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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평화통일주일 예배 설교 : 야곱이 에서를 만나다 (창세기 33:1~11)

ree610 2024. 8. 19. 10:03

남원제일교회 평화통일주일 예배 설교

야곱이 에서를 만나다 (창세기 33:1-11)

사랑하는 남원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여러분을 작년에 이어 1년 만에 다시 뵙게 되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지난 1년 동안 먼발치에서 남원제일교회의 소식을 접하면서 여러분은 남원시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정말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다. 장효수 목사님을 비롯한 성도 여러분과 남원제일교회가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지금 평화통일주일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한 분 한 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위에, 그리고 남원제일교회 위에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몇 년 전, 연세대학교 동료 교수들과 함께 베트남 다낭에 있는 국립외국어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대학 관계자들을 만나 서로의 관심사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그 대학의 부총장이 환영의 인사를 했기에, 격식을 갖추는 차원에서 따로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갑작스럽게 답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엇을 말할까를 잠시 고민하다가, 한국이 베트남에 대해서 사과할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사과의 내용을 담아서 답사하기로 작정했습니다. 한국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베트남 전쟁에 용병으로 참가한 부끄러운 역사가 있습니다. 당시 한국군은 베트남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전쟁 중에 태어난 혼혈아 라이따이한들에 대해 한국인 아버지들 대다수가 자기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더 나아가 코리언 드림을 품고 한국에 온 베트남 노동자들과 결혼이민자들에 대해서 한국인 기업가들과 남편들은 사람다운 대접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의 이런 부끄러운 일들을 나열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다낭 국립외국어대학 부총장을 비롯한 교수들이 한국인에게서 이런 사과를 처음으로 들었는데,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니 오히려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참석한 모두 마음을 열어 큰 감동을 주고받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동생에게 속았던 형, 에서와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동생, 야곱의 만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장자권에 대한 욕심으로 형을 두 번이나 속였습니다. 장자권이란 임의로 주고받을 수 없는 것인데도, 야곱은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을 속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아버지와 형을 속였습니다. 이를 알게 된 에서는 동생을 죽이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크게 분노했습니다. 야곱은 형의 분노를 피해서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갔고, 드디어 20년 후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작정하고 실행하는 중이었습니다. 형 에서를 곧 만나는 상황이 되자, 야곱에게는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형이 자기를 용서할 수 있을까? 형이 자기 가족들에게 보복하지는 않을까? 과연 형과 동거하면서 살 수 있을까?

오늘의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의미있는 만남과 관련해서 몇 가지 중요한 통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친 형제자매나 친척 관계라도,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면, 언제든 분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형의 장자권을 욕심낸 야곱과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축복을 인정하지 못한 에서는 두려움과 살해 동기가 작동하면서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카인과 아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인은 경쟁심에 사로잡혀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결국 카인은 땅에서 유리방황하며 살아야 하는 영원한 분열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과 롯도 더 많은 재산에 대한 욕심으로 혈육임에도 분리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재벌가에서도 유산 분배와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형제자매 간에 분란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산의 규모가 크든 작든, 장례식장에서 유가족들 간에 유산과 부의금 분배로 갈등하고 분열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합니다. 이러한 분열은 언제나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욕심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라고 말했습니다. 최소한의 소유가 충족되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재물인데도, 만족을 모르는 끝없는 욕심 때문에 서로 분열하고, 사망에 이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둘째로, 분열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돌이키는 회개의 용기와 함께 실제적인 만남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형과 만나기 전에 자신이 고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령을 통해서 미리 전달했습니다. 형을 만나기 전에 많은 선물을 보내어서 형의 환심을 사로잡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분열은 언제나 그 자체로써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분열하고, 부부인 그들이 서로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분열한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분열한 것, 부부로서 책임을 회피하고 분열한 것, 그 자체가 죄였습니다. 12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유지하지 못하고,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분열한 것 역시도 이스라엘 민족의 죄였습니다. 마치 지남철의 N극과 S극이 서로를 그리워하며 하나로 결합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처럼, 분열된 상태에서 상대를 향해 돌이키는 용기가 있을 때, 우리는 드디어 만남의 구체적인 자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만남이란 그리워하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야곱처럼 구체적으로 준비해야만, 만난 후에 상호신뢰와 변화의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상호신뢰와 성숙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만남은 준비 없이는 결코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셋째로, 서로 만났을 때는 상대방 앞에 엎드리는 자기 겸손과 상대에 대한 최고의 존경심이 있어야만 의미 있는 만남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자마자 일곱 번이나 엎드려 절을 했고, 심지어 형의 얼굴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야곱은 형 앞에서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며, 형의 선처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잘못이 많았던 야곱은 자기를 주장할 수 없었으며, 오직 형의 은혜로운 처분만을 기다렸습니다. 자기와의 만남을 기뻐하는 형을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던 것은 형에 대한 최고의 찬사이자 존경심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대게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인과응보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방식으로는 좋은 만남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인간은 작은 손해조차 보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상대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는 작아도 크다고 과장하고, 상대는 커도 작다고 폄하합니다. 자기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상대에 대해서는 엄격한 경향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잘못은 그럴 수 있다고 변명하고, 상대의 잘못은 그럴 수 없다고 비판합니다. 좋은 만남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를 존경하며 스스로 겸손하게 처신해야 합니다. 나는 작은 존재이지만, 상대는 큰 존재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은 엄격하게 판단하고, 상대의 잘못은 관대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이처럼 좋은 만남을 이룰 때만 두려움의 대상은 사랑의 대상이 되고, 미움의 대상은 기쁨과 감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서로 용서하고 화해했을 때만이 분열의 죄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희망찬 미래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서로 안고, 목을 어긋해 입을 맞추고, 울음으로 용서와 화해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드디어 두 사람은 형제 관계를 회복했고, 적대적인 민족들 사이에서 서로 협력하며 동거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분열된 채로 사는 것, 서로 경쟁하며 사는 것, 서로 미워하며 사는 것, 서로 분노하며 사는 것은 사실 상대를 죽이기 전에 먼저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분열된 채로 자기들 스스로를 죽이며 지냈던 과거의 삶이 너무 안타까워서 울었고, 그 삶에서 해방된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울었습니다. 특히 야곱은 형의 용서와 화해 없이는 결코 기대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약속까지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고향을 떠날 때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리니,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사방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너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 28:14-15).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형을 만나 용서와 화해의 자리에 이르기 전까지는 막연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용서와 화해에 이른 야곱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구체적인 실현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 역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할 때만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진정한 예배를 드릴 때만 새로운 관계와 밝은 미래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끝으로, 회개를 통해 용서와 화해의 자리에 이른 사람만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너와 함께 한 이들이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아내와 자식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또한 에서가 그의 선물을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나의 소유가 풍성하니 선물을 받으시라”라고 강권했습니다. 야곱은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과거 20년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삼촌의 집에서 힘겹게 살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대가족을 이룰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삼촌과 사촌 형제들의 견제가 심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수많은 가축과 재산을 형성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20년의 타향살이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금의환향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역시도 세상에서 다양한 일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경험합니다. 성공도, 실패도 경험합니다. 건강할 때도 있지만, 질병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쁨과 성공, 건강에 대해서는 감사하지만, 슬픔이나 실패, 질병에 대해서는 원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슬픔을 경험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슬퍼하는 자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들의 슬픔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연단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설사 극심한 고통 속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고 감사하고, 더 큰 고통에 이르지 않았음을 감사함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오늘 8.15 광복절을 앞두고 평화통일 주일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에서와 야곱의 감동적인 만남을 바라보면서, 분단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극악한 남북 관계 속에서 평화통일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남한과 북한 사이의 분열 상태와 남한 내의 남남 분열 상태가 죄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해방 직후 38선에 의해 남북으로 나뉜 민족의 아픔을 그대로 방치한 것은 죄였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으로 갈라진 이산가족의 아픔을 외면한 것은 죄였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권이 무너진 1990년대 이래로 자연재해와 독재 권력의 고통 속에서 남한으로 탈출한 탈북민들의 아픔을 그대로 방관한 것도 죄였기 때문입니다. 현재 남한사회에서는 남북 사이의 사안에 따라 친미와 친북, 반북과 반미, 반핵과 반전 등으로 진영을 나누어서 상대 진영을 서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다른 진영에 대해서 극우다 극좌다, 또는 보수다 진보다 말하며 갈등하고 있는데, 이처럼 분열을 방치하고 서로를 정죄하는 것은 죄라는 사실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남한과 북한이 분열 상태를 돌이켜 만남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도전해야 합니다. 1990년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 이후, 그 어려움을 직시한 남한이 대북 인도주의적인 지원을 하면서 남북한은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 6.15 선언 이후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운영을 통해서 남북 간의 만남이 한동안 활발했습니다. 당시 남북한의 만남은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켰고, 외국기업의 투자를 활발하게 유치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평화통일이 멀지 않았음을 가슴 벅차도록 희망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핵보유 국가가 된 이후, 그리고 지난해 말 9.19 군사합의가 실질적으로 파기된 이후, 한반도 남북의 긴장과 갈등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졌습니다. 현재 상황은 전쟁이 당장 발발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이 먼저 신뢰를 주기 위해 노력하고, 다양한 만남의 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만나야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만나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만나야 타협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남한과 북한이 자기 의를 서로 주장하기보다는 상대를 우선적으로 존중하도록 제안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상대는 가해자이고 자신은 피해자라는 주장, 상대는 공격자이고 자신은 방어자라는 주장, 상대의 무기는 공격용이고 자신의 무기는 방어용이라는 주장, 상대의 군사훈련은 공격훈련이고 자신의 군사훈련은 방어훈련이라는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고집하는 한, 남북은 결코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자기만 의롭다고 보는 주장을 접고 상대를 역지사지해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군사 통계를 보면, 최근 10년간 세계에서 미국의 무기 수입에 가장 많은 비용을 지불한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이고, 그 다음은 오스트레일리아, 그 다음은 한국입니다. 7위인 일본이 37억 5,200만 달러를 지불한 것에 비해, 3위인 한국은 67억 3,1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7조 6,000억 원 이상을 지불했습니다. 남한이 무기를 수입할 때마다 북한에게는 위협이 된다는 점을 남한 국민들은 인정해야 합니다. 북한은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자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핵무기를 보유했지만, 남한과 주변국들은 그것을 큰 위협으로 느끼고 있음을 북한도 인정해야 합니다. 흔히 강자와 약자의 관계에서 강자는 자존심이 상해도 약자를 품을 수 있습니다. 자신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약자는 강자로 인해 자존심을 상하면, 강자를 더 이상 상대할 수 없게 됩니다. 자존심의 상처를 털어버릴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핵무기를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강자인 남한이 약자인 북한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이 상호신뢰 회복을 위해서 절실한 사항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기독교인들은 남한과 북한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평화를 누리도록 앞장서야 합니다. 한국전쟁은 벌써 오래전에 일어났고, 이미 서로에게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 간에 수많은 도발이 있었고, 도발로 인한 후유증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북의 사안마다 원인 제공자와 피해자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원인 제공자가 피해자에게 자발적으로 용서를 구하지 않는 한, 피해자는 피해 감정과 적대 의식 속에서 가중된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와 화해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는 한, 긴장과 갈등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평화는 평화를 원하는 쪽에서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평화를 만드는 자가 복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전쟁과 폭력, 긴장과 갈등의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평화통일의 미래를 그리면서, 남한이 먼저 북한을 용서하고 화해하고자 할 때, 한반도에는 평화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끝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분단의 질곡 속에서 남한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고,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오른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고, 남한이 북한에 대해 은혜를 베풀고 나눌 것을 충고해야 합니다. 2023년 세계경제 전문기관에 의하면 한국의 경제력은 세계 13위입니다. 2024년 한국의 국민 1인당 GDP는 3만 6,542 달러로서 세계 29위에 해당합니다. 윤석열 정부 이후로 우리의 경제 상황이 다소 후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우리는 보릿고개를 걱정해야 했던 5000년 역사에서 가장 부유하게 살고 있는 셈입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이렇게 자리를 잡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 은혜의 결실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제3세계 국가들, 특히 휴전선 북쪽에서 매우 힘겹게 살고 있는 우리의 북한 동포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2023년 세계군사 전문기관에 따르면 한국의 군사력은 세계 6위이고, 북한의 군사력은 세계 58위입니다. 남한의 국방비는 502억 달러로 조사대상 국가 가운데 10위이고, 한미군사동맹은 더욱 강화되고 있습니다.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 속에서 핵무장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남한이 북한에 대해서 절대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북한에 대해서 두려워하기보다는 받은 은혜를 나누는 가운데 평화의 관계를 주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8.15 광복절을 앞두고 평화통일 주일예배에 참석하신 남원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비극이나 부끄러움에 머물지 말고, 미래의 희망을 위해서 만남의 새로운 기회를 조성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우리가 범한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철저히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되는 원수와 같은 상대가 있을 때는 용기를 지니고 만나야 합니다. 드디어 만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는 상대 앞에서 겸손하게, 상대를 존경심 가운데 바라보며, 상호신뢰를 만들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껄끄러운 상대의 언어나 행동에 상관없이 우리가 먼저 상대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더욱이 우리가 사는 동안 하나님께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해서, 그것이 물질이든 사회적 지위나 명예이든 사랑의 빚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기꺼이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삶의 모든 자리에서 즐겁고 보람된 평화의 삶을 누릴 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통일의 새 역사를 만드는 일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한반도와 남한사회에서, 우리가 처한 삶의 모든 자리에서 평화의 사람들이 되어 살아가기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 우리 가운데 평화가 넘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막혀 있는 모든 담을 허물게 하소서. 긴장과 갈등과 대립 가운데 있는 남과 북이 서로 만나 용서하게 하시고, 화해하게 하시고, 교류하게 하시고, 공존하며 참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가 받은 복이 참으로 많습니다. 받은 복을 나누는 통로가 되어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정종훈 목사 (연세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