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 서거 15주기 추모사 전문>
존경하는 김대중 대통령님!
대통령님께서 떠나신 지 어느덧 15년입니다.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지만, 대통령님의 빈자리는 여전히 크고 대통령님을 향한 그리움은 더욱 깊어집니다.
대통령님은 세계적인 민주주의·인권 운동가였고 대한민국을 바꾼 대통령이었으며, 국민의 무한한 자부심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대통령님을 추모하며
민주주의와 민생, 한반도 평화에 새겨진 ‘김대중의 길’을 되새깁니다.
대통령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온 국민의 마음이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님은 진정으로 국민을 사랑한 지도자셨습니다. “이 국민이라면 해낼 수 있다.”
독재에 맞서 싸울 때도, IMF 국난을 헤쳐나갈 때도 대통령님은 언제나 국민을 믿고, 국민을 섬기셨습니다.
“국민의 손을 잡고 반걸음만 앞서 나가라.”
민심을 무시하는 정치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여론과 시류에 영합하는 정치는 아니었습니다. 해야 할 일이라면, 비판을 감내하고라도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대통령님은 국민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고, 대한민국과 한반도에 새로운 길을 열어내셨습니다. 그 담대한 리더십, 국민을 섬기는 리더십을 존경합니다.
대통령님의 일생은 모진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그 어떤 핍박도 민주화를 향한 당신의 신념은 꺾지 못했습니다. 30여 년 군사독재 그 캄캄한 어둠의 시절에도 대통령님께서는 역사와 국민을 믿으셨습니다.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저항과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고 우리 국민은 마침내 김대중과 함께 민주주의 승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런 대통령님과의 만남이 저를 이곳까지 이끌었습니다. 87년 대선에서 낙선한 당신을 지키겠다고 88년 초, 98명의 재야인사와 함께 평민당에 입당한 것이 제 정치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직자로 군부독재의 인권유린 현장을 발로 뛰며
정당 최초의 인권백서를 펴냈을 때, 제 손을 꼭 잡고 “정말 수고했어.”, 격려해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또렷합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또,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 곁에 가서 살피고, 그것으로 국회를 움직이는 것이 정치의 본 모습”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는 평민당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 가르침이 제가 시작했던 을지로위원회의 정신이 되었고 그 길이 저를 국회의장으로 이끌었으니, 제가 선 지금 이 자리는
김대중 대통령님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남북관계가 나날이 대결로 치닫고, 한반도 평화가 흔들리는 지금, 대통령님 같은 지도자가 계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하루하루 절감합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으로 6.15 남북공동선언이라는 겨레의 이정표를 세우셨습니다. 끊겼던 길이 연결되고, 이산가족이 만나고, 경제협력이 시작됐습니다. 기적 같은 변화였지만, 어느 한순간 기적적으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습니다. 반세기 넘는 적대관계의 철조망을 넘는 일이 결코 쉬울 리 없었습니다.
햇볕정책 앞에도 시련은 있었습니다. 정치와 경제는 분리하고, 가능한 분야부터 화해 협력을 추진한 대통령님의 지혜와 함께 소 떼가 판문점을 넘고, 금강산 가는 길이 열렸지만 정상회담까지 가는 걸음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사건이 생길 때마다 햇볕정책은 시험대에 올랐고, 대북강경책을 유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대통령님은 온 힘을 다해 보여주셨습니다.
북한의 군사도발에는 강력하게 대처하면서도, 화해와 협력으로 가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안보태세와 화해‧협력이 상충하는 것이 아니고
대화는 유약함이 아니라 진정한 용기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셨습니다.
그렇게 그 어떤 위기 앞에서도 화해와 평화를 실천한 대통령님의 용기가, 대통령님의 발자국이 모여
대립하고 적대하던 남과 북 사이에 새길을 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길이고 우리 경제와 국민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만드는 길이었습니다.
햇볕정책을 끌고 간 힘, 또 한 축은 대통령님의 외교 철학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외교가 가장 필요한 나라다.”
“국내정치는 실수하더라도 고치면 되지만 외교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다.”
대통령님께서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과 외교의 엄중함을 강조하셨고, 한반도 주변 4대국 정상외교에 먼저 힘을 쏟으셨습니다. 햇볕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남북정상회담의 성사에 앞서 4강 외교가 매듭지어진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대통령님께서는 또, 처음으로 일본의 과거사 반성과 사죄를 공식문서화하고 이를 토대로 포괄적 협력방안을 제시하셨습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입니다. 대통령님의 외교는 이렇듯 미래를 향했고, 우리는 대통령님과 함께 더 나은 내일을 꿈꿨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그립습니다. 취임하시던 그 날, “국민의 고통 앞에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금할 수 없다”며 목메여 하시던 그 모습이 그립고 평생의 삶으로 보여주신 도전과 용기, 지혜가 그립습니다.
그러나 대통령님, 조금 더 힘을 내겠습니다. 갈등과 위기가 중첩되고 나라의 정체성과 민주주의, 민생, 평화가 흔들리고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더욱 또렷해지고 있습니다.
생애 마지막 연설에서 말씀하신, 그래서 유언과도 같은, ‘행동하는 양심으로 평화로운 남북관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 희망이 있는 나라’를 만들자고 하신, 바로 그 길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외세로부터도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이 또렷한 나라, 그 길입니다.
어떻게든 길을 뚫겠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과 국민을 사랑한 대통령님의 신념과 헌신을 가슴에 새기고 따르겠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이제 인동초 세월의 고단함을 씻고, 그곳에서 부디 평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우원식 국회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