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제가 한 일의 열매를 먹으며, 제 꾀에 배부를 것이다.
32 어수룩한 사람은 내게 등을 돌리고 살다가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사람은 안일하게 살다가 자기를 멸망시키지만,
33 오직 내 말을 듣는 사람은 안심하며 살겠고,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히 살 것이다."
[신학적 관점]
잠언서는 단지 우리말의 사자성어와 같이 옛 선조들의 삶의 지혜들을 모아놓은 책이 아니다. 물론 시작은 그러했지만, 후대에는 신학화 작업이 일어나면서 제1성서에서 지혜는 창조의 신인 YHWH를 대리하는 일종의 여신(女神, Lady Wisdom)과 같은 지위를 갖는다. 그리하여 지혜신학(Wisdom theology)이라는 말이 성립된다. 지혜신학은 창조신학에 기반하여 자신의 노력에 의해 행복을 완성할 수 있다는 헬라철학을 비판한다.
[목회적 관점]
신도들은 구원을 영적인 영역(성전)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 일상의 삶(길거리와 광장. 1절)과 유리(遊離)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안일함(성전 안에 있기에 하느님께서 보호하신다)은 사람을 멸망으로 이끈다(32절).
[주석적 관점]
잠언은 히브리어로 ‘코헬렛’이다. 주로 고유명사로 쓰이고 형태로 보면 여성 분사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원래는 ‘잠언 수집가’를 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에리히 쳉어. 『구약성서개론』 669쪽)
“제 꾀에 배부를 것이다”보다는 “제 꾀에 넘어갈 것이다”라는 번역이 타당하지 않을까?
[설교적 관점]
현대의 컴퓨터공학을 통한 AI 기술은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심지어는 제목만 잘 만들면, 자신이 원하는 최고의 설교문을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과연 수천 년의 인간 역사가 전해오는 ‘지혜의 말씀’들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까? 예를 들면 인류가 직면한 이상기온과 지구파괴의 당면한 위기 앞에서 오늘 본문의 ‘지혜의 말씀’들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주님을 경외(敬畏)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1:7)라는 말씀에서 ‘주님’을 ‘자연계’ 혹은 ‘지구 생명(가이아)’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면 교회의 미래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것이다.
{시편 19}
1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 줍니다.
2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 줍니다.
3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들리지 않아도
4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온 세상 땅끝까지 번져 갑니다.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쳐 주시니
5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이 신나게 치닫는 용사와 같이
6 하늘 이끝에서 나와 하늘 저 끝으로 돌아가고 그 뜨거움을 벗어날 자 없사옵니다.
7 야훼의 법은 이지러짐이 없어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야훼의 법도는 변함이 없어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 준다.
8 야훼의 분부는 그릇됨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야훼의 계명은 맑아서 사람의 눈을 밝혀 준다.
9 야훼의 말씀은 순수하여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고 야훼의 법령은 참되어 옳지 않은 것이 없다.
10 금보다, 순금덩이보다 더 좋고 꿀보다, 송이꿀보다 더욱 달다.
11 당신 종이 그 말씀으로 깨우침받고 그대로 살면 후한 상을 받겠거늘
12 뉘 있어 제 허물을 다 알리이까? 모르고 짓는 죄일랑 말끔히 씻어 주소서.
13 일부러 범죄할까, 이 몸 막아 주시고 그 손아귀에 잡힐까, 날 지켜 주소서. 그제야 이 몸은 대역죄 씻고 온전히 깨끗하게 되리이다.
14 내 바위, 내 구원자이신 야훼여,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야고보서 3:1-12}
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선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인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 우리는 모두 실수를 많이 저지릅니다. 누구든지, 말을 하면서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온몸을 제어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3 말을 부리려면, 그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의 온몸을 끌고 다닙니다.
4 보십시오, 배도 그렇습니다. 배가 아무리 커도, 또 거센 바람에 밀려도, 매우 작은 키로 조종하여, 사공이 마음먹은 곳으로 끌고 갑니다.
5 이와 같이, 혀도 몸의 작은 부분이지만, 일을 할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보십시오, 아주 작은 불이 굉장히 큰 숲을 태웁니다.
6 그런데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입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부분이지만,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의 수레바퀴에 불을 지르고, 마지막에는 혀도 지옥 불에 타 버립니다.
7 들짐승과 새와 기는 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은 어떤 종류든지, 모두 인류가 길들여서 다스리고 있습니다.
8 그러나 사람의 혀는 누구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수없는 악이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9 우리는 이 혀로 주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 또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11 샘이 한 구멍에서 단물과 쓴 물을 낼 수 있겠습니까?
12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무화과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짠 샘이 단물을 낼 수 없습니다.
[신학적 관점]
종교적 가르침이란 뭔가 거룩하고 존귀한 존재에 대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말과 혀’에 대한 본문은 너무나 세속적이다. 어쩌면 말틴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문서’라고 악평한 이유일 것이다. 사실 본문과 같은 말씀은 굳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떠받드는 성서가 아니라도 일반 서적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말씀이다. 그런데 육체 없는 영혼이 죽은 영혼이듯이 생활에서 본이 되지 못하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듯이, 혀를 제어하는 힘은 구원에 이르는 첩경이기도 하다.
[목회적 관점]
필자는 결혼을 앞둔 남녀를 상담할 때, 서로 간에 존경어를 쓸 것은 강조한다. 침묵은 금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서는 친구 사이에 말이 많으면 ‘설교하지 말라!’고 말한다. 필자는 예배 대표기도 이후 약 2분간의 침묵기도를 하도록 하였고, 한번은 아무런 설명 없이 약 20분간 침묵 설교를 진행한 적도 있다. 원고는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모아놓은 십자가를 이용한 일종의 상징이었다.
[주석적 관점]
“그러나 사람의 혀는 누구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겉잡을 수없는 악이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목회를 하는 중 교회 지도자(선생)였던 한 사람의 말로 인해 교회가 파탄에 이르게 된 경험을 한 것 같다.
[설교적 관점]
일상의 삶에서도 그러하지만, 교회에서 말로 인한 상처는 때로 교회를 큰 분란으로 이끌기도 한다. 특히 목사의 말 한마디는 그 영향력이 매우 크다. 오래전 미국에서 신학박사로서 좋은 글도 쓰실 뿐만이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훌륭하신 한 선배 목사께서 헌신적인 목회를 통해 그 지역에서는 가장 큰 교회를 일구셨던 적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인이 운영하는 가게를 심방하는 중에 교인이 비즈니스의 어려움을 자꾸 얘기하자,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아니 돈 백 불 벌기가 그렇게 어렵습니까?’라고 말을 하였는데, 결국 이 말 한마디로 말미암아 목사님은 20년을 섬겨온 그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운 것이다.
격언집의 가장 큰 주제는 ‘말’일 것이다. 말은 인간다움을 특징짓는 가장 큰 특성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가기도 하는 위험성을 갖고 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지만, 말 한마디로 살인을 빚기도 한다. 말에 대한 십계명을 만들어 실천하여 보면 어떨까?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본문과 비슷한 말을 했다. “백성의 윗사람 된 자는 그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정지하며 한 마디 말하고 한 번 침묵하는 것을 아랫사람이 모두 살피어 의심쩍게 탐색하는 법이니, 방에서 문으로, 문에서 고을로, 고을로부터는 사방으로 새어 나가서 온 나라에 다 퍼지게 된다. 군자는 집안에 거처할 때에도 응당 말을 삼가야 하거늘, 하물며 벼슬살이할 때이랴.”(爲民上者, 一動一靜一語一, 在下者, 皆伺察猜摸, 由房而門, 由門而邑, 由邑而達於四境 布於一路. 君子居家, 尙當愼言, 況居官乎.)”
{마가복음 8:27-38}
2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서셨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셨다.
28 제자들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30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흘 뒤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예수께 항의하였다.
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다.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38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신학적 관점]
그간 서구신학에서는 본문의 핵심을 베드로의 신앙고백, 예수의 수난과 부활 예언 그리고 예수의 메시야 비밀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를 교리신학적 관점에서 해석을 하였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고백이 진행되는 상황 곧 장소이다. 빌립보의 가이사랴를 향해 가던 길 위에서 일어났다. 빌립보는 헤롯대왕의 아들로 로마황제가 임명한 분봉왕이다. 가이사는 로마 황제를 뜻한다. 곧 가이사랴 빌립보는 로마 황제를 기념하여 세운 신도시였다. 당연히 정치사회경제의 중심지로서 황제 숭배를 위한 성전이 중앙에 위치했다. 곧 예수의 메시야 고백은 로마제국에 맞서는 정치신학적 맥락 위에 기반한다. 베드로조차 이러한 메시야의 정치적 맞섬을 깨닫지 못함으로 인해 비록 그런 고백을 했다 하더라도 예수에게서 ‘사탄’이라는 극심한 비판을 받는다.
[목회적 관점]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는 매 예배 시 별 뜻 없이 기계적으로 사도신경을 암송한다. 그런데 신앙을 고백하는 목적은 하느님의 일을 사람의 일보다 우선하기 위함이다.
[주석적 관점]
공관복음서 특히 마가복음에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한 사람에게 이를 비밀로 하라는 명령이 여러 번 나온다. 예수는 다른 사람이 다 아는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신학자 브레데는 이를 이런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건 본래 예수에게는 그리스도라는 자의식이 없었고, 부활 이후에 제자들에 의해 그리스도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스스로를 메시야라고 부르는 거짓 예언자들이 여럿 있었다. 사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께서 직접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스스로 말한 적은 없다. 다만, ‘예수’ 대신에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을 대신 내세운다. 38절 또한 그런 경우이다. 30절의 ‘자기에 관하여’에서 ‘자기’는 헬라어로는 autou, ‘그’이다. ‘그’가 예수 자신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브레데는 주장하기를 예수 생전과 부활 이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메시야의 비밀이 후대 복음서 저자들에게 의해 첨가되었다고 보았다.
[설교적 관점]
34-38절은 본문을 다룰 때뿐만이 아니라, 모든 설교의 핵심이자 결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이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인데, 이는 자기를 부인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옳았지만, 그러나 그의 신앙은 잘못이었다. 여기서 신앙고백과 신앙의 내용은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과연 베드로의 신앙에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우리에게는 이런 잘못이 없는가? 이에 대한 답을 찾아보는 것이 설교의 핵심 과제이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