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결제"라는 K-시위 문화]
선결제’라는 새로운 문화가 생겼다. 12월 14일 여의도 마녀김밥에는 김밥 500줄이 선결제됐다. 파리바게뜨 여의도KBS점에는 코드명 ‘김민주’를 대면 누구나 마실 수 있도록 500만원어치 아메리카노가 선결제됐다. 한 프랑스 동포는 5.18 당시 계엄군의 딸이었다면서 1천 잔의 커피를 선결제했다. 많은 이들이 지갑을 열어 순대국도 김밥도 시위현장에 참여하는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쐈다.
다른 나라 시위현장에서는 선결제와는 정반대인 약탈행위가 종종 벌어진다. 미국에서는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에 대한 항위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이때 로스앤젤레스와 산타모니카에서는 슈퍼마켓 등 시위대가 상점들이 약탈당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프랑스에서는 2023년 6월, 10대 청소년의 경찰 총격 사망 사건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이때 파리 근교에서는 군중들이 트럭으로 쇼핑센터를 열고 물건을 들고 나온 뒤 불을 질렀고, 마르세유에서는 도서관을 부수기도 했다.
물론 외국에서도 시위현장에 음식 등을 지원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주로 비영리단체 등 기관들이 지원하는 것이지, 익명의 개인들이 나서서 선결제하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 시민들이 보여준 모습은 세계를 놀라게 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진단이 많이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 늘 분열되어 티격태격하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지만, 함께 지켜내야 할 무언가를 발견하자, 장갑차를 몸으로 막고 지갑을 열어 선결제를 하고 소중한 응원봉을 꺼내 휘두르며 한 곳으로 모여 한 목소리를 냈다. 잠시 패배해도 지치지 않았고, 싸움을 축제로 승화시켰고, 승리를 즐길 줄 알았다.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강연록 ‘빛과 실’에서 이렇게 썼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12월 4일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 발생부터 12월 14일 국회의 대통령 탄핵 가결까지 11일 동안, 우리는 가장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시간부터 가장 아름다운 시간까지를 건너왔다. 1980년, 1987년에 피흘린 시민들이 남긴 유산을 2024년의 시민들이 아름답게 지켜냈다. 함께 분노하며 거리로 뛰쳐나간 시민들은 미래세대를 위해 다시 선결제를 해둔 셈이다. 코드명 ‘민주주의’로.
- 이원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