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9월 7일 주일 설교 자료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아 저자들의 핵심 관점만을 뽑아 재해석하였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9월 첫 주부터 적용한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부활은 깨어진 세계를 지금껏 해석하고 움직여 온 거짓 이론과 폭력적 권위에 대한 ‘하느님의 반역’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존재이기에, “부활은 우리 모두를 반역자로 만든다”. 부활과 함께 새로이 창조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고통당하는 자에게 값싼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이라는 부조리를 증언함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부숴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벤틀리 하트)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잠 22:1-2, 8-9, 22-23; 시 125; 약 2:1-17; 막 7:24-37 (표준새번역, 시편은 공동번역)
{잠언 22:1-2, 8-9, 22-23}
1 많은 재산보다는 명예를 택하는 것이 낫고, 은이나 금보다는 은총을 택하는 것이 낫다.
2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다 함께 얽혀서 살지만, 이들 모두를 지으신 분은 주님이시다.
3 슬기로운 사람은 재앙을 보면 숨고 피하지만, 어수룩한 사람은 고집을 부리고 나아가다가 화를 입는다.
4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5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의 길에는 가시와 올무가 있으나, 자기 영혼을 지키는 사람은 그런 길을 멀리한다.
6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않는다.
7 가난하면 부자의 지배를 받고, 빚지면 빚쟁이의 종이 된다.
8 악을 뿌리는 사람은 재앙을 거두고, 분노하여 휘두르던 막대기는 기세가 꺾인다.
9 남을 잘 보살펴 주는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그가 자기의 먹을거리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이다.
10 거만한 사람을 쫓아내면 다툼이 없어지고, 싸움과 욕설이 그친다.
11 깨끗한 마음을 간절히 바라며 덕을 끼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왕의 친구가 된다.
12 주님의 눈은 지식 있는 사람을 지켜보시지만, 신의가 없는 사람의 말은 뒤엎으신다.
13 게으른 사람은 핑계 대기를 "바깥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나가면 찢겨 죽는다" 한다.
14 음행하는 여자의 입은 깊은 함정이니, 주님의 저주를 받는 사람이 거기에 빠진다.
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 있으나, 훈계의 매가 그것을 멀리 쫓아낸다.
16 이익을 탐해서,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사람과, 부자에게 자꾸 가져다주는 사람은, 가난해질 뿐이다.
17 귀를 기울여서 지혜 있는 사람의 말을 듣고, 나의 가르침을 너의 마음에 새겨라.
18 그것을 깊이 간직하며, 그것을 모두 너의 입술로 말하면, 너에게 즐거움이 된다.
19 이는 네가 주님을 의뢰하며 살도록 하려고 오늘 내가 너에게 특별히 알려 주는 것이다.
20 내가 너에게 훈계와 지식이 담겨 있는 아름다운 교훈을 써 주지 않았느냐?
21 이는 네가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서, 너에게 묻는 사람에게 바른 대답을 할 수 있게 하려 함이다.
22 가난하다고 하여 그 가난한 사람에게서 함부로 빼앗지 말고, 고생하는 사람을 법정에서 압제하지 말아라.
23 주께서 그들의 송사를 맡아 주시고, 그들을 노략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시기 때문이다.
[신학적 관점]
잠언서는 일반적으로 일반 백성 곧 가난한 자들을 향한 지혜의 말씀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선택된 본문은 부자들을 향한 경고성 지혜의 말씀이다. 곧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않음으로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는 곧 부자의 청지기 직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 모두가 물질 성공을 향해 치닫는 시장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 이 말씀으로 극심한 빈부격차를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성서 자체가 갖고 있는 근본 곧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의 형상을 띠고 태어났다는 인간 평등성과 YHWH 하느님께서는 주인이었던 애굽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저들의 노예였던 히브리족속을 선택하셨다는 인간 해방성의 전제하에 토라의 핵심인 안식일법과 안식년법과 희년법을 우선할 때, 비로소 본문의 신학적 정당성은 주어진다.
[목회적 관점]
본문을 현대어 열 문장으로 정리하고 이를 교인들의 투표를 거쳐 교인 생활 십계명을 만들어 보면 어떠할까?
[주석적 관점]
고대에도 왕족과 노예라는 계급사회에 기초하여 빈부가 결정되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속담과 같이 노력을 통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어느 정도 주어졌지만, 오늘날은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과 같이 사회적 구조를 깨고 일어서는 일은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다. 성서적 관점에서 깨끗한 부자(淸富)라는 말은 성립할 수 있는가?
[설교적 관점]
현대에 적용 가능한 말씀은 무엇이고 가능하지 않는 말씀은 무엇인가?
4절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 겸손한 사람에게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인가?
6절: 학교에서의 책벌은 금지되어 있지만, 이는 가정에서 허용되는 것인가?
14절은 성적 비하의 구절이다.
22, 23절: 무전유죄(無錢有罪) 유전무죄(有錢無罪)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부장검사 출신이 변호하는 첫 번째 재판은 전관예우(前官禮遇)라 하여 판사들이 변호사에게 매우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관습이 있다. 곧 돈이 재판을 좌우한다. 말씀과는 반대 현상이다.
{시편 125}
1 야훼께 의지하는 자는 시온산과 같으니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든든하리라.
2 산들이 예루살렘을 에워 감싸 주듯이 야훼께서 당신 백성을 감싸 주시리라. 이제로부터 영원히.
3 의인들이 악한 일에 손을 뻗지 않도록, 의인들이 차지한 땅 위에서 악인이 그 왕권을 휘두르지 못하리라.
4 선한 사람, 정직한 사람에게 야훼여, 은혜를 베푸소서.
5 그릇된 길로 빗나가는 자들은 야훼여, 악인들과 함께 그들을 물리치소서. 이스라엘에 평화 있으라!
{야고보서 2:1-17}
1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2 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가락지를 끼고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3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에 서 있든지, 나의 발치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하면,
4 바로 여러분은 서로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6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박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
7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
8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9 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을 받게 됩니다.
10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한 조목이라도 어기면, 전체를 어긴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11 "간음하지 말아라" 하신 분이, 또 "살인하지 말아라" 하셨습니다. 당신이 비록 간음은 하지 않아도, 살인을 하면, 결국 당신은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12 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을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13 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14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신학적 관점]
이는 단순히 가난한 자를 돕는 자비의 행위나 말씀의 실천을 강조하는 말씀이 아니라, YHWH 하느님 자신의 근본 정체성이다. 십계명의 머리말은 분명하게 YHWH 하느님의 정체성을 자유와 해방의 신으로 규정한다. 신학이 추구하는 하느님 구원의 정체는 인간 자유와 해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목회적 관점]
간혹 교회 다니는 일을 그만두었다는 사람들 가운데, 헌금 강조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 직분을 받게 되면 특별헌금을 강요받게 된다. 대부분은 감사하여 내지만, 이를 낼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교인을 고려해야 한다. 야고보서 저자는 아마 목회자였을 것이다.
[주석적 관점]
2절의 ‘여러분의 회당’은 아마도 알렉산드리아의 디아스포라 헬라 유대인 회당이었을 것이다. (Feasting 38)
[설교적 관점]
차별 없는 사회, 차별 없는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덕목이다. 무슨 이유로든지 사람을 차별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형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외면의 모습만이 아니라, 그가 지닌 성품과 특성 곧 내면을 포함한다. 남한 사회나 교회는 여러 분야에서 혈연, 지연, 학연에 따른 많은 차별이 존재하고 있으며 남성과 여성 특히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은 매우 심각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를 ‘헬조선’이라 비하하고 청소년층, 중년층, 노인층 모두 연령 전반에 걸쳐 자살률이 세계 최고이다. 최근의 현상이 아니라, 지난 15년 전부터 변함이 없는 부동의 1위이다. 우리는 하나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외치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을 강조하지만, 이러한 비극이 교회의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어쩌면 우리의 믿음은 야고보 사도가 말한 것처럼 위선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개독교’란 불명예를 안고 빠른 속도로 퇴보하고 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자기 성찰이 필요한 시기이다.
{마가복음 7:24-37}
24 예수께서 거기에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으나,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수로보니게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시기를 예수께 간청하였다.
27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이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28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기를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하였다.
29 그래서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서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다.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오셨다.
32 그런데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33 예수께서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에바다" 하셨다. (그것은 '열리라'는 뜻이다.)
35 그러자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
36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명하셨으나, 말리면 말릴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퍼뜨렸다.
37 사람들이 몹시 놀라서 말하기를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신다" 하였다.
[신학적 관점]
예수가 추구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첫째 인간 사회의 경계를 깨뜨리고 둘째 억눌린 자들의 인권을 회복한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지배-식민의 경계가 있었고, 종교사회적으로는 예루살렘을 중심하여 유대-갈릴리-사마리아-이방인이라는 차별 내지는 금단의 경계들이 있었다. 본문은 당시 가장 천대받고 멸시받는 이방 지역을 예수가 방문한 사건이다.
[목회적 관점]
나의 목회가 갖는 경계는 어디까지이며, 이를 넘어서는 목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목회인가?
[주석적 관점]
이 여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스 사람으로 수로보니게 출신이다. Syro-Phenicia는 지역적으로는 시리아이고 정체성은 페니키아 왕국 출신이다. 마태복음에서는 그냥 ‘가나안’ 여인으로 칭하는데 반해 이렇게 구체적으로 세 개의 지명을 한꺼번에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 여인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여인일 수가 있고, 두 번째는 이방 종교를 강조하기 위함일 수 있고, 세 번째는 이방인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일 수 있다. 필자는 세 번째 견해를 지지하는데, 곧 극심한 인종 차별과 성적 차별을 받는 당시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의 여인이다.
[설교적 관점]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물론 이방인을 개로 비유한 예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실제 예수는 본래 유대인 중심의 구원관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의 믿음을 떠본 것이었을까? 만일 떠보았다가 이 여인이 자존심에 상처를 받아 침을 뱉고 돌아섰다면 그 책임은 여인에게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예수에게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는 떠본 것이라기보다는 예수의 유대 혈연 구원관을 말하는 것이고 이 여인을 통해 그러한 협소한 구원관을 깨뜨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 구원받는 사람은 이 여인이 아닌 예수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를 개로 그리고 부스러기 신앙인으로 여기는 한 여인의 도전을 통해 사회 변두리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 역사의 주역으로 삼으시는 야훼 하느님의 깊은 섭리를 이해할 수 있으며, 저들의 부스러기 신앙이 오히려 온전한 빵을 먹는 우리와 같은 신앙의 기득권자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다고 하는 것이 오늘 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가르침이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신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왜 듣지 못하였을까? 여기서 듣고 말하는 것을 귀와 입으로 생각하면 이는 육체 질병이고 이는 오늘날 정형외과 의사들이 이를 감당하고 있으니 목사가 이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여기서 듣고 말한다는 것은 하늘의 소리를 듣는 것이고 하늘의 소리를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듣지 못한 이유는 오늘날로 말하면 부패한 권력이 언론을 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민중이 억눌려 있는 상황을 말한다. 말 못함도 같은 이유이다. 하늘은 생명의 어버이로서 눌린 자의 아픔에 관심하신다. 듣는 것은 약자의 신음소리이요, 말하는 것은 국가폭력으로 인해 눌려 있던 약자들이 자기 권리를 되찾기 위한 외침인 것이다. 오늘날 남한의 자유언론지수는 해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으며, 검찰 권력은 법의 이름으로 가난한 자를 대변하는 사회정의와 남북화해와 공생통일을 외치는 자들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있다.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


'성서 정과 > 설교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9월 21일 주일 설교 자료 (33) | 2025.07.15 |
---|---|
9월 14일 주일 설교 자료 (12) | 2025.07.15 |
요한계시록 9:13~21 여섯째 나팔 재앙 찬송 350장 우리들이 싸울 것은 Ⅱ. 여섯째 나팔 (계시록 9:12~21) (0) | 2025.07.13 |
요한계시록 8:1~13 성도의 기도와 나팔 재앙! 찬송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Ⅰ. 나팔 소리에 대한 서문 (계시록 8:1-6) (0) | 2025.07.11 |
요한계시록 7:1~17 십사만 사천과 셀 수 없는 무리! 찬송 240장 주가 맡긴 모든 역사 Ⅰ. 하늘의 환상 (계 7:1-12) (4) | 2025.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