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아/영성

칭찬받는 헌금!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 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ree610 2024. 10. 4. 12:00

칭찬받는 헌금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 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렙돈 두 닢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막 12:41~44)

첫째. 헌금을 강요한다는 시비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헌금은 매우 도전적인 주제가 되었습니다.
사렙다 과부의 헌물(빵 한조각)이나 두 렙톤(200원 정도)을 바친 과부의 헌금은 자발적인 헌신의 모범으로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팎에서 헌금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시비와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헌금 강요의 대부분이 목회자와 교회지도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든지, 헌금을 바치는 사람들의 동기가 모호하다든지, 교회가 헌금을 사용하는 방식이 적절치 않다든지 하는 이야기들이 그런 예에 속합니다.

위에서 말한 시비 거리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헌금의 윤리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밝혀봅시다

교회에 모이는 많은 사람들은 헌금이 신도의 의무임을 잘 알고 있지만, 헌금이 교회의 문턱을 높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헌금주머니 돌려 수전하는 것을 잠자리채로 헌금을 강요한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헌금을 강조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교인들이 헌금을 통하여 헌신의 자세를 갖도록 훈련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과제입니다.
교회 재정의 자립을 달성하기 위해서 신도들이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을 탓할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교인들이 헌금을 강요받는다는 생각을 할 만큼 헌금이 지나치게 강조된다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둘째. 헌금 액수가 교회 성장 지표가 됐습니다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에서 교인들의 헌금은 교회 재정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것은 이들 교회들이 개교회 차원에서 재정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의 헌금이 줄어들면 교회는 심각한 재정 압박을 받게 되고, 교회의 발전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재정 수단도 빈약해집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교인들의 헌금을 독려할 수밖에 없고, 교회의 발전을 위해 교회당 건축이나 기타 부대시설 들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교인들에게 특별 헌금을 요청할 수밖에 없도록 구조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헌금의 강조는 한국교회의 성장 강박과 긴밀한 관계가 있슴니다.
1960년대 중반 이래로 한국교회는 세계교회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1990년대 초까지 한국교회의 초고속 성장은 인구의 4분지 1을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재의 증거로 여겨졌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목회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한 목회자는 카리스마를 받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고 교인들에게서 신망과 존경을 얻지 못하는 분위기가 까지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장은 강박이 된 것입니다.

교회 성장은 교인들의 숫자와 그들이 내는 헌금 액수, 이 두 가지 지표들에 의해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성장을 도모한다면, 그것은 필경 양적 성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셈입니다.

셋째. 헌금 유도하는 '축복 기계'는 철거돼야 합니다

양적 성장의 강박에 휩싸인 교회에서 교인들의 수효가 감소한다든지 헌금 액수가 줄어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것으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교인들을 동원하기 위해 정교한 장치들이 강구되고, 교인들이 헌금을 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도록 만드는 정교한 축복 기계들이 설치되었습니다.
헌금과 축복을 직결시켜 생각하도록 만드는 모든 관행을 '축복 기계'라고 간주해도 될 것입니다.

목회윤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국교회의 개교회 중심적인 재정 구조와 성장 강박, 그리고 축복 기계는 철거되어야 마땅합니다.
대형 교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헌금을 모을 수 있지만, 전체 교회의 70%에 달하는 교회들은 재정적으로 미자립 상태에 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다든지, 인구가 끊임없이 이탈하고 있는 농촌 지역이나 산업 공동화 지역에서 특수목적을 위해 선교하는 경우 등 교회가 오지에 있을 경우에는 교회의 재정적 자립을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이러한 불균형을 그대로 방치하고서 거대한 규모의 헌금을 모으는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가 내렸다고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지역 교회들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 목회자들의 생활비를 동역자들의 연대 정신에 입각해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재정의 개교회 중심주의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넷째. 노회와 총회 차원에서 헌금 재분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크기와 교회의 지역적 분포 등을 넘어서서 전체 교회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교회헌금을 노회와 총회 차원에서 재분배하는 장치를 마련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장 강박의 폐해는 더 강조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모인 사람들은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의 소수파여야 합니다.
"하면 된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밀고 나간 군사 정부 시절에 교회가 성장 강박에 휩싸인 것은 비판적으로 짚고 넘어 가야 할 대목입니다.
"하면 된다!"고 외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잘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하기 위해서는 바르게 해야 합니다.
선은 정의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는 양적 성장의 강박에서 벗어나 아브라함의 소수파로서 질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갈 때가 되었습니다.
교인들을 동원의 대상으로 삼거나 축복 기계에 묶어두는 일은 교인들의 영적 능력을 억누르고, 생각과 판단과 행위의 자율성을 훼손시키고, 교회에서 개방 비판주의를 추방하는 결과를 빚어낼 것입니다.

다섯째. 교인들은 어떤 동기로 헌금을 냅니까?  

대부분의 교인들은 헌금을 바치며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정성과 의지를 표현할 것입니다.
사렙다의 과부가 두 렙톤을 바치는 것을 예수님이 보고 칭찬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헌금의 정신입니다.

헌금은 강요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헌금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겠다는 자발적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십일조가 축복기계의 작동을 원활하게 하는 동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모든 교인들이 이러한 순수한 마음을 갖고서 헌금하고 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헌금을 바치는 교인 가운데 일부는 헌금을 바치면 하늘의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그 복을 받기 위해서는 헌금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교인들의 이러한 생각을 촉발하고 강화하는 것이 앞서 말한 '축복의 기계관'입니다.
이 기계는 교인들이 삶에서 더 좋은 기회를 얻고자 안달하면 안달할수록, 불안한 세계에서 안정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더 잘 작동합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재물을 훔치는 것이라는 서슬이 시퍼런 가르침은 이 기계의 작동을 원활하게 합니다.

헌금하면 하늘에 재물이 보관된다는 신념도 피안의 복락을 염원하는 신자에게는 헌금을 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어수룩할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세상에서의 복락과 피안에서의 복락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는 것이 실용적이라고 믿을 것압니다.

아주 세속적인 이야기이지만,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중요한 인물로 대접받는 풍조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는 것은 교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욕구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의 풍조가 세상의 풍조와 달라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교회와 세상의 통로가 항상 열려 있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의 풍조를 따르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개교회 중심의 재정 구조가 굳어져 있는 한국교회에서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 돈을 어떻게 벌어들였건 교회에서 당연히 환영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헌신의 가시적 표현이 교회 출석과 헌금일진대 이 두 가지를 잘 하는 사람이 교회에서 중책을 맡는다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헌금은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인정투쟁에서 승리하는 길로 여기는 셈입니다.

일곱째. 헌금은 교회 안에서 인정받기 위한 가장 실용적 수단이 되어서는 안 뜁니다.

목회윤리의 관점에서  성서의 몇 구절에 대한 굳어진 해석으로부터 벗어나서 헌금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재물을 훔치는 것을 직결시킨 말라기의 경고는 당대의 사제(제사장, 오늘날의 목사와 장로)들에 의해 십일조가 착복되었던 현실을 반영합니다.

백성이 하나님에게 바친 십일조가 사제들에 의해 절취되는 일은 그 당시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흔히 목사와 장로에 의한 헌금 절취사건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의 경고는 오히려 교회의 회계담당자와 재정담당자, 건축담당자, 목회자에게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전을 보수하기 위하여 바쳐진 헌금이 다른 용도로 사용된 전례가 열왕기상하서와 역대기상하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짐작됩니다.

하늘에 재물을 쌓아 놓으라는 예수님의 권면은 재물의 사용을 '만물의 주재자의 뜻에 맡기라'는 가르침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쌓은 재물이 좀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맡겨진 재물이 좀 같은 훼방꾼들에 의해 허투루 사용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헌금이 하나님나라와 그 나라의 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는 뜻을 나타낸다면, 헌금을 바치는 것은 축복기계와 무관한 자발적인 행위여야 할 것입니다.

헌금은 실용주의와 위신의 수단이어서도 안 됩니다.

헌금은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이고, 그 분의 뜻대로 쓰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나 기독방송이나 많은 종교집회에서 행해지는 많이 바쳤더니 큰 축복을 받았다는 간중들이 자칫 기복신앙으로 잘못 몰고가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헌금이나 십일조가 축복받기위한 수단이나 교회에서 인정받는 도구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진실된 헌금과 십일조는 은혜와 감사가 넘쳐서 바치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어 내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내 지는, 바치는 것이 아니라 넘치는 감사 때문에 바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바쳐지는 헌금 입니다.
이런 헌금이 예수님이 그토록 극찬하신 사렙다 과부의  두 렙톤 같은 귀한 헌금이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타율의 헌금사슬의 고리를 과감히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칭찬받는 기쁨과 감사로 날개를 펴는자율의 헌금생활로 나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by 강원돈 / 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 일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