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정과/설교 자료

5월 12일(부활절 7주) 어버이주일 설교

ree610 2024. 5. 7. 17:25

교회력 (5월 12일, 부활절7주/승천주일/어버이주일) 설교 자료

글쓴이 : 조헌정
참고: (『Feasting on the Wor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9)

● 《Feasting on the Word》는 미국과 캐나다 대부분의 교단(가톨릭 포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수백 명이 참여하여 만든 3년을 한 주기로 한 상당한 분량의 교회력 본문 보조 자료 책자이다.
한 본문에 대해 네 가지 관점에서 네 명의 저자들이 글을 썼지만, 중복되는 부분도 있고, 북미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한 글이기에 한국교회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다.
절기 구분에 있어서 본 책은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순으로 언급하고 성령강림절 이후는 날짜에 따라 구분하여 특정절(Proper)로 부르고 있는데, 한국교회가 만든 창조절을 겸하였다.
그러나 교단별로 창조절 적용 구간이 다르기에 사순절과 같이 성령강림절 기간을 7주(50일)로 하고 그 이후부터 창조절로 부른다.

* ‘신,구약성경’ 대신 ‘제1,2성서,’ ‘하나님’ 대신에 ‘하느님’ 용어를 사용한다. ‘야훼’ 대신 YHWH로 표기한다. 이에 대한 설명은 글 끝에 첨가해 두었다.

* 신학은 상징의 언어이며, 상상력에 관한 언어로, 언어 너머 저편의 무언가를 알아차리기를 추구한다. 신학은 반이성적이지 않지만, 비이성적으로 이성적 담론의 세계를 초월하고, 상상력의 도구로만 포착할 수 있는 실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제임스 콘)

* 복음은 원래 가난한 자들의 복음이었던 것이 부자들의 복음으로 변해버렸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주인과 종을 같은 죄인이라고 균등화하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죄를 범하는 것이고 현실의 잔혹한 불평등과 비참한 가난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을 낳고 부자들의 자기 의인을 다져주게 된다. 부를 같이 나누려 하지 않고 죄만을 같이 나누는 것이다. (서남동)

* 주일은 매일매일에 대한 반역이다(Sunday is a rebellion against everyday). (도로테 죌레)

* <동물은 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신학한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의 본질은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이미 신학함을 의미한다. 인간 현존재 자체는 그 본질상 우연이든 아니든 신학 안에 들어서 있다.> 이는 하이덱거의 <철학 입문>에 나오는 글로서 <철학>이란 단어 대신 필자 임의로 <신학>이란 단어로 치환한 문장이다. 그런데 <나의 철학은 신을 기다리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으니 하이데거 또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반대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20세기 독일 신학자의 발언이고 21세기 동방에서 살아가는 필자에게는 그 반대 또한 성립한다. 물음 속에 대답이 있고, 대답 속에 물음이 있다.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가능성이란 지평 안에서 하나이다. 성서연구란 대답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오늘의 질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주일 본문]
  행 1:15-17, 21-26; 시 1; 요일 5:9-13; 요 17:6-19

{사도행전 1:15-17, 21-26}

15  그 무렵에 신도들이 모였는데, 그 수가 백이십 명쯤이었다. 베드로가 그 신도들 가운데 일어서서 말하였다.
16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를 잡아간 사람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대해서는 성령이 다윗의 입을 빌어 미리 말씀하신 그 성경 말씀이 당연히 이루어진 것뿐입니다.
17  그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우리 직무의 한몫을 맡았었습니다.
21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에,
22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로부터 시작해서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와 함께 다닌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뽑아서, 우리와 더불어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23  그래서 그들은 바사바라고도 하고 유스도라고도 하는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24  기도하여 아뢰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주께서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뽑아서
25  이 섬기는 일과 사도의 직무를 맡기시겠는지,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가 갈 곳으로 갔습니다."
26  그리고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맛디아가 뽑혀서,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의 수에 들었다.

[신학적 관점]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로부터 숫자 12는 우주의 완전한 질서와 주기를 상징했다. 동그라미에 열 개의 균등한 점을 찍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12개의 점은 가능하고, 또 해와 달을 제외하고 가장 빛나는 별은 목성인데, 그 주기가 12년이다. 우주를 수직으로 파악하는 숫자 3(천상, 지상, 지하)과 수평으로 파악하는 숫자 4(동서남북)를 곱하면 12가 된다.

저자 누가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숫자와 함께 예수따르미들을 제1성서의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대신하는 ‘새 이스라엘’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 참조-누가는 예수의 확대된 제자를 72명(판본에 따라 70명, 눅 10:1)으로 말하는데, 이는 12X6이다. 이는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144,000(12X12X1000)의 절반이 된다. 12X12를 최종 완성의 상징 숫자로 이해한다면, 이는 이방선교가 빠진 팔레스타인에 국한된 선교라는 의미에서 절반의 의미를 담고 있다.

부활 예수가 지상에 머무는 때, 예수가 직접 뽑지 않고 왜 예수가 떠난 이후 사람들에 의해 뽑았는가?

[목회적 관점]

검증된 두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의 지도자를 선출해야 하는 경우, 작은 표 차로 결정됨으로 분란의 아쉬움을 남기는 투표보다는 제비뽑기가 교회 화목(和睦)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한국장로교 총회법 3분지 2 이상을 적용할 경우 뽑히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미국장로교는 과반수로 되어 있다.

[주석적 관점]

제2성서 어느 곳에서도 맛디아(하느님의 선물의 뜻)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18-20절을 포함하지 않는 이유는 가룟유다의 죽음을 다르게 설명하는 마태복음(27:5)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함이다.

16절의 ‘미리 말씀하신 성경 말씀’은 시편 109:8(’이제 그만 그의 명을 끊어버리고 그의 직책일랑 남이 맡게 하자‘)이 가장 적절하다.

[설교적 관점]

교회 지도자를 선택하는 일은 언제나 잡음이 일어난다. 성서 어디에도 요셉과 맛디아 두 사람에 관해 전혀 언급이 없다. 두 사람 모두 예수와 함께 했다는 가정만 존재한다. 그런데 요셉은 바사바와 유스도라는 두 개의 별명이 있었던 반면 맛디아는 별명이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공동체 내에서는 요셉이 더 유명한 혹은 더 유능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선택은 맛디아가 되었다. 뽑힌 맛디아가 아닌 하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요셉의 입장에서 설교를 진행해 보면 어떠할까?

{시 1 편}

1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2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3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서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 맺으리.
4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5  야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6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의인의 길은 야훼께서 보살피신다.

{요한일서 5:9-13}

9  우리가 사람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증언은 더욱더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두고 증언하여 주셨다는 그 사실입니다.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그 증언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두고 증언하신 그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1  그 증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그 생명이 그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12  그 아들을 모신 사람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13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신학적 관점]

이 글이 쓰인 로마제국 시대에는 신의 아들로 불리는 황제가 있었고, 이를 숭배하는 사람들 또한 황제를 하느님께서 증언하신 신의 아들이며, 그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신학 교리로는 본문의 주장과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이 어떤 의미에서 참이라 말할 수 있는가? 이는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신의 아들 예수가 제국의 폭력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과 이를 신의 아들로 믿은 사람들이 당시 모두 사회적 약자였다는 사실이다. 곧 인간의 약함 가운데서 신의 강함을 얘기할 때, 그 주장은 참이 된다.

[목회적 관점]

예배에서 교인들의 신앙 증언(간증)을 나누는 일은 중요하다. 이때 잘못하여 자기 자랑이 되지 않도록 본문 말씀에 맞추어 원고로 정리하여 나누도록 한다. 필자는 한 달에 한 번 교인은 생활 증언으로 목사는 말씀 증언으로 함께 하였다.

[주석적 관점]

요한1서의 주장은 요한복음의 가르침을 전제로 한다. ‘사람의 증언’이란 요한복음에서의 세례 요한과 사랑하시는 제자의 증언 그리고 자신(장로 요한)의 증언을 말한다.

[설교적 관점]

영원한 생명이란 어떤 의미인가? 불사(不死)의 생명인가? 천국에서의 삶인가? 부(富)와 무병장수(無病長壽)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장 큰 행복의 지표이다. 그러나 설사 이 둘을 동시에 누린다 하더라도 인간은 결국 교만에 빠져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의 소중함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자기 소명을 깨닫는 일이다. 인간은 육체의 한계성에 갇혀 있는 유한한 존재이다. 영원이란 하늘의 부름에 응답하는 카이로스의 순간(결단)을 말한다. 하루를 살아도 하늘 부름의 길을 기쁘게 걸었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자가 된 것이다.

{요한복음 17:6-19}

6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본래 아버지의 사람들인데, 아버지께서 그들을 내게 주셨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9  나는 그들을 위하여 빕니다. 내가 세상을 위하여 비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빕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10  나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입니다. 나는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습니다.
11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12  내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서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는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멸망의 자식만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13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것을 아뢰는 것은, 내 기쁨이 그들 가운데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17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19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신학적 관점]

이보다 더 아름답고 영혼을 울리는 글이 있을까? 필자에게는 영혼을 울리는 한 편의 시이다. (대제사장으로서의 중보기도라는 전통적인 해석도 있지만...) 부활 이후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저자 요한의 개인 이해인지(편집사적 관점) 아니면 요한공동체(양식사적 관점)의 이해인지 아니면 이 둘의 견해가 함께 어우러진 이해인지 하는 현학적인 질문이 생기긴 하지만, 이건 중요하지 않다. 주류 유대공동체로부터 추방을 받을뿐더러 황제숭배를 강요하는 로마국가권력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던 요한공동체는 분열과 해체의 위협뿐만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유혹에 직면하고 있었다. 저들은 로고스(logos, 태초 존재 말씀) 이데아의 관점에서 자유를 찾아 더 높이 올라가야 했고, 인간 해방의 관점(sarx, 투쟁 화육)에서 더 낮아져야 했다. 이 양자의 조화를 이보다 더 훌륭하게 설명할 문장은 없을 것 같다.

신학은 분석적이기보다 종합적이어야 한다. 종합하려면 이성을 넘어서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언어를 통과해야 하는데, 언어는 비판이 전제되고, 비판은 결국 분리를 낳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이 영지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기는 하지만, 세상 안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결론에서 확연하게 차별성을 갖는다. 그건 영지주의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물질 세상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있는 하느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인간 세력을 악하다고 보기 때문이다.(15절)

외부인들에게는 십자가 죽음의 동기를 제공하는 요한이 즐겨 쓰던 ego eimi 화법의 설명서이다.

[목회적 관점]

교회는 때때로 삶의 현장을 떠난 수련회를 통해 예수 신앙 영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예수 영성의 목적은 (변화)산 위에서 머무는 영성이 아닌 산 아래로 내려가기 위함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구절을 놓고 벌인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의 논쟁은 유명하다. 필자는 브루너 쪽에 약간 기울지만, 어쩌면 인간이란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16절), 세상 안으로 보냄을 받았다(18절)는 관점에는 두 사람 모두 동의할 것이다.

[주석적 관점]

신이 남성 여성이라는 이분법으로 구분될 수는 없다. ’아버지‘를 ’어버이‘로 표기하는 것이 정당하다.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됨의 친밀한 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우리 말의 ‘어버이’와 같이 아람어나 헬라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부르는 단어가 있었다면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YHWH 대신 adonai(주인님)라고 불렀다. 이는 노예들이 주인을 부를 때의 용어이기도 하다.

9절은 ’세상을 사랑하사...‘(3:16)와 충돌한다.

11절의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간구는 우리 인간들이 서로 하나되게 해달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예수가 YHWH와 하나이듯이 우리 또한 YHWH와 하나되게 해달라는 뜻인지, 아니면 이 둘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인지? 교회일치(에큐메니칼) 운동의 핵심 구절이기도 하다. 본문은 문장구조로 보면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는 가운데 예수께서 전하신 말씀의 일부이다. 성찬식의 신앙 의미를 담고 있다.

[설교적 관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지만‘(16절)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18절)이란 자각에 있다. 설교를 통해 끊임없이 이 사실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세상 일에 묻히지 않도록 들쑤셔야 한다.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야 한다.

’거룩‘이란 본래 뜻은 ’구별하다‘에 있지만, 이는 세상의 더러움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자기 의인화에 있는 것이 아닌, 타자(세상)를 거룩하게 하게 위함이다.(’그들을 위하여,‘ 19절) (등잔의) 빛과 소금이 거룩한 것은 자기 몸을 태우고 녹여 세상을 변혁하기 때문이다. 이를 ‘기쁨’으로 여기는 힘이 곧 십자가 신앙이다.(13절)

44주기 518민주화기념주일에 맞추어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쓰러져 간 영령들을 추모하고 보다 나은 세상(하느님 나라)을 향한 결단의 시간이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승천(昇天)이란 하늘로 올라감으로 세상과 멀어진다는 의미가 아닌 하늘로부터 주시는 능력으로 세상을 변혁시킨다는 의미이다.(참조. 요 20:17 이하)

[어버이주일 예화 1]

작자 미상. [우리 어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첫사랑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절대 아프지 않는 특별한 분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짧은 파마머리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얼굴이 고와지고 몸매가 날씬해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전화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꿈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예화 2 이대흠 [어머니 동그라미]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일항가 댕가 하고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강가 낭가 당가 랑가 망가가 수시로 사용되는 어머니의 말에는 한사코 ㅇ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남한테 해코지 한 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이생을 흙 속에서 산,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가진 것을 퍼주신다.
머리가 땅에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

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
어머니는 한사코
오손도순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예화 3.

영국의 아동 심리학자인 퍼넬러피 리치 박사는 어머니들에게 지혜를 나눠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한 엄마가 자기 딸이 아주 어린 나이에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자랑했고 딸의 재능을 그 자리에서 보여주었다. 성공적인 조기 교육의 한 사례였다. 그러자 리치박사는 그 아이가 비범한 것을 인정하고 나서 잠시 침묵한 후에 그 엄마에게 ‘언어의 기술보다 더욱 고귀할지도 모르는 다른 귀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엄마는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리치 박사는 “만일 당신의 딸이 덤불 속에 갇힌 나비를 구출해 주거나, 자신에게 못되게 한 친구가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을 닦아준다면 아이는 더욱 비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깨달음의 하나님] 최성철 북성재 2012. 109쪽)

{부록: 용어해설}

[하느님]

필자가 ‘하느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는 ‘무한히 크다’라는 뜻의 ‘ㅎㆍㄴ’ 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재 대부분 개신교인에게 이는 숫자 ‘하나’를 강조하는 유일신 신앙을 뜻한다. 둘째, 훈민정음에 따르면 아래ㆍ의 발음은 모음 중 단전을 울리는 가장 깊은 소리이다. 아래ㆍ 소리가 사라진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기호음성학의 관점에서 볼 때 ‘ㅏ’ 소리보다는 ‘ㅡ’소리가 아래 ‘ㆍ’ 소리에 가깝다. 셋째, 평화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 신앙으로 인해 십자군 전쟁 이래 세계는 전쟁과 폭력이 그치지 않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도 1960년대 초까지는 ‘하느님’을 주로 쓰다가 유일신 신앙 강조와 토착 민속신앙과의 차별화를 위해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대화와 소통, 화해와 상생의 시대를 맞아 독단과 배타성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칭호 대신 ‘하느님’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국문학 문법으로 보더라도 ‘하나’ 혹은 ‘둘’ 숫자에 ‘님’ 자를 붙이는 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그리고 현재 세계교회에서 ‘야훼’ 혹은 ‘야웨’(YHWH or JHWH) 대신 옛 호칭인 ‘여호와(Jehovah)’를 고집하는 나라는 남한 개신교가 거의 유일하다. ‘야훼’ 혹은 ‘여호와’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 믿었던 신의 기호(記號)일 따름이지, 신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혹은 ‘나는 나다’(출 3:14)의 뜻은 인간의 언어로 신을 규정하지 말라는 곧 ‘나는 이름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성서에 등장하는 신을 기호의 의미에서 YHWH로 표기한다.

[제 1,2성서]

서구 성서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약성서(舊約聖書, the Old Testament)와 신약성서(新約聖書, the New Testament) 대신 제1성서(혹은 히브리어 성서, the Hebrew Bible)와 제2성서(혹은 그리스어 성서, the Greek Bible)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교회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는 의미를 뜻하는 ‘구약’(옛 언약)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자의(自意)로 선택한 몇 개의 구절들을 지켜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성서 안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신약(새로운 약속, new promises)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우리가 버려야 할 구약(오래된 약속, old promises)의 말씀이 있다. 필자는 세계교회의 흐름을 따라 구약성서는 ‘제1성서,’ 신약성서는 ‘제2성서’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