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현장

캐나다 사회의 시리아 난민맞이

ree610 2017. 4. 29. 18:36

캐나다 사회의 시리아 난민맞이


2011년 아랍의 봄, 시리아 민중들의 민주화 시위에 바샤 알–아사드 정권은 철저한 탄압과 폭력으로 응답했다. 이후 시리아는 한번 시작되면 끝내기 힘든 내전에 급속히 빠져들었다. 정부군, 반군, ISIS에 이어 미국, 러시아, 터키, 쿠르드 전사들까지 무장갈등에 개입하면서 시리아 내전은 편갈린 열강과 주변 이슬람 국가들이 뚜렷한 전선 없이 뒤엉켜 싸우는 전쟁의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지금은 정권교체를 겪으면서 미국이 의도적으로 발을 뺐고, 러시아와 아사드 정부군, 그들에 따라붙은 터키, 이란, 레바논의 헤즈볼라 무장세력에 의하여 반군들이 밀려나서 휴전을 이룬 상태이다. 이에 대한 복잡한 지정학적인 함의 역시 중요하겠지만 명백하게 눈앞에 펼쳐진 인간적인 결과는 수십만 명의 사망과 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을 떠나 유리하게 되었다는 비극적 현실이다. 2011년 상태로 돌아간 지금, 아사드 정부의 탄압에 쫓겨서 도망했던 많은 시리아민이 돌아갈 곳이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난민사태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세계민에게 던져진 도전적 질문이다. 이 글은 최근 시리아 난민에 대한 북미 사회의 대응을 살펴보고 그것에서 배움을 얻고자 함을 목적으로 한다.

두 나라, 두 정책
2015년 9월, 알란 쿠르디라는 세 살짜리 난민 남자아이가 익사하여 바닷물에 떠내려와 터키 해변에서 발견되었다. 시리아에서 지중해를 넘어 유럽으로 가기 위해 아이의 가족이 위험천만한 탈출을 시도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너무나 가여운 아이의 주검의 이미지는 잠자고 있던 세계의 인도주의를 깨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쿠르디 가족의 친척이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 살고 있었고, 그리로 이주해오려던 뜻이 좌절되자 유럽으로 가는 밀항선을 타게 되었다는 사실, 즉 캐나다 커넥션이 곧이어 알려졌다. 그러자 때마침 총선 선거운동 막바지를 맞고 있던 캐나다 정치권에서는 시리아 난민정책이 중요한 정치 이슈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집권 보수당이 지난 수년간 난민유치에 소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상당히 비협조적이었다는 지적이 터져 나왔다. 민간이 지원하는 난민 초청 절차를 복잡하게 만들어 기다리는 시간만 늘려 놓았고, 정부가 직접 나서서 데려온 난민은 지극히 미미한 수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난 것이다. 자유당과 신민당 등 야당들은 일제히 보수당의 비인도적인 난민정책을 맹공하면서 될 수 있는 한 보수당과 구별되는 적극적인 난민수용의 입장을 선거공약으로 내놓았다. 세계의 이웃을 향한 인도주의적이고 동정적인 입장의 표명은 캐나다 국민의 호응을 얻었고, 40대의 젊은 지도자 저스틴 트루도의 자유당이 10년 집권의 보수당을 밀어내고 다수 의석을 차지하며 정권을 잡게 되었다. 2015년 10월이었다. 새 정부는 공약대로 집권 당해년도에 2만 5,000명의 시리아 난민을 데려오는 야심찬 노력을 개시하였고,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했지만 그 목표를 달성했다. 자유당 집권 1년을 조금 넘긴 지금, 캐나다에 온 시리아 피난민은 4만여 명에 이른다. 첫 시리아 난민 가족이 토론토 피어슨 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 선물까지 챙겨들고 소매를 걷어붙인 채 그들을 기다린 사람은 다름아닌 트루도 신임총리였다. 그 자리에서 그가 난민 가족에게 들려준 말 한마디는 많은 캐나다인의 마음을 대신했다. “여러분, 비행기에서 내릴 때는 난민이었지만, 이제 공항터미널을 나갈 때는 캐나다의 ‘영주’권자(‘permanent’ resident)입니다.”


미국은 상반된 길을 걸어왔다. 양국의 최근 정부자료에 의하면(캐나다 이민부 Immigration, Refugees and Citizenship Canada, 미국 국무부 Department of State, Bureau of Population, Refugees and Migration), 2015년 11월 이후 캐나다는 4만 81명의 시리아 난민을 데리고 와서 지원하고 있는 반면, 같은 시기 미국에 들어온 시리아 난민의 수는 1만 7,554명에 그치고 있다. 미국의 총인구가 캐나다보다 약 10배 많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미국의 난민 지원 규모는 상당히 초라한 것이다. 오바마 정권이 1만 명의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을 때 극심한 반발에 부딪혀야 했다. 때마침 파리에서 ISIS 테러가 발생하자 공화당이 집권 중이던 20개의 주정부에서는 자신들의 주에는 난민을 들여놓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하였다. 그와 같은 분위기에서 미국은 대선정국을 맞게 되었고 캐나다와는 정반대로 난민 억제 공약이 많은 후보들에 의하여 발표되고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는 현상이 나타났다. 테드 크루즈나 젭 부시 같은 공화당 후보들은 기독교 난민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고, 도널드 트럼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중동으로부터의 난민 유입을 전적으로 중지시키고 미국 내 수상한 이슬람 모스크들을 철폐하겠다는 종교 탄압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2016년 말, 결국 가장 거친 반난민 공약을 내세운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캐나다와 1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이루어진 미국의 정권교체는 난민정책에서 정반대의 전환점을 낳았다. 취임 즉시 트럼프 행정부는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특별행정명령을 통하여 반이민/반난민 규제들을 대폭 강화시키고 있다. 위헌 요소 때문에 행정명령이 당장 그대로 집행되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트럼프 정부가 변함없이 이끌어 갈 난민정책의 핵심은 중동 난민, 무슬림 난민, 특히 시리아 난민을 미국에 들여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안보의 이름으로.
여기에서 유념할 사항은 북미 사회에서의 시리아 난민 수용은 주로 재정착(resettlement) 프로그램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피난민들이 국경을 직접 넘어와서 난민의 지위를 요청하는 유럽의 많은 경우와 달리 북미 국가는 이미 난민이 된 사람 중에서–시리아 난민의 경우 터키나 레바논, 요르단 등의 난민촌에서 수년을 살아온 사람들–재정착 시킬 사람들을 골라 온다. 즉 국제연합 난민기구의 철저한 심사를 통과하고 재차 해당 국가의 선택을 얻은 사람들만이 재정착 프로그램으로 북미에 오게 되는 것이다. 이들이 입국하여 테러 행위를 할 가능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
그렇다면 지금 트럼프 행정부의 제재와 축소를 근간으로 하는 난민정책은 사실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중의 반난민 기류를 좇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전과 평화의 문제는 특정 집단을 근거 없이 적대시하고 소외시키면 절대로 개선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의롭지 못한 정책 때문에 평화가 위협받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미국과 캐나다 두 나라의 예에서 보듯이 정부정책의 방향, 정권의 변화가 난민정책에 큰 변화를 줄 수 있는 맥락을 형성한다.

난민을 환영하는 사람들
정책보다 중요한 것, 또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힘은 시민사회의 의지와 역할이다. 캐나다에서는 난민수용에 대한 시민사회의 수요를 정부의 행정능력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즉 자기의 돈으로 기꺼이 난민들을 지원하겠다는 사람이 차고 넘쳐서 정부가 그때그때 대상자들을 마련해주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개인이나 단체가 난민을 후원할 경우 첫 1년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데, 4인 난민 가족일 경우 약 3만 달러 정도의 재정을 준비해야 한다. 그럼에도 난민을 빨리 보내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첫째, 각 교파의 캐나다 교회들이다. 난민을 데려오는 일은 정부의 특별한 허락을 받은 기관을 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기관들을 ‘Spon–sorship Agreement Holders’(SAH)라고 부르는데 이들을 통하여 다른 많은 단체나 개인이 공동후원(co–sponsoring) 형식으로 난민을 초청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SAH는 캐나다 민간 난민사역의 중추적 기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리아 난민을 위한 후원자로 참여한 SAH는 별개 프로그램을 운용하는 퀘벡 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활동하며 총 103개 기관으로 집계되는데, 그중 기독교 관련 기관이 71곳에 이른다. 캐나다에 온 시리아 난민의 약 70%는 어떤 형태로든 교회의 도움을 통하여 캐나다에 입국한다.
참여한 교단들을 보면, 천주교, 성공회, 연합교, 장로교, 자유감리교, 메노나이트, 침례교, 유니테리언, 오순절, 독립교회, 이민교회 등 모든 교회와 교단을 망라하고 있다. 흔히 캐나다 교회를 교인들의 고령화와 교인 수 감소로 활력을 잃었다고 평가하곤 한다. 하지만 캐나다 교회들은 난민 문제에 관한 축적된 노하우와 경험을 바탕으로 아직도 비상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교단별로 조직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고 개교회 차원에서 교인들의 헌신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다. 교단을 넘어서 다른 교회나 심지어 교회가 아닌 다른 그룹이 난민 지원을 원할 때 거의 제한 없이 협력의 문을 열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연대하는 개방성과 유연성이 이들 캐나다 교회의 또 다른 강점이다. 교회의 난민 구제는 결코 개종을 목적이나 전제로 삼지 않는다. 그와 같은 포교식 구제의 모순성은 이미 원주민에 대한 캐나다의 흑역사로 체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민이 된 이웃에게 대가 없는 후대와 사랑을 베풀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수의 사랑을 몸으로 증언하는 가장 높은 차원의 선교일 것이다.


둘째로 주목할 만한 난민 환영자들의 원천은 바로 과거의 난민들이다. 난민의 지위를 획득한 사람이 남아 있는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오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이전 세대의 난민 출신들이 자신들이 받은 대로 이제는 다른 난민을 후원하는 선순환의 역사를 보이는 것이다. 보트피플(boat people)로 캐나다 교회의 초청으로 오게 된 월남계 소녀, 지금은 의사가 된 그녀가 시리아 난민 가족을 공항에서 맞이하면서 과거 자신을 회고하는 장면이 방송에 소개되었다. 공항 출구를 나오는 조금은 어리둥절한 시리아 소녀를 맞이하면서, 그녀는 그 소녀가 30년 전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수단에서 온 한 여성 난민은 자신이 캐나다에 자리를 잡자마자 보스니아, 콜롬비아, 시리아 등 세계 곳곳의 난민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그 한 사람이 지금까지 27명을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 한때 나그네였음을 잊지 않는 사람들의 일화는 캐나다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미담이다. SAH 목록을 보면 에티오피아, 에리테리아,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아르메니아, 유대인 등 이전의 난민 커뮤니티 단체들이 시리아 난민의 후원을 위하여 열심히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과거 난민들의 성공 역사는 캐나다 사회가 새로운 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담보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개인 자격의 난민 후원자들이 많이 있다. 뜻을 같이하는 5명의 친구만 모여도 난민 후원을 신청할 수 있는 제도가 있고, 전적으로 재정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방안들도 정부가 마련해놓고 시민의 참여를 독려한다.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효과
캐나다에 사는 유대인, 기독교인, 비종교인들은 무슬림이 대부분인 시리아 난민을 초청하여 섬기지만, 종교나 민족이 벽이 된다는 이야기는 캐나다에서 들리지 않는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토양은 그 나라의 다민족주의일 것이다. 올해 캐나다는 연방 설립 150주년을 기념하고 있지만, 백인 국가이기를 극복하고 다민족 사회의 모습을 보인 것은 최근 50년 정도라 말할 수 있다. 그때부터 이민자들의 출신국이 비유럽국가들로 확대되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visible minority’2라고 불리는 비백인들이 전체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20년 후면 인구의 절반이 이민자와 그들의 자녀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캐나다 인구의 연령구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출산율 저하와 수명 연장, 베이비붐 세대(1946–65년에 출생)의 노인연령대 진입으로 캐나다 인구는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다. 캐나다가 취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인구 고령화 대책은 젊은 이민자들의 유입이다.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지역, 여타 개발도상국들은 현재 청년 인구 과잉 상태에 있기에 캐나다 이민의 주요한 원천이 될 수밖에 없다. 세상 한 편 부국(富國)에서는 고령화, 다른 편 빈국에서는 청년 인구 팽창이라는 상황은 인구의 국제이동을 불가피하게 한다.3


다민족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다문화주의 정책이 탄생하였다. 1971년에 공식 정책으로 채택된 캐나다의 다문화주의는 인종, 민족, 문화, 종교의 차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존엄과 가치가 인정된다는 평등주의 원칙의 천명이다. 이를 위하여 모든 문화가 존중되고 용인되며, 새로운 구성원들에게 캐나다 사회로의 동화나 고유문화의 포기가 요청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캐나다 사회는 그 고유성의 보존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양성이 사회통합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문화주의는 정책이기보다 일종의 정신이자 목표라고 할 수 있는 면이 더 크다. 왜냐하면 사회 각 구성원들의 문화적 배경의 존중과 관용이 아직 확고하게 자리 잡거나 실천되는 것도 아니고 단선적으로 개선과 발전만을 일관되게 해온 것이라고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종주의적・문화우월주의적 편견으로 이민자, 국외자, 원주민들을 차별한 캐나다의 어두운 역사는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웃 나라 미국의 최근 변화의 바람에 영향을 입으면서 백인 우월주의의 반이민/반난민의 분위기가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 실제로 증오범죄의 증가가 보고되기도 한다. 얼마 전엔 퀘벡에서 백인 우월주의자에 의한 이슬람 사원 내의 총기 테러로 6명의 무슬림이 살해되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캐나다의 다민족주의의 현실에서 배울 점은 부끄러운 역사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시민사회의 철저한 의지가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편견과 차별의 모순이나 폭력이 드러나고 발생했을 때 그것은 즉각적인 비난과 고발의 대상이 되고 훼손된 다민족주의의 수호에 구성원들이 대단히 적극적으로 나선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온타리오 주의 피터보로에서 누군가 이슬람 사원을 방화해서 많은 피해를 입힌 적이 있었다. 2015년 파리 테러 직후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마치 그에 대한 반작용처럼 발생한 사건이었다. 평화로운 소도시에서 증오범죄가 발생한 것이었지만, 8만 인구의 피터보로 시민들의 반응은 무척 성숙했다. 당장 인터넷과 SNS를 통해 소액 대중모금(crowdfunding)을 진행하여 모스크의 보수를 돕고자 했고, 수리비용을 초과하는 모금이 금방 이루어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다수의 기독교 교회, 유대교 회당이 나서서 수리가 완료될 때까지 무슬림 이웃들이 자신들의 건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다. 이들의 호의로 피터보로의 무슬림들은 회당과 교회 등 여러 장소에서 자신들의 집회를 이어갈 수 있었다. 캐나다의 다문화주의는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이를 지켜내려는 시민들의 의지로 계속 진화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문화주의가 성숙할수록 난민사역의 깊이도 더해질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앞에서 살펴본 대로 캐나다 교회의 발이 닿지 않는 난민 초청이란 거의 없을 정도로 난민사역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 한인교회, 한국교회들은? 난민을 후원하고 섬긴다는 것은 헌금이나 헌물로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가족과의 친밀한 관계의 시작이며, 많은 경우 종교, 문화, 관습을 가로지르는 용감한 만남이기도 하다. 재정적 지원 외에 교육, 건강, 취업 등 그 가족에 관한 삶의 세세한 부분들을 살펴야 한다. 근처로 새로 이사 온 친척이나 친구에게 하듯 늘 관심을 갖고 필요를 찾아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주되, 난민 가정이 의존적이지 않고 자립 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모든 사역 과정의 성패는 난민들과의 신뢰관계 형성에 있다. 무엇보다 그네들의 관습과 문화를 존중하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처럼 가치를 공유하는 여러 사람이 함께 공부하여 준비하는 공동체가 잘해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난민사역을 사명으로 이해할 때 힘든 줄 모르고, 여럿이 함께 할 때 짐이 가벼워지고 무엇보다 실수를 줄일 수 있다. 

 
다민족사회를 위한 역할에 중점을 두고 있는 중규모 이상의 교회라면 해낼 수 있는 사역이 난민초청 사역이다. 물론 규모가 작은 경우 난민을 데려오는 후원자 역할을 단독으로 하지 못할 뿐,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무수하다. 필자가 속한 오타와 한인교회는 성인 출석교인이 200여 명 정도인데, 지난해 말 처음으로 시리아 난민 가정을 받아들였다.(앞으로 지속될 여러 번의 사역의 처음이라고 여기고 있다.) 어린아이 셋이 있는 젊은 무슬림 부부 가족이었다. 첫 시도라서 새로운 것들을 배워야 하는 어려움도 많았지만, 전 교인이 이 사역을 위하여 한마음으로 준비하고 실천하는 과정이 매우 소중함을 느꼈다. 많은 성도들이 기부한 온갖 생필품으로 이 난민 가정이 살 아파트를 채웠고, 도착일에는 여러 성도들이 공항에 아랍어로 쓴 환영피켓을 들고 나갔다. 성도들이 돌아가며 운전 봉사, 영어 강습, 컴퓨터 지도, 쇼핑 안내, 생활상식 전수, 때때로 함께 친교를 나누는 등 돌봄 활동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한인교회로서의 난민사역 경험은 리더십의 방향이 분명히 정해지고 그것이 교회에 설득력 있게 전해지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 과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나면 다른 공동체에서 찾기 힘든 철저한 헌신과 신앙적 열정이 사역을 이끌어가는 역동적인 힘으로 나타난다. 그와 같은 난민사역에의 잠재력은 한인교회와 한국교회가 지닌 역사적・사회적 정체성에 기인하는 면이 클 것이다. 첫째, 한인들의 정체성 속에는 부모 세대가 전쟁 피난을 겪었던 집합적인 난민의 경험이 있다. 둘째, 한 세대 내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다 보니 경제적으로는 발전된 국가이면서도 개발도상국 시기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다. 마지막 셋째로, 북미 한인들은 이민 1세대 중심의 민족집단이다 보니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이면서 사회적・언어적으로는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같은 민족의 특수한 성격과 경험은 한국교회와 세계 곳곳의 한인교회들이 난민들을 보다 잘 이해하고 소통하여 이 사역을 특별히 잘해낼 수 있게 하는 바탕이 된다고 생각한다.

결론: 담장을 부수어 식탁으로
안보와 안전이 우리의 우상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안전제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주제인 것 같기도 하지만 우리를 끊임없이 공포로 몰고 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도널드 트럼프나 그와 같은 국수주의자, 대중영합주의자(populist)들의 정책이 많은 이들의 논리적인 반박에도 불구하고 대중 사이에 먹혀드는 이유이다. 선한 뜻으로 도와준 이웃이 우리에게 테러를 가하고, 사회의 불안세력이 되며,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역의 소외층으로 남게 될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대중의 두려움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캐나다나 독일 같은 나라는 지금 트로이의 목마를 자국의 울타리 안으로 들여놓은 것일 수 있고, 어려움을 겪던 난민들을 데려다가 못 할 짓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문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높고 높은 담장을 세워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난민사역에 대한 절반의 이해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귀하지만, 사지에서 사람들을 데려오는 일만으로 난민사역이 완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실 사역의 시작에 불과하다. 난민들과 한 가족이 되어서 함께 사는 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정착하여 잘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계속하여 고민과 고통을 들어주는 친구가 되는 일이 난민사역의 더 중요한 부분들이다. 이러한 노력이 어떤 정형적인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난민의 새로운 사회 내에서의 정착과 적응은 그들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구성원들의 지지적인 태도와 행동에 크게 달려 있다는 점이다.


난민구제 사역을 해야 하는 이유는 고령화 대책 마련이나 다문화주의 혹은 인도주의의 실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또 좋은 결과가 보장되는 무슨 대박 사업이기 때문도 아니다. 일차적으로 난민사역은 옳은 일이기에 위험 요소가 있다고 해도 해야만 하는 사명이다. 특히 교회로서는. 히브리 성서는 유대 민족이 겪은 이집트에서의 노예살이 경험까지 상기시키면서 나그네를 선대할 것을 당부한다. 즉 출애굽을 통하여 야훼가 건설하라고 명하는 정의로운 사회의 핵심 중 하나는 ‘국외자가 소외받지 않는 사회’인 것이다. 신약의 가르침은 더욱 뚜렷하다. 사회에서 소외된 주변인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기꺼이 품어주신 예수,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을 이웃사랑의 본보기로 말씀하신 주님은 나그네에 대한 선대가 바로 주님에 대한 영접이라고 강하게 언명하신다. 힘없고 작은 이웃, 난민들을 위하여 섬기고 베푸는 일은 신・구약을 관통하여 일관되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기독교의 가치인 것이다. 

 
난민사역에 대한 학문적 논의나 방법론적인 토의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신학적 결론은 이미 오래전에 내려진 것 아닐까? 우리가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신・구약 성서를 통한 가르침이 이보다 더 확실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난민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높은 담장을 당장 헐어버리고 그들과 함께 앉아서 먹고 마실 환영과 사랑의 식탁은 더 넓고 길게 만들어야 한다. 난민의 모습으로 문밖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그 사람은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1 Cato Institute는 1975년부터 2015년까지 미국에서 발생한 외국인에 의한 테러로 사망한 사건 자료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한 해에 난민의 테러로 사망할 확률은 36억분의 1이라고 한다. 다르게 말하면 지난 40년간 미국에 난민으로 온 사람이 테러로 살인을 한 경우가 단 3건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같은 기간, 미국에 난민으로 와서 생명을 구하고 새 삶을 살게 되었을 사람들의 추정치는 325만 명이다. 36억분의 1의 가상 위험 때문에 이미 위험에 처해 있는 8만 명을(연간) 외면하자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의 난민정책이다.
2 다수 백인집단과 인종과 피부색으로 구별되는 캐나다 내 비백인 소수집단들에 대한 통칭으로 캐나다 원주민(Aboriginal people)은 포함되지 않는다.
3 2016년 현재 캐나다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17%, 24세 이하의 인구는 30% 정도인 반면 시리아의 청년 인구는 전체의 절반을 넘고 노인 인구는 4%에 불과하다.


박정위 | 브라운 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인구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캐나다 연방정부 통계청에서 사회통계분석관으로 건강, 이민, 노동, 종교 분야의 주제를 연구하고 있으며, 오타와 대학교 사회학과 외래강사로 사회통계, 건강사회학, 소수집단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다년간 오타와 한인교회(Ottawa Korean Community Church)에서 지역 및 해외 구제사역을 담당해왔다. 저서로 Korean Immigrants in Canada: Perspectives on Migration, Integration, and the Family(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