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이야기

샤마니즘을 보는 개신교의 시선

ree610 2017. 3. 28. 19:56

개신교 선교 초기에 어느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은 일상생활 속에서는 유교도이고, 생각에 잠길 때에는 불교도가 되며, 곤경에 처했을 때에는 정령숭배자가 된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의 종교가 무엇인가를 알려면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국인의 종교는 ‘정령숭배’가 된다. 여기서 정령숭배는 샤머니즘과 호환 가능한 용어로서 당시 선교사들은 한국인의 고유 종교를 지칭할 때 일반적으로 샤머니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선교사 언더우드는 동아시아 삼국의 종교문화를 비교하면서 유교와 불교는 삼국의 공통 종교인 반면, 도교는 중국의 고유 종교, 신도(神道)는 일본의 고유 종교, 샤머니즘은 한국의 고유 종교라고 규정하였다.1
이처럼 샤머니즘은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의 고유 종교로 간주된 것으로 보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당시 샤머니즘은 ‘종교’의 자격을 얻지 못했다. 초기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 중에 “한국에는 종교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당시 한국에는 유교와 불교, 샤머니즘이 공존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유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윤리도덕’에 지나지 않았고, 불교는 산속에서나 간신히 찾아볼 수 있는 ‘쇠락한’ 종교였다. 성황당이나 고사, 푸닥거리, 굿, 무당 등으로 대변되는 샤머니즘 역시 종교라기보다는 우상숭배로 여겨졌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한국에는 종교가 없다.”라는 말을 자주 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는 종교가 없다고 하면서도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을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수없이 많은 정령이나 귀신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고 선교사들이 나름대로 내린 판단으로 보인다. 이는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서 수많은 신들에게 제사 지내는 고대 그리스인들을 보고 그들의 종교심이 매우 많다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이나 선교사들의 시선으로 보면 수많은 영적 존재를 향한 이방인들의 뜨거운 몸짓은 종교가 아니라 우상숭배일 뿐이다. 한국은 ‘종교가 없는 나라’이지만 한국인은 ‘매우 종교적인 민족’이라는 역설적 표현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선교사들의 임무와 과제가 분명해진다. ‘거짓 신들’을 향한 한국인들의 뜨거운 심적 에너지를 ‘참 신’에 대한 뜨거운 신앙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 이것이 선교사의 사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사의 자리에서 보면 샤머니즘은 선교의 최대 걸림돌인 동시에 선교의 성공을 위해 반드시 타파해야 하는 목표물이다.2 물론 당시 대부분의 선교사는 기독교의 복음이 확산되고 한국 사회가 문명화되면 샤머니즘은 조만간 사라지리라고 예측했다. 샤머니즘에 대한 선교사들의 이러한 인식과 태도는 한국교회와 신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샤머니즘이냐, 기독교냐
선교사의 영향력 아래에서 자란 한국교회의 신자와 신학자들은, 따라서 샤머니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한국교회의 주류는 샤머니즘과 기독교를 대결 구도로 설정하면서 샤머니즘의 궁극적 타파를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입장을 대변하는 한 신학자의 샤머니즘 인식과 태도를 살펴보자.3 그는 선교사들이 오래전에 예측한 것과 달리 샤머니즘이 한국 사회에서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번성하고 있다고 하면서 한국교회의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한반도에 들어온 외래종교들이 샤머니즘을 제압하기보다는 오히려 샤머니즘에 흡수, 동화되어 갔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불교와 유교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샤머니즘의 정체를 똑바로 파악하고 샤머니즘의 정신 풍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책을 시급히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는 지금 샤머니즘에 물든 이 땅을 복음화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오히려 샤머니즘화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라고 하면서 샤머니즘 극복을 한국교회의 지상과제이자 하늘의 사명이라고 외친다.
그러면 그가 이해하는 샤머니즘은 도대체 어떠한 것이며, 구체적으로 샤머니즘의 어떤 점이 두려운 것인가? 그가 제시하는 샤머니즘의 특징은 일곱 가지이다. (1) 귀신에 대한 공포심 조장을 통해 이성의 능력을 마비시키는 귀신신앙, (2) 세상만사를 팔자소관으로 돌려 체념과 나태심만 키우는 운명신앙, (3) 무당의 힘을 빌려 만사를 해결하려는 요행주의, (4) 굿이나 부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주술신앙, (5) 양심의 가책이나 죄의식과 같은 관념의 부재에 따른 윤리의식의 결핍, (6) 역사의 방향, 목적, 의미에 대한 관념의 부재에 따른 역사의식의 결여, (7) 사상의 빈곤에 따른 퇴행적 형태의 혼합주의이다.4
이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첫 번째로 제시한 ‘귀신신앙’이다. 귀신신앙은 운명신앙, 요행주의, 주술신앙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즉 귀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운명신앙, 귀신과 소통하는 무당의 힘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요행주의, 귀신과의 관계 속에서 행해지는 굿과 부적에 의존하는 주술신앙은 모두 귀신신앙의 파생물로서 귀신신앙에 의존한다. 그런데 귀신신앙은 다양한 귀신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 존재들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다신신앙에 속한다. 다신신앙은 유일신신앙과 대립한다. 따라서 다신론적 귀신신앙에 서 있는 샤머니즘과 유일신신앙에 서 있는 기독교는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다.
샤머니즘의 또 다른 특징으로 제시된 윤리의식과 역사의식의 결여는 기독교의 역사의식 및 윤리의식의 충만과 대조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구도에서 샤머니즘은 ‘결핍의 체계’로 등장하는 반면 기독교는 ‘충만의 체계’로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제시된 샤머니즘의 혼합주의는 기독교의 순수주의와 대립 구도를 이루면서 ‘타락의 체계’ 대 ‘순수의 체계’라는 대차대조표를 산출한다.
이처럼 샤머니즘과 기독교를 본질화하면서 양자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면 샤머니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분명해진다. 투철한 신앙을 가진 교회와 교인일수록 샤머니즘의 척결을 위해 힘쓰는 동시에 샤머니즘의 한국교회 침투를 원천 봉쇄하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의 주류 교회에서 우상 타파와 미신 척결의 기치하에 민간신앙이나 전통문화를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 전투적 태도는 이러한 본질주의적 샤머니즘 인식의 필연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무교문화론과 풍류신학
한국교회의 주류는 이처럼 샤머니즘에 대해 비타협적이고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샤머니즘에 대해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인식과 태도를 보이는 흐름도 존재한다. 1960년대에 등장한 ‘토착화신학’이 이러한 입장을 대변한다. 토착화신학자들은 ‘복음의 토착화’를 위해 한국의 전통문화와 종교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토착화신학은 유교나 불교와 같은 동양 고전종교만이 아니라 한국인의 기층신앙으로 간주된 샤머니즘과의 접목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신학자는 유동식이다. 그는 주류 교회에 의해 ‘우상숭배’로 단죄되어 온 샤머니즘을 ‘무교’(巫敎)라고 부르면서 ‘종교’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개명’ 작업은 그동안 ‘미신’으로 낙인찍혀 시민권이 박탈된 샤머니즘을 종교 영역의 정식 구성원으로 만드는 일종의 사면복권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유동식은 무교에 종교적 시민권을 부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교를 중심으로 한 한국종교사 서술을 시도하였다. 그에 의하면 무교는 불교나 유교와 같은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한국인의 심성에 자리 잡고 있던 고유한 ‘영성’으로서 한국종교사의 원류이다. 따라서 한국종교사는 무교 위에 불교, 유교, 기독교라는 새로운 지층들이 겹겹이 쌓인 다층적 형태를 취한다. 이러한 무교 중심의 한국종교사를 기초로 하여 ‘무교문화론’이 등장한다. 그의 무교문화론은 단순한 문화론이 아니라 현대 문명이 초래한 위기의 극복과 관련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양극 간의 갈등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신과 인간, 세계와 한국, 남과 북, 영과 육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분열과 갈등에서 해방되는 것이 오늘의 구원인데, 이를 위해서는 양극의 재통합과 융합이 요청된다.
바로 이 맥락에서 무교의 가치가 새롭게 부상한다. 무교는 노래와 춤으로써 탈아의 상태에서 신화적 융합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을 꿈꾸는 종교인데, 그곳은 신과 인간, 하늘과 땅, 삶과 죽음, 남성과 여성이 조화를 이루고 사는 세계이다. 태초의 한국문화는 이러한 무교문화였기에 무교문화론이 지닌 오늘의 의미와 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교문화론은 무당의 굿을 복원하거나 장려하자는 운동은 아니다. 그것의 목표는 무교적 전통 속에 들어 있는 한국적 활력소의 부활과 활용이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무교는 종교형태의 가장 원초적인 것이요, 종교사의 첫 페이지에 속하는 것이어서 거기엔 아직 원시적인 다이내믹스가 남아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을 기대해보는 것이다.” 유동식은 이러한 무교문화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연결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제거하셨다.”(엡 2:16) 요컨대 무교의 신인융합과 십자가의 화해사건은 서로 통한다는 것이다.
유동식의 무교문화론은 1980년대에는 ‘풍류신학’으로 발전한다. 그렇지만 풍류신학의 실질적 내용은 무교문화론과 그리 다르지 않다. 풍류도의 핵심은 자기부정을 매개로 한 신인(神人) 통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이가 예수였기 때문에 예수의 인격이야말로 신인이 통합하여 하나가 된 ‘풍류객’이다.5 따라서 풍류객으로서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은 ‘큰 무당’과 ‘작은 무당들’의 기독교적 표현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와 무교의 지평융합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토착화신학 논쟁에서 시작하여 무교문화론을 거쳐 풍류신학으로 이어지는 유동식의 신학적 작업은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 나타나는 미신 타파론과 우상 타파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신학적 작업은 현존하는 무교와의 대화보다는 텍스트에 나타난 무교의 재구성이라는 한계, 그리고 무교를 한국종교의 원류이자 원형으로 설정하는 데서 초래되는 본질주의의 위험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한의 종교와 한의 사제
1970-80년대 한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의 산물로 등장한 민중신학은 또 하나의 토착화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유동식으로 대변되는 무교문화론과 풍류신학이 한국의 종교문화적 상황과 대화하면서 등장한 토착화신학이라면, 민중신학은 한국의 독특한 정치경제적 상황과 대결하면서 등장한 토착화신학이기 때문이다.6 이러한 배경하에 등장한 민중신학은 억압당하는 민중의 해방을 위해 군사정권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민중의 ‘한’(恨)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이는 샤머니즘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었다.
민중신학은 ‘한의 신학’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한 맺힌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빌려 복음을 새롭게 해석할 가능성을 제공하였고, 나아가 무교와의 대화 가능성을 마련하였다. 서남동에 의하면 한은 “눌린 자, 약한 자가 불의를 당하고 그 권리가 짓밟혀서 참으로 억울하다고 생각할 때, 그 호소를 들어주는 자도, 풀어주겠다는 자도 없는 경우에 생기는 감정 상태”이다. 따라서 한은 “하늘에 호소하는 억울함의 소리, 무명의 무고(無告)의 민중의 소리 바로 그것”이다.7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한의 소리를 듣고 전달하는 매체인 ‘한의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중신학자들은 또한 무교를 천대받아 온 ‘한의 종교’라고 하면서 무교와의 적극적인 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대화는 무당들과의 직접적인 ‘신학적’ 대화가 아니라 가난하고 업신여김을 받아온 사람들의 경험과 시각을 통한 간접적이지만 현실적인 구체적 ‘대화’이다. 이러한 작업의 예로서 광야에서 예수가 겪은 유혹과 무당의 신병(神病)이 유비 관계로 파악된다.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의 한과 갈릴래아 사람들의 한을 안고 씨름을 하는 것은 무당의 신병과 통하기 때문이다. 노예가 된 히브리인들의 한을 안고 불에 타지 않는 가시덤불 앞에서 야훼 하느님을 만난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8 이러한 사건들에서는 민중의 한과 관련된 종교적 체험의 공통점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중신학에서는 예수가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며 병자를 고쳤다는 점에서 예수를 무당으로 부르고 무당은 ‘한의 사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민중의 영성이 샤머니즘적 영성이며 샤머니즘은 한으로 가득 찬 민중의 종교로 간주된다. 따라서 오늘의 민중신학자는 ‘한의 사제’로서 복음의 증언자로 부름받았다는 자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민중신학은 한의 종교, 한의 신학, 한의 사제 등의 개념을 통해 샤머니즘과 대화하면서 샤머니즘에 대한 보수 신학의 미신타파 담론을 타파하고 토착화신학의 샤머니즘 인식을 확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성령운동인가, 교회의 샤머니즘화인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토착화신학 진영과 민중신학 진영은 보수 신학에 의해 미신으로 낙인찍혀 온 샤머니즘에서 오히려 한국인의 고유한 영성으로서 ‘풍류’나 억압당하는 민중의 정서로서 ‘한’을 재발견함으로써 샤머니즘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동시에 그것을 ‘한국적 신학’ 형성의 주요 자원으로 삼았다.
개신교의 샤머니즘 인식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한국교회의 샤머니즘화’ 현상을 둘러싼 논쟁이다. 1970년대 이후 오순절 계통의 교단인 순복음교회가 급성장하면서 성령운동을 둘러싼 논쟁이 본격화되었다. 오순절 계통의 성령운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순복음교회 신도들의 기도가 샤머니즘에서의 기구(祈求)와 형태뿐 아니라 내용에서도 사실상 동일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희구하는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차원을 배제하고, 복음을 ‘복리’와 ‘축복’으로 환원시켜 단순화한 ‘탈지성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오해하거나 왜곡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결국 성령의 이름으로 무속행위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흥 성령운동’은 한국적 샤머니즘의 종교적・문화적 기능과 영합함으로써 현세적이며 세속적인 물질주의 욕망 확대에 기여하고, 나아가 소비지향적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체제에 순응하고 적응하게 하는 ‘탈정치적’ 경향으로 흘렀다는 것이다.9
이러한 비판에 대해 오순절 진영의 ‘성령운동가’들은 “성령운동은 샤머니즘이 아니다.”라고 반박하였다. 성령운동은 유일신 신관에 근거한 영적 운동이지만 샤머니즘은 이원론적 범신론에 근거한 사령운동이며, 성령운동은 성령에게 경배하지만 샤머니즘은 정령을 이용하는 우상숭배이고, 성령운동은 그리스도를 유일한 중보자로 삼지만 샤머니즘에서는 샤먼이 중보자라는 것이다.10
이 논쟁에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자기인식과 타자인식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자기인식의 측면에서 보면 오순절교회의 성령운동에 대한 비판 담론에는 기독교의 역사의식은 잘 드러나지만, 역사적 개신교에 수반된 자본주의 에토스는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한편 타자인식의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비판 담론에는 샤머니즘의 기복신앙은 잘 드러나고 있지만, 샤머니즘에 수반하는 공동체 지향성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는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자타 인식 속에 선택과 배제의 논리에 근거한 본질주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1 H. G. 언더우드 지음, 한창덕 옮김, 『동아시아의 종교』(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3).
2 좀 더 자세히 보면 선교사들마다 샤머니즘 인식의 차이점이 나타나기도 한다. 김흥수,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 선교사들의 한국종교 이해,” 『한국기독교와 역사』(2003), 19; 류대영, “국내 발간 영문 잡지를 통해서 본 서구인의 한국 종교 이해, 1890-1940,” 『한국기독교와 역사』(2007), 26.
3 문상희, “샤머니즘이냐 기독교냐,” 「새가정」(1973. 10): 40-45.
4 위의 책, 40-45.
5 유동식, 『풍류도와 한국신학』(전망사, 1992), 21.
6 김경재, 『해석학과 종교신학: 복음과 한국종교와의 만남』(한국신학연구소, 1994).
7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한길사, 1983), 243.
8 현영학, “민중신학과 한의 종교,” 「신학사상」(1984 겨울): 770.
9 서광선, “한국 교회 성령운동과 부흥운동의 신학적 이해,” 『한국 교회 성령운동의 현상과 구조: 순복음 중앙교회를 중심으로』(대화출판사, 1982).
10 박정근, 『오순절 진리를 변증함』(백영사, 1970), 21-34.


이진구 |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종교학 석사 및 박사)을 졸업하였다. 현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및 서울대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편저로 『우리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논문으로 “한국 개신교 종교교육 공간에 나타난 종교자유 논쟁”, “한국 개신교의 해외선교에 나타난 종교적 군사주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