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기독교인이시지요?” 상대가 물어오면, “아, 예.”라는 대답과 동시에 작은 생각이 스친다. ‘칭찬일까, 욕일까?’ 최근 발족된 한국여성연구학회협의회의 첫 오프라인 모임에 분과학회장의 신분으로 참석했다. 공식회의가 끝난 후 사담을 나누는데 젠더법학회장이 미국연방법원에서 동성결혼금지를 위헌으로 판결한 사실을 전했다. 말하는 도중에 나와 마주치자 어색한 표정으로 “어… 저… 괜찮으시…”라며 말끝을 흐렸다. 어느덧 이야기는 다른 소재로 건너갔고 또 다른 학회장이 할랄산업을 둘러싸고 얼마 전 발생한 무례한 기독교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의 존재를 또 의식했다. 누군가로부터 “교회 다니세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예”라는 대답만으로는 늘 부족함을 느낀다. ‘그런’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사족을 달고 싶은 유혹에 구차해진다. 한국교회나 교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미지는 자신들의 신념을 신의 뜻과 동일시하면서 소수자나 약자들을 향해 혐오의 말을 거침없이 퍼붓는 일부 교인들에 의해 주로 만들어지고 있다. 호모포비아에서 이슬람포비아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에서 등장하는 혐오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그런데 이러한 혐오의 감정은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움직인다. 혐오는 혐오를 낳는다. 그래서 안티기독교인들의 한국 기독교에 대한 혐오의 감정 역시 만만치 않다.
2 늘 있었기에 너무나 익숙한, 그래서 잘 보이지 않던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는 지난 5월 17일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으로 드러났다. ‘여자라서’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 의해 살해당했기에, ‘여자라면’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건의 본질을 두고 첨예한 성대결이 일어났고, 이는 또 다른 젠더폭력으로 이어졌다. ‘살아남았다’는 한 여성의 추도 메모가 대변하듯, 잠재적 피해자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여성들의 시선과 잠재적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의 시선은 사뭇 달랐다. 상당한 온도차가 감지되었다. 정신장애를 가진 개인의 우발적인 사건으로 깔끔하게 정리하려는 세력들은 여성들의 공포와 그에 따른 리액션이 ‘지나치다’고 몰아세웠다. 과연 여성들의 반응이 지나친 것인가? 살인사건 피해자 중 여성의 비율이 51%로 G20 국가 중 1위(UNODC, 2008)인 나라, 강력범죄 피해자 중 90.2% (경찰청, 2013)가 여성이라는 통계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늦은 밤 묻지마 살인’, ‘여자가 무시해서’, ‘유흥가 화장실’, ‘목사의 꿈’ 등등 이 사건들을 보도하는 헤드라인의 문구들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유흥가’나 ‘목사의 꿈’ 등은 누구의 입장에서 쓴 표현인가? 사건의 발단을 피해자의 행동에서 찾으려는 것 같지 않은가? 여성폭력에 대해서만 유독 사건 발생의 원인을 피해자에게서 찾는 탓에, 이 사건의 본질이 여성혐오냐 아니냐를 두고 2차, 3차 피해가 양산되고 젠더불평등이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러한 온도차는 여성혐오를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여성혐오(misogyny)를 “여성을 싫어하고 미워함”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따라 생각하는 경향이 널리 퍼져 있다. 이로 인해 종종 오해가 생긴다. “이 행동이 여성을 혐오하는 거라고? 아니야. 내가 얼마나 여자를 좋아하는데….”라는 식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남성들이 적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혐오’로 번역된 미소지니(misogyny)는 본래 사전적 의미보다 훨씬 더 넓은 개념으로서 무언가를 경멸하고 싫어하고 적대감을 느끼는 것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여성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가이다. 우선 여성을 ‘무시해도 되거나 보호해야 하는’ 열등한 존재로 인식할 때 그것은 여성혐오에 해당한다. 이런 경우 혐오는 폭력적인 형태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호의적인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능력이 떨어지고 제대로 판단을 못하는 여성이란 존재에게 제대로 가르쳐주고 설명해주고 대신하거나 도와주는 형식으로 혐오가 표출되기도 하는 것이다. 요컨대 혐오는 반드시 노골적이거나 폭력적인 형태로만 표출되지 않는다. 배려의 모습을 띤 은밀하고 호의적인 차별도 여성혐오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두고 한쪽에서는 도와주고 배려해준 것인데 지나친 피해의식으로 곡해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발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여성을 동등한 존재가 아닌 열등한 존재로 대상화하기에 명백한 여성혐오라고 주장한다. 여성을 ‘남성을 유혹하는’ 위험한 존재로 보는 것도 여성혐오에 포함된다. 이러한 인식 탓에 여성폭력의 피해자에게 왜 그런 옷을 입었느냐, 왜 그 시간에 다니느냐, 그 장소에 간 이유는 무엇이냐 등등의 질의와 발언이 쏟아진다. 여성혐오는 악의적이고 무례한 남성들이 표출하는 행동이나 발언만이 아니다. 평범한 남성들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과 사소한 행동이 모여서 혐오의 문화를 만든다. 그 혐오가 차곡차곡 누적되어 폭력으로 터져나온다.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을 여성혐오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은 생물학적 여성을 자신의 폭력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경찰조사 결과가 어떻든, 언론이 어떤 방식으로 사건 프레임을 짜든, 살인남이 범행 동기를 뭐라고 하든 관계없이 여성을 함부로 다루고 때리고 죽일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는 점에서 이 강남역 살해 사건은 명백히 여성혐오에 의한 범죄이다.
3 대체 한국교회와 여성혐오는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늘날 우리 교회는 정의의 이름으로, 때로는 하느님의 질서라는 신성의 언어로 혐오의 사회문화를 확대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혐오는 소속집단의 규범과 제도 등을 지키기 위해서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존재와 행위, 사고방식 등과 맞서는 가운데 작동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교회에서 등장하고 있는 여성혐오는 동성애, 공산주의, 이슬람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와는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다. 교회가 왜 여성을 혐오하겠는가? 오히려 교인의 60-70%을 차지하는 순종적인 여성교인이야말로 교회성장의 주역이라고 추켜세우고 여성들의 무릎기도가 자녀와 가정을 지킨다고 칭송하는데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혐오는 물리적 폭력성으로 드러날 뿐만 아니라 호의적 폭력으로도 나타난다. 겉으로 보기에는 칭찬하는 것같이 보이는 찬양/열광은 여성혐오의 정서와 반대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뿌리 깊은 여성혐오의 한 양상이다. 이를 굳이 여성혐오로 보아야 하는가?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교회성장의 주역인 60-70% 여성교인이 교회 공동체의 의사결정 구조와 절차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자는 말이다. 한국교회에서 여성은 아주 자연스럽게 배제되어 있다. 신앙 공동체의 생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안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여성이 소외된다면, 공동체 내부에서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며 겨우 할당된 자리 역시 열악할 것은 자명하다. 주지하다시피 공동체를 공정하게 유지하는 데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와 절차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자 조건이다. 누가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는가, 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은 권위적인가 아니면 민주적인가, 공정한 정의의 원칙을 마련하기 위한 토론의 장에는 누가 참여하는가 등은 그 공동체의 젠더정의에 대한 감수성을 나타내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여성안수를 허용하는 교단이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전체 목회자 인원에 대비해 볼 때 여성 목회자의 비율은 매우 낮다. 교단의 법규로는 여성안수를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산하 교회들은 좀처럼 여성 목사를 청빙하지 않는다. 어려운 현실을 뚫고 청빙을 받은 목사라 할지라도 여성 목회자의 경우에는 또 다른 차별과 불평등을 감수해야만 한다. 한국교회에 뿌리 깊게 존재하는 성 역할 구분의 논리가 목사의 경우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예장통합만 하더라도 여성 목사는 2,007명(2016년 봄 노회자료)으로 전체 목사의 9% 남짓이다. 전도사의 42%가 여성인 것에 비해 턱없이 낮은 여목사 비율은 교회 공동체에서 여성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여목사의 경우 부목사, 전도목사가 과반을 넘고 무임목사도 13% 가까이 된다. 당회가 조직된 교회에서 정년까지 시무할 수 있는 여성 담임목사는 1.6%에 해당하는 겨우 27명이다. 여성이 교인의 60-70%를 차지하는 현실에 비해 매우 낮은 여성 담임목사 비율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노회와 총회에서도 발언권을 갖지 못하는 상태에서 젠더정의 실현은 매우 요원하다. 젠더정의가 지켜지지 않은 상태에서 여성 교인들에게 보내는 칭송과 찬사는 서구가 동양을 신비화하면서 착취하는 오리엔탈리즘의 구조와 닮았다. 이러한 제도적인 한계 속에서 한국교회는 남성 헤게모니에 의해 구축된 젠더의 위계화를 창조의 질서로 가르치고 있다. 이 질서에 순종할 때 여성의 권위와 신앙을 비로소 인정하는 한국교회는 여성혐오의 사회와 문화를 공고화하는 원동력인 셈이다.
4 다시 ‘강남역 살인남’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신학교를 다니다가 자퇴한 뒤 교회에서 일했다고 한다. 행동반경을 보아 그가 교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은 분명하다. 피의자는 범행 동기로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그랬다.”라고 최초 진술을 했다. 범행 현장에서 여성만을 표적으로 삼아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이는 본질적으로 여성혐오의 범죄이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 유혹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데서 혐오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강남역 여성 살해의 동기는 ‘열등한 존재이고 여자인 주제’에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대한 분노이거나, 유혹하는 본성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을 유혹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남자가 자신을 무시한 것은 참으면서 여자가 자신을 무시한 것은 살인의 한 동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강남역 살인남의 여성혐오를 한국교회의 문화와 연결시키는 것이 불편한가? 그가 얼마나 성실한 신앙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국교회의 왜곡된 젠더관, 만연된 여성혐오가 그의 살해행위와 무관하다고 입증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앞뒤 맥락 없이 여성들의 묵종을 요구하며 인용하는 “여자는 잠잠하라.”부터 “여자가 목사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택도 없다.”, “어디 여자가 기저귀 차고 강단에 올라와?”라는 끔찍한 지껄임이 신학교 교육현장에서, 그것도 총회장의 입에서, 그것도 말씀선포의 공간에서 발화되는 한국교회는 여성혐오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보수교단의 특수한 사례라고 반론할 것인가? 그러면 진보적 교단으로 알려진 유명 신학대학 이사장의 “여목사들은 원한 가득 찬 불독같이 생겨….”라고 한 기사는 오보인가?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그랬다.”라고 한 살인자의 최초 진술 때문에라도 우리는 한국교회의 여성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한 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오랜 가르침과 성서해석은 여성을 열등하고 유혹하는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여성혐오를 조장하거나 방조해왔다. “수정 단계에서부터 이미 잘못 결합된 것이 여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여성 인식은 아퀴나스에 이르러 교리적으로 수용되었다. 이러한 교리를 공과시간에 가르치지는 않겠지만, 동등한 인격성을 인정하지 않는 교회 문화가 결국 여성혐오로 이어지는 것은 자명하다. 지금도 교회현장에서는 새로 부임할 목사님이 “여자라서…” 혹은 “여자 목사는 인정 못한다. 교구를 바꿔달라.”라는 교인들의 푸념이 당연한 듯이 이해되고 있다. 청빙된 목회자에 대한 이러한 언행은 남성이 더 능력과 신뢰를 갖춘 존재임을 전제함으로써 여성의 열등성을 반증하는 여성혐오의 자취이다. 가부장적 교회에서 교육받고 성장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은 가부장적 가치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받아들이게 되며, 그 과정에서 여성은 열등한 존재이거나 혹은 유혹하는 존재라는 여성혐오 사상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5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는 한국 여성을 혐오하는 용어들이 무한증식하고 있다. 된장녀, 김치×, 김여사…. 인터넷 공간에서 제한적으로 유통되던 혐오의 언어들이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군 가산점 논쟁을 둘러싼 이화여자대학 홈페이지 습격사건이나 남자들의 능력에 기대어 과소비를 하는 여성을 함의하는 ‘된장녀’ 표상은, 결국 여성이란 남성·국가·성별 분업 체계에 의존하며 혜택을 누리는 자라는 혐의에서 탄생하였다. 그러한 무임승차하는 여성에 대한 혐오는 정당하다는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여성의 의존성과 무임승차에 대한 이러한 논리가 과연 정당할까? 산업화 사회의 남성 1인 생계 부양자 가족 모델은 남성은 임금노동, 여성은 가사노동이라는 성에 따른 역할 분업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러한 임금노동 체계에서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사노동은 노동이 아니며, 가사노동 담당자인 여성은 남성의 경제력에 의존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로 인해 남성노동에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에 대한 멸시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가사노동의 사회화, 가사노동의 임금화는 이러한 모순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환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더 이상 남성 1인 생계 부양자 모델의 유지가 힘들어졌다. 가족의 생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여성도 노동시장으로 진출해야 하기에 더 이상 공사이분법에 따른 성역할 분업의 이데올로기가 잘 작동될 수 없다. 최근 일련의 여성혐오 사건은 ‘존경받는 남편, 사랑받는 아내’로 요약되는 산업화 시대의 이상적인 가족 모델이 와해된 것과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 출산율 급락과 이혼율의 급증, 점점 높아지는 초혼 연령, 그리고 여성의 비혼비율의 급증으로 인해 여성들이 가부장적 가족의 구속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이 사는 기간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 이러한 결혼과 가족의 변동은 출산에 귀속되어 있던 성(性)이 보다 자유로워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성이 출산에서 자유로워지면서 기존의 섹슈얼리티 체계는 젠더 체계와 분리되어 독자적 영역을 가지게 된다. 그동안 물질적·심리적으로 확실한 보호막 역할을 해온 가족제도가 느슨해지는 후기산업화사회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자기계발과 고급스런 취향을 함양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게 된다. 이른바 ‘골드미스’의 등장이다. 여성에 대한 가혹한 혐오의 언어들은 더 이상 남성에게 의존적이지 않는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분노와 상실감의 표출이기도 하다. 여성들이 기대하는 경제적인 능력을 갖출 수 없고, 더 이상 책임질 수 없는 남성들의 무력감에 대한 분노가 변화된 사회구조를 겨냥한다면 더 나은 세상을 모색하는 쪽으로 논의가 전개될 수 있겠지만,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여성들에게 표적을 두는 한 여성혐오로 이어진다. 여성을 혐오하는 그들은 결코 여성들의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 생계 부양자로서의 지위 상실의 좌절을 열등하고 위험하다고 인식하던 여성의 탓으로 돌릴 뿐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온 성, 사랑, 결혼 생활이 박탈된 근본 원인이 여성에게 있는가? 3포, 5포, 7포 세대의 등장은 남성들의 자리를 뺏은 잘난 여성들의 탓일까?
6 후기산업화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1997년 IMF와 2008년 금융위기는 남편과 아내의 전통적 역할에 변화를 가져왔다. 경제적 위기로 흔들리는 남성들의 불안감은 가족의 사랑과 위로로 극복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이러한 불안감은 가정의 역할, 남성역할 수행이라는 젠더역할 수행론의 위기감으로 이어졌다. 이에 더하여 전문직 여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 가능한 여성인력의 증가 등은 남성들의 불안감을 자극하였다. 가부장적 남성성에 대한 위협이 등장할 때마다 ‘나쁜 여자’ 담론이 유통되면서 사회구조적인 문제와 갈등을 회피하려는 전형적인 형태가 일련의 여성혐오 사건이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변화일로에 있는 가족의 해체와 젠더역할 변동에 가정회복운동으로 대응하고 있다. 각종 가족 회복 프로그램을 통해 그동안 잘못된 권위를 행사해온 아버지들에 대한 재교육으로 전통적인 가족해체의 해결점을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교회의 가족 프로그램은 IMF 직후 전 국민적 운동으로 번진 ‘아버지 기살리기’ 신드롬에 편승하여 교회를 넘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하나의 대안적 사회운동으로까지 부상하였다. 그 결과 교회의 아버지 재교육 프로그램은 새로운 아버지 담론을 생산, 유통하는 대표적인 공간이 되었다. 세계 경제의 침체기에 정치권력을 장악한 영국과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이, 급증하는 사회 문제의 근본 원인을 가족의 부양기능 및 도덕적 통합력의 약화에서 찾았듯이, 한국교회의 가정사역 프로그램에서도 동일한 진단을 내린다. ‘아버지학교’ 참가자들이 강좌 때마다 복창하는 “주님, 제가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 등의 구호는 가정, 학교와 교회, 나아가 사회와 나라가 ‘아버지’에 기초하고 있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사실 IMF 이후 급속히 진행된 가족의 변동과 해체 현상은 가정 문제가 근본적인 원인이라기보다는 민주화 열풍과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확산에 더 깊이 연동되어 있다. 요컨대 경제영역의 시장화로 시작하였으나 문화영역 등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로 부상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야말로 가족문화의 전형성을 깨뜨린 주범이다. 경제적 세계화와 문화적 세계화의 결합은 친밀성 영역에도 영향을 끼쳐 새로운 가족형태를 양산하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내는 규범과 문화는 기존의 가족문화와 충돌하면서, 부모의 자녀 양육자로서의 역할 상실, 부부관계의 불안정화, 둥지로서의 가정의 역할 감소 등의 특징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핵가족 모델의 지지기반인 중산층의 약화와 더불어 독신가구의 증가, 높은 이혼율, 저출산율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가족변동을 알려주는 징후들이다.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는 핵가족 모델의 붕괴와 동시에 다양한 새로운 형태의 가족 모델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는 핵가족의 해체 현상을 ‘위기’로 파악한다. 핵가족 모델을 중심으로 한 가족적 가치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어떻게 가족이 유지되는가? 중심을 잡아주는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버지 권위복원 기획의 답변이다. ‘가정의 머리 됨, 가정의 제사장, 교회의 지도자’이다. 부부관계를 파트너십으로 인식하면서도 위계질서를 포기하지 않는다. 구성원 간의 서열적 수직관계를 형성하는 위계의 정점에는 가부장으로서의 아버지가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아버지의 ‘가정의 머리 됨’을 강조한다. 머리 됨의 은유는 절대권력의 위치를 의미한다. 가족 구성원들은 머리 됨의 권위 아래서 수직적 위계를 따를 것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오랫동안 가족은 가정의 머리(heads of households)로서의 남성의 지배를 영속화하고 여성과 아이들의 종속을 기반으로 하여 유지되어 왔다. 만약 가정에서 여자가 머리 구실을 하면 비정상적인 가정이 되고 더 나아가 ‘괴물’이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머리 됨이라는 오래된 아버지 상징은 신적 질서에 따라 구현되었다는 신성화된 가부장적 가족 모델 속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교회가 제공하는 가족 판타지는 남성의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여성의 주부, 아내,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고정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성별 분업은 성별 권력관계의 표현이다. 교회는 남성의 권위에 대한 여성의 순종을 역할의 차이 혹은 기능의 차이로 해석한다. 남녀의 역할 차이 중 하나가 순종하는 역할이라면 이는 존재론적 차이로 보아야 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 역할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Imago Dei)라는 경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즉 존재론적으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다는 것을 신앙한다면, 이러한 역할 구분은 허구가 된다. 성역할 구분에 작동하는 비가시적 권력은 부부 간의 비대칭적 권력관계의 성격을 은폐하기도 하고, 성별 분업이 마치 가족 모두를 위한 합리적 선택이라는 허위의식을 조장하기도 한다. 성별 분업이 심하게 교란되고 있는 사회적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더 많은 권력이 주어지는 가부장권이 고수되어야 가정이 바로 선다는 한국교회의 발상은 가족 내 부정의한 상황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 근본주의’로 향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불온하고도 퇴행적인 이념이다. 가장의 수입만으로 가계가 유지될 수 없는 경제구조의 변화로 인해 기혼 여성의 취업이 불가피해진 오늘날에도 가족 내 성역할 구분의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취업여성들은 직장일과 가사일을 병행하는 이중노동의 과중한 부담으로 인해 가족의 정서적 요구를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재교육 프로그램은 아버지들에게 가사일과 감정노동의 주 담당자인 여성을 도와주는 역할 정도만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한결 ‘착해졌지만’ 여전히 가족 내의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젠더역할 구분에서 한층 유연해진 아버지의 권위회복 기획의 결정적 한계는 우리 사회가 빠른 속도로 맞벌이형 가족으로 이동하는 현실에 민감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기획에서는 이중삼중의 노동의 중압감에 시달리는 직장인 아내가 여전히 가사와 육아노동에 대한 전담자이고, ‘가정의 머리’인 남편은 기껏 가정일의 보조자 역할에 국한되어 있다. 퇴근할 때 항상 웃어주고, 아내를 칭찬하고, 이부자리 정리, 설거지, 청소라도 도와주고 자녀와 항상 놀아줄 줄 아는 온유한 ‘머리’의 역할만을 강조하는 한, 신보수주의가 우려하는 가정의 위기상황은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교인의 경우는 가장을 중심으로 한 핵가족 모델을 신적 질서로 믿어왔기에, 이 질서에 대한 도전은 절대자에 대한 불신앙으로 여겨지고 죄의식과 불안감을 가중시킬 수 있다. 이러한 가족 판타지는 종종 가부장적 가족과는 다른 형태의 가족을 배제하는 폭력적인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시대의 가족은 인종과 국가, 종교, 혈연, 성별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해체되고 재구성되고 있으며,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가족형태가 등장하고 있다. 사회변동과 더불어 진행되는 가족지형의 변화는 신가부장주의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가정사역 프로그램으로도 막을 수 없다. 앞으로는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전형적 가족형태를 벗어난 다양한 가족형태가 늘어날 것이다. 이러한 가족의 다양성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정상 가족’과 ‘비정상적 가족’이라는 이분법의 해체가 요청된다. 아버지(어머니)학교, 부모교육, 결혼예비학교, 부부학교 등과 같은 가정사역 프로그램이 지배하는 한국교회의 풍토 속에서 생애 독신과 만혼, 이혼자들은 신앙적 소속감을 느끼기 어렵다. 나아가 이러한 가족 모델은 한부모, 무자녀, 소년소녀가장, 이주민, 동성 가족은 물론이고 빈민이나 실업 가족의 아이들에게도 비정상 혹은 건강하지 못하다는 굴레를 뒤집어씌우기 십상이다. 높은 이혼율과 저하된 출산율 등 가족 위기의 징후들은 가족 판타지를 통해서는 극복될 수 없을 뿐더러, 경제 단위로서 가족이 남성으로 대표되는 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의존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아버지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가족회복 기획은 자본주의의 변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부장적 가족의 위기를 아버지와 그 가족 구성원에게 해결의 책임을 전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시대의 가부장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식과 태도의 측면도 중요하지만 제도적 차원의 대안 모색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또 역할 분업이 생물학적 운명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출산과 양육의 분리를 하나의 대안으로 내세울 수 있다. 출산은 여성이 하지만 양육은 부모 모두, 나아가 사회적 공동의 책임이 된다면 성별불평등은 해소될 것이다. 7 여성들에게 조신해라, 늦은 시간 나다니지 마라, 그런 옷 입지 마라 등의 권고로는 여성에 대한 혐오·차별·폭력의 고리를 끊어낼 수 없다. 모든 범죄의 시작점은 가해자이다. 그런데 유독 성에 관련한 범죄에서는 가해자를 내버려둔 채 피해자를 단속한다. 이는 주객전도의 완벽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혐오와 차별과 폭력 없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차원에서 연대와 성찰이,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교회는 그 어떤 조직보다도 여성들의 자발적 참여가 남성보다 더 활발한 조직이다. 만약 이러한 교회가 양성평등적인 이상적 모델이 된다면 사회적 파급효과는 매우 클 것이다. 교회에서도 성에 따른 역할분업이나 차별 없이 공동체가 돌아간다면 성과 젠더에 따른 차별을 극복하는 데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편견과 혐오 없는 사회는 우리가 대망하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길이다.
참고문헌 강남순. 『페미니즘과 기독교』.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31-35. 한국여성연합성명서. “대한민국 젠더폭력의 현주소는 어디입니까?” 2016년 5월 19일.
이숙진 | 문학박사로서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현재 한국여성신학회 회장으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