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과 미움의 장벽을 넘어 (행2:1-13)
새문안교회 2005. 10. 9
주일 5부 예배 제42회 언더우드 학술강좌
설교 이수영 목사
저는 어제 있었던 제42회 언더우드 학술강좌 개회예배 설교에서 이번 학술강좌를 계기로 한 자리에 모인 우리는 각각 혈통이 다르고 국적이 다르며 상이한 역사와 문화전통 속에서 살아왔지만 모두 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와 증인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 되어야 하는 사명을 받았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오직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증인이 됨으로써만 중국인도 일본인도 한국인도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바벨탑 사건 이후 인간의 언어는 혼잡하여져서 사람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언어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하나 되는 일에 크나큰 장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땅 끝까지 이르러 그의 증인이 되고 모든 족속으로 그의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을 받은 제자들에게서는 이 언어불통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습니까? 그 문제의 해법은 이미 예수님의 말씀 속에 숨어있었고 실제로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실 때 그 앞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는 말씀을 붙여놓으셨던 것입니다. 또 이에 앞서서 분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내실 성령의 역사와 그 능력이 그 문제해결의 열쇠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승천하시며 하신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분부대로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며(14절)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중 오순절 날이 되었을 때 드디어 그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약속이 이루어진 놀라운 광경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가까이 따르던 많은 무리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을 때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본문 2절)했다는 것입니다. 또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3절) 있었다고 합니다. 이 새롭고 놀라운 현상들은 성령께서 강하고 충만하게 임하셨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새롭고 놀라운 것은 본문 4절이 전하는 현상입니다. 즉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6절에 따르면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고, 7-8절에 의하면 "말하는 사람들은 다 갈릴리 사람인데 듣는 사람들은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들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각지로부터 온 사람들과의 모든 언어소통의 장벽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오직 성령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형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미래형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그것은 제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실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하여 땅 끝을 향하여 나아가기도 전에 벌써 땅 끝의 지방들로부터 사람들이 몰려와 있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의 말로 제자들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듣고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또 성령께서 임하신 것은 인간회복을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상실을 가리키는 것 중의 하나가 언어의 불통 즉 의사소통의 단절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안 통하는 것보다 더 삶을 답답하고 불안하게 만들며 절망하게 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어는 있어도 서로 간에 말이 안 통하면 사람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말이 안 통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말이 안 통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세 가지 경우로 봅니다. 첫째, 자기중심적 사고와 욕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이 안 통하는 것을 봅니다. 같은 말을 쓰지만 속으로는 각각 서로 다른 계산들을 하고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문서답들을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둘째, 한 쪽이 진실하지 않거나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말이 안 통하는 것을 봅니다. 셋째, 서로가 말이 다를 때에는 누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주면 되는데 통역해주는 사람이 없거나 통역이 엉터리이면 말이 안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참으로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말을 쓰면서도 말이 안 통하는 소통장애의 시대, 인간상실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온갖 언어의 장벽을 해소시키시는 성령의 역사는 바로 인간회복의 복음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적 사고와 욕심을 버리고 남을 배려할 줄 알게 해주며, 우리를 진실하게 해줌으로써 서로 믿을 수 있게 해주고,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말이 쉽게 통하는 편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게 해줄 유일한 중재자, 완전한 통역자는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인간 스스로는 진정 말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말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 모두의 주인이 되시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 모두의 사고를 조율해주실 때 우리를 갈라놓고 의사소통을 막는 모든 장벽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통한다는 것은 단지 의사소통을 넘어서서 함께 삶을 나누는 데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오셔서 역사하심으로써 단지 다양한 언어를 뛰어넘는 의사소통뿐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 나눔의 삶이 이루어졌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행2:44-46에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또 행4:32-35에 보면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합니다.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 개인주의적인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없었고 따라서 그런 사람에 대한 미움이 일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욕심과 미움은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또 그 사이에 장벽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 되기 위해 무엇보다 제거해야 할 것이 욕심과 미움입니다. 미움이 남아있는 한 진정한 화해는 불가능하며,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불화는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들 사이에서나 한 신앙공동체 안에서 뿐 아니라 국가들 사이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의 흐름과 오늘의 현실은 21세기가 동북아의 시대임을 분명히 보게 합니다. 과거의 두 초강대국이었던 미국과 러시아와 더불어 중국, 일본, 한국이 세계를 이끌어갈 수밖에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입니다. 이제 동북아 3개국의 화해와 협력과 일치는 곧바로 세계의 평화와 번영으로 이어지며, 이들 3개국의 불화와 균열과 대립은 곧바로 세계의 긴장과 불안으로 나타날 시대가 전개될 것입니다. 따라서 동북아 3개국의 화해와 협력과 일치는 시대적 명령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나라가 편협한 민족주의와 국가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패권주의적 욕심과 과거사에 집착하는 미움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패권주의와 과거사는 계속해서 동북아 3개국의 화해와 협력과 일치에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과거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를 부인하거나 왜곡시키는 것은 현재를 혼란시키며 미래를 어둡게 하는 일입니다. 과거를 잊어버리는 나라는 미래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집착하는 나라는 미래를 세울 능력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패권주의를 깨끗하게 포기하고 과거사를 바르게 정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욕심과 미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화해와 협력과 일치라는 시대적 명령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진정한 실천은 오직 성령의 역사와 기독교신앙 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특히 나라들 사이의 참된 회개와 사죄와 용서와 화해와 일치와 협력은 진실한 기독교신앙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에 21세기의 동북아에 있어서 기독교의 자리와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요 증인들로서의 오늘날 우리 자신의 이 자리와 사명을 직시해야 합니다. 남이 하기를 바라고 바라보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서있고 그 사명을 안고 있음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참여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젊은 세대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이 자리와 사명을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청년들이 지금의 우리들보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더 많이 사랑하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동북아에서의 화해와 협력과 일치를 이루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할 미래의 일꾼들이 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함께 논의하기 위하여 오늘 우리는 모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고 역사하셔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가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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