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글

지렁이

ree610 2024. 1. 25. 15:26

지렁이

ㅡ  김 영석

우리가 도무지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땅속 어둠 속에서
눈도 코도 귀도 없고
모양도 지울 수 없는
지렁이가 꿈꾸고 있다
그 깊은 꿈속
쪽빛 바다에는
햇살을 튀기며 돌고래가 춤추고
뭍에는 푸른 풀 붉은 꽃 다시 돋고
새들은 공중에서 지저귀고
산 줄기줄기 짐승들은 내닫는다
아이들은 강가에서 소리치며 놀고
어른들은 시장에서 종일 아우성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지렁이의 꿈을 볼 수 있지만
꿈꾸는 지렁이를
우리는 볼 수가 없다
우리들의 눈과 코와 귀와 입으로
날빛에 몸이 드러난
온갖 모양은 알 수 있지만
어둠 속 지렁이는 모양이 없어
우리는 결코 알 수가 없다
꽃잎 지는 것을 바라보고
바람 부는 소리를 들을 뿐이다.

'모리아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 1 - 지리산에서  (2) 2024.01.31
또 다른 충고들  (4) 2024.01.26
내가 좋아하는 사람  (0) 2024.01.24
사막  (0) 2024.01.20
두고 온 것들  (0) 2024.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