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활동으로서의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활동과 영향: 1970-90년대 초
비기독교인인 필자가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는 소식에 지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뉘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실체(신)에 대해 왜 공부를 하려 드냐.”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반면 기독교 신자들은 “이참에 공부를 하려 들지 말고 믿는 게 어떻겠냐.”라며 전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두 가지 반응은 내 연구가 ‘신(God)’에 관한 것이라고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신학자가 아닌 사회과학자의 관점에서 시작한 필자의 연구에서 신의 유무는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극소수의 논문을 제외하고 조그련을 다룬 다수의 연구가 진보–보수 진영으로 갈려 신앙적 진위 여부를 다루고 있지만, 이 글은 북한의 조그련 회원들이 사이비 신자인지 아닌지, 북한의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진짜 교회인지 아닌지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대신 조그련 및 북한교회라는 눈앞에 실재하는 현상을 하나의 문화활동으로 규정하고, 197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초까지 이 단체의 활동이 외교 무대와 북한 사회 내부에 끼친 영향을 단편적으로나마 다루고자 한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전제로 여겨야 할 내용을 짧게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다. 교회를 문화정책을 시행하는 하나의 주체로 보고 그 활동을 정책의 일환으로 보는 것은 사회학과 그 파생 학문인 문화연구 분야에서 그리 생소한 시도가 아니다. 전도, 포교, 교류 등 다양한 기독교활동은 종교적 가치의 전파를 통한 다수의 신자 확보를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종교적 가치는 교회 내에서뿐 아니라 교회 바깥에서도 유용한 다양한 윤리적・사회적・문화적 가치를 내포하며 비종교적 영역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한다. 일찍이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근대 사회를 권력의 강제적 영향이 행사되는 정치적 사회와 자율적인 시민사회로 구분했다. 그러한 시민사회에서조차 권력이 대중의 자발적인 지지와 동의를 모으는 장치를 통해 간접적인 권력행사를 추구한다고 보았으며, 대중과 권력이 유기적 연결고리를 맺는 대표적인 기관으로 대학, 언론, 그리고 종교를 꼽았다. 그는 『옥중수고』에서 자신의 헤게모니 이론을 세우며 이탈리아 로마교황청의 리더십이 어떤 방식으로 대중을 결집시켜 이탈리아의 정치적 기득권에 종속 혹은 대항하였는지를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1970년대 처음 국제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조그련의 활동은 민간 교류에 국한되었음에도 남북한 외교는 물론 북한의 국제 외교에도 영향을 끼쳤다. 북한교회의 정체성이 사이비이든 아니든 그 출현과 대외정책이 북한의 외교정책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만은 틀림없다. 구 공산권 국가에 교회활동이 제한적으로나마 허용된 것은 물론 북한에만 적용되는 사례는 아니다. 그러나 수백 년에 걸쳐 사람들에게 각인된 그리스정교회의 정체성을 무시하지 못하고 결국 신앙활동을 수용한 동유럽의 경우와 달리, 북한은 기독교 역사도 짧을뿐더러 ‘기독교의 나라’로 인식되던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대중 사이에 반기독교 정서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여기에 일제강점기 시대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였던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한국전쟁 중 대거 월남하면서 북한 지역의 종전 기독교 세력은 이미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분단 이후 기독교 세력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던 북한정권은 1970년대 초 조그련을 외교 무대에 소개하며 체제 안에 기독교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시사했다. 필자는 조그련의 대외 교류활동이 교회 설립 등 북한 대내 사업과 비슷하거나 앞선 시점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는 북한 기독교 기관의 부활이 사회 내부의 요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외교적 필요에 의한 것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남북한 대외정세의 변화
조그련의 설립 동기를 살펴보려면 우선 1960–70년대 국제사회에서 남북한의 대립구도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냉전의 맥락에서 지정학적 요충지인 한반도에서 남북한의 대립은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한반도와 관련하여 UN 무대에서 주로 다뤄진 이슈는 1) 남북한 통일, 2) UN군 및 주한미군 철수를 포함한 한반도 긴장 완화, 3) 남북한 정부의 UN 동시 가입 문제였다. 이 문제들을 둘러싸고 미국과 구소련을 각각 등에 업은 남북한은 첨예하게 각을 세웠다. 첫째, 통일 방식에 있어 북한은 고려연방제를, 남한은 단일정부수립을 주장했다. 둘째, 북한은 UN군 및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반면 남한은 이를 강력히 반대했는데, 이는 양측 정권이 한반도 긴장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남한은 남북분단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으로 규정하고 국제사회가 해결해야 할 냉전 이슈로 바라본 반면, 북한은 이를 본래 한 국가에 속했던 같은 민족 사이의 갈등으로 보며 미군 주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개입을 내정 간섭이라고 주장했다. 셋째, 서로를 괴뢰정부라 부르며 정식 주권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남북한이 UN 동시 가입에 찬성할 리는 만무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김일성 정권은 한반도 문제를 UN에서 다루는 것을 반대했다. 1965년 반둥회의에 참석한 김일성은 “사상에서의 주체, 정치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 국방에서의 자위”라는 소위 주체사상 4대 원칙을 발표하며 남북통일 문제에 외세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굳이 주체사상의 원칙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국전쟁에 연합군을 파견한 UN에 대해 북한의 감정이 호의적일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의 배타적인 태도는 1970년대에 이르러 극적으로 반전했다. 소련 및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외교관계를 여전히 유지하면서 UN은 물론 자본주의 국가에 우호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1972년 제5차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일성은 평화공존을 원칙으로 한반도에 위협을 주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자본주의 국가와 외교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천명했다. 김일성의 선언과 맞물려 북한은 1970년대 초 오스트리아, 핀란드, 아이슬란드, 리히텐슈타인, 노르웨이, 포르투갈, 스웨덴, 스위스 등 북유럽 및 서유럽 일부 국가들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남한 정부 및 친미 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제의원연맹(IPU), 세계보건기구(WHO) 등 UN 산하기구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UN 옵서버 회원국가 자격으로 뉴욕과 제네바에 UN 대표부 주재 사무소를 개설한 것도 이즈음이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 변화에 대해 미국의 대표적 북한학자 찰스 암스트롱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다양한 이유를 추측했다. 우선 경제적으로는 동구권의 물자 원조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경제적 원동력을 위해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사전 행보였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북한은 1984년 “합영법”을 시작으로 1992년 “외국인 기업 투자법” 등을 제정했으며 라진–선봉 경제특구를 지정,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북한의 UN 진출은 단지 경제적인 목적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외교적으로도 이 시기 UN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은 확실히 북한에 유리했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의 패배로 인해 이 시기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입김은 다소 약화되어 있었다. 여기에 1972년 닉슨의 베이징 방문으로 화해 분위기마저 조성되면서 UN은 미・소 양강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목소리가 힘을 얻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북한만을 한반도 내 주권국가로 인정하던 중국이 1971년 UN 가입과 더불어 안전보장이사회 상임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식민지체제에서 벗어나 독립한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생국들이 1971년 대거 UN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부분 냉전체제를 거부하는 ‘쁠럭불가담 운동’(비동맹 운동)을 통해 북한과 동맹관계를 가진 우국(友國)들이었다. 이들 국가는 UN 내에서 냉전 문제를 다룰 때마다 서유럽과 미국의 결정에 반대했으며, 한반도 문제도 북한 측의 입장을 지지했다.
조그련의 출현과 민간교류 활동의 목적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그련이 국제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1974년 북한의 세계보건기구 가입과 함께 제네바 UN 사무국에 상주하게 된 북한 대표부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조그련 발신의 편지를 전달했다. 이 편지에는 남한 독재정권이 남조선 종교인들을 폭압하고 있다며 이를 규탄해달라고 청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편지를 계기로 WCC와 조그련 사이에 채널이 개설되었고, 이후 이 채널은 북한–재외 기독교인 대화로, 그리고 마침내 남북 기독교 교류로 이어졌다. 북한 조그련과 WCC, 재외 기독교인, 그리고 남한 기독교인 사이의 교류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북한 종교의 새로운 이해』(김흥수・류대영 저, 2002)를 비롯한 선행 연구를 통해 여러 차례 상세히 소개된 바 있다.
이들의 교류에서 조그련의 신앙적 정체성을 의심한 사람들이 논쟁의 초점으로 다룬 이슈는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북한 정권이 조그련활동을 통해 얻고자 했던 정치적 목적이며, 둘째, WCC가 조그련을 기독교 단체로 인정한 근거였다. 우선 첫 번째 이슈에 대해 논하자면, 미국처럼 북한과 공식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국가와 민간 교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종교 단체는 상당히 유용한 비정부기구였다. 실제로 조그련은 에큐메니컬 교회뿐 아니라 조그련의 신앙에 의구심을 가지던 미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에도 문호를 개방했다. 평양의 봉수교회 제단에 올라 설교를 한 유일한 외국인 목사가 복음주의 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빌리 그레이엄이라는 점은 조그련의 교류의 폭이 외연적으로 개방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해외 및 남북 교류를 통해 조그련은 특히 남한 정권의 기독교인 탄압문제를 강하게 호소했다. 조그련의 호소가 아니더라도 박정희 정권 이래 이어진 남한 군부 정권의 인권 탄압은 국제사회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낳고 있었다. 북한은 여기에 조그련의 호소를 얹음으로써 남한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암스트롱은 이 시기 무력 통일의 야망을 실현하기에 버거운 군사적 열세를 실감한 김일성이 정권의 정통성을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는 쪽으로 전략을 선회했다고 지적했다. 1974년 김일성은 한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학순 주교 등 박정희 정권에 의해 탄압받고 있는 남한 종교인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미군과 연합한 남한이 우리보다 군사적으로는 우월할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으로는 우리가 남한보다 우월하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처럼 도덕적 우위를 강조하며 김일성 정권이 의도한 것은 남한 사회 내에서 자발적인 반정부 혁명세력이 일어나 그들과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조그련과 남한교회 교류가 이끌어낸 또 한 가지 두드러진 변화는 이 시기 남한 기독교 사회의 반공 프레임이 민족주의 프레임으로 전환된 것이다. 조그련과 남한교회의 꾸준한 대화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1988.2), 소위 ‘88선언’으로 이어졌으며, 이 선언문을 통해 남한 기독교인들은 ‘분단’이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원죄’라는 점, 같은 민족끼리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죽인 죄, 형제를 미워한 죄, 전쟁한 죄, 화해하지 못한 죄를 고백했다. 이와 같은 프레임의 변화는 신앙에 기반을 둔 동류 감정(fellow–feeling)이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압도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한반도 분단은 외세가 개입할 문제가 아닌 한민족끼리의 문제라는 북한정부의 통일관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조그련의 대외활동이 가져온 북한 사회의 변화
동류 감정이 생겼다면, WCC와 남한의 기독교인들은 조그련의 신앙적 정체성을 인정한 것이었을까? 북한과의 접촉 과정에서 WCC와 NCCK가 조그련의 정체에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대북 접촉 과정에서 남긴 각종 편지와 문서들을 살펴보면 이들은 북한의 비관적인 기독교 환경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숙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교류의 과정 중에 보게 된 조그련과 북한 사회 내부의 변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기독교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는 동안 WCC 회원국들은 북한교회의 어설프던 신앙활동이 점차 반듯하게 기틀을 잡고 급기야 평양 시내 한가운데에 교회를 세울 만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끊임없는 검증과 수정을 요구한 남한 및 국제 기독교 단체들의 요구를 북한이 받아들이면서 이룬 수확이다. 또한 ‘종교’라는 문화가 정치적 의도로만 일방적으로 활용되기에는 대단히 강력한 자생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북한체제에 적응하며 생성된 북한 특유의 신앙활동과 성서 해석을 ‘주체적 기독교’의 실험으로 이해하는 연구도 있다.(김흥수, “분단 70년, 북한기독교의 이해,”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44호, 2016년 3월)
여러 차례 북한교회를 방문하고, 홍수 피해 이후에 식량 지원 사업을 위해 2년 가까이 북한에 머무른 전 WCC 행정비서 에리히 바인가르트너는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적어도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짜 교회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북에 있던 모든 서양인이 가족과 휴가를 보내고자 귀국했고, 평양 시내에 외국인은 나와 우리 가족이 유일했다. 나는 북한에 오래 체류하고 운전면허까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시인도 없었고 운신이 자유로웠다. 나와 아내는 즉흥적으로 봉수교회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가짜 교회라면 보여줄 외국인이 모두 떠나버린 오늘 같은 날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예상은 빗나갔다. 교회는 오히려 다른 날보다도 더 북적거렸다. 외국인들의 검열 시선에서 해방된 북한 사람들은 더욱 열정적으로 찬송가를 부르고, 더 큰 목소리로 기도하고 있었다. 평양에 머무는 동안 목격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신앙의 문제에 대해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앙은 내재적인 문제로, 증명이 불가능하다. 심지어는 남한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도 가짜 신자는 있을 수 있다. 다만 내가 북한에 머무는 동안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면 성서를 읽고 기도를 하는 북한 주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이 진짜 신도가 아니라 강제 동원된 시민들이라 한들, 그런 그들에게 성서를 읽을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조그련의 활동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정권이 조그련을 통해 의도한 통일전선 구축은 남한의 민주화로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북에 찾아온 자연재해로 국제사회의 인권 문제는 남한에서 북한으로 옮겨갔다. 정권을 위협할 정도로 위기에 직면했던 식량난 속에서 조그련은 자신들의 채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해외와 남한으로부터 각종 원조와 지원을 끌어들여 북한 사회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어느 정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4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WCC 총회에 새 조그련 위원장인 강명철 목사가 참석해 브리핑을 했다. 전임 위원장이었던 아버지 강영섭이나 할아버지 강량욱 목사와 달리 대본 없이 연설하는 자연스런 태도와 유창한 영어 실력, 그리고 무엇보다 연설과 대화 도중 드러낸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참석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WCC는 북한을 위한 경제적 지원책을 준비해두었지만, 이 자리에서 북한 측은 더 이상의 지원은 사양하겠다고 밝혔다. 통일전선 전략이 좌절되고 경제적 지원도 필요 없게 된 지금, 북한정권이 어떤 연유로 조그련을 다시 해외 무대에 등장시켰는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노승림 | 영국 워릭 대학교 문화정책 연구소에서 북한 기독교 문화정책 연구로 2016년 문화정책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종교와 예술활동을 중심으로 한 남북한 문화외교활동과 한국 근대문화 형성에 있어 기독교와 서양음악이 끼친 영향이 주요 관심사이다.
'모리아 > 현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활절과 4.15 총선에 즈음하여 (0) | 2020.04.15 |
---|---|
반동성애운동본부에 모든 조치 취할 것! (0) | 2018.08.24 |
빌 하이블스 목사의 윌로크릭커뮤니티교회가 '미투' 운동에 의해 (0) | 2018.08.24 |
캐나다 사회의 시리아 난민맞이 (0) | 2017.04.29 |
학교앞 동네에 살던 친구! (0) | 2004.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