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6장 1-8절]
박원일 저, 책 '마가복음 정치적으로 읽기(2016)'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저작권 관련 문제가 되면, 삭제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6:1-8에 몇 가지 눈에 띄는 사항이 있다.
우선 여인들이 무덤에 와서 돌이 옮겨진 것을 본다.
누가 이 돌을 옮겼을까? 본문에는 이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다.
또 한 청년이 무덤 안에 있었는데 그는 여인들에게 예수의 말을 상기시키며 이를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제자들로 하여금 갈릴리로 갈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이다. 그러나 여인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마가복음 16장 9절에는 또 다른 안식일 이후의 부활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16:11, 13. 14).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전하지 않는 여인들의 이야기 (16:1-8)와 그 전해진 소식을 믿지 않는 제자들 이야기 (16:9~20)는 아무리 봐도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 두 개의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서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진 해석학적 문제이자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과제이다.
또 눈에 띄는 사실은 여인들이 마가복음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는 점이다. 즉 예수가 처음 병을 고친 대상이 시몬의 장모였고 그 여인은 예수를 섬긴다(1:30-31).
마지막에도 끝까지 모든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간 상태에서 몇몇 여인들은 끝까지 예수의 죽음을 지킨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날 예수의 무덤에 다시 나타난다 (15:47; 16:1). 국가전복의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람의 무덤에 나타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제자들조차 예루살렘 당국의 핍박이 두려워 문밖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다. 여인들은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무덤에 온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죽은 자의 몸에 향료를 바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고인에게 마지막 예를 갖추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인들은 죽은 예수를 향해 가졌던 마지막 선의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채 오히려 새로운 임무를 전달받는다. 너희가 예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죽은 자를 장사 지내는 데 필요한 향료는 이미 이름 없는 한 여인에 의해 드려졌다(14:3-9).
이제 남은 할 일이란 고인의 뜻을 받드는 일인데, 그것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시작한 하느님 나라 운동을 지속하는 것이다. 여인들과 제자들이 당시에는 그뜻을 깨닫지 못했다. 여인들은 무서워서 도망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16:8).
마가복음은 이렇게 침묵으로 끝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귓가에 맴도는 여운이 있다. 너는 어떻게 하려느냐? 너희도 두려우냐? 결국 마가복음은 오늘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향한 메시지가 된다.
마가복음에서 부활의 의미는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성서 중간기(intertestamertal period) 이후 성서는 마지막 때와 관련해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가 모두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단 12:2; 마 25:46: 계 20:13).
하지만 마가복음은 불의한 자의 운명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예수가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다는 선언만으로 충분하다(12:36; 14:62; 16:19).
다시 말해, 예수가 하느님으로부터 옳다고 인정받았다는 확신이다. 그의 죽음-마지막 삶-은 헛되지 않았다. 실패가 아니라 승리이며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무덤 안에서 흰 옷을 입고 오른편에 앉아 있는 청년(16:5)은 누구일까? 그 청년이 예수를 삼인칭으로 묘사하고 있으니 그는 분명 예수 자신은 아니다. 성서전통에서 흰 옷을 입은 자의 모습은 종종 천사와 같은 초월적 존재를 의미하거나(단 7:9 행 1:10: 계 4:4; 19:14) 혹은 순교자를 상징한다(계 7:9, 13).
또한 흰 옷은 변화산 이야기에서 변모한 예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9:3).
그렇다면 자신의 옷을 벗어 버리고 도망한 청년(14:51-52)이 순교를 뜻하는 흰 옷을 입고 무덤 가운데에 나타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름 없는 여인의 이야기처럼 이름 없는 한 청년의 이 말없는 행동에서 마가공동체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청년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이 순교자적 행위가 한 개인의 영광이나 성공신화가 아니라 앞으로 계속해서 예수의 복음을 살아낼 무수히 많은 제자들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가복음 저자가 예수를 따르는 참 제자의 모습을 뛰어난 문학적 상상력에 기초해 그려낸 것이다.
누가 우리를 위해 그 커다란 돌을 굴려내 주겠는가? 바위가 무덤 입구를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여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15:46-47). 그런데도 그것을 옮길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않은 채 무덤에 갔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돌이 옮겨져 있었다(has been rolled away). 물론 이 단어의 쓰임새가 '신적 수동태' (divine passive)를 취하기 때문에 혹자는 그 행동의 주체로서 하느님을 거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초자연적인 신적인 행위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여기서 저자의 단어 선택이 특히 우리들의 관심을 끈다. '눈을 들어 보다'는 무덤이 언덕 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들어 올려 보았다는 서술적 표현이 아니다.
이 단어는 앞에서 살펴봤던 소경이 눈뜨는 사건과 관련이 있다(8:24: 10:51-52). 소경이 다시 보게 된 것을 말할때 이 표현을 써서 제자들이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었다. 예수의 무덤을 막고 있던 커다란 돌은 로마제국의 거대한 힘을 상징한다.
바위로 막힌 것과 같은 암담한 현실이지만, 다시 눈을 들어 새로운 안목으로 희망을 본 것이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성전이 놓인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빠지라고 말해도 이루어진다고 했다. 바로 그 '하느님의 믿음' (11:22)으로 세상의 지배체제를 이길 힘을 갖게 된 것이다.
예수를 가둔 커다란 바위가 상징하는 로마제국과 지배체제가 새로운 안목과 믿음 앞에서 새벽안개처럼 사라지게 된다.
'갈릴리로 가라'고 할 때 이것은 특정 지역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라는 뜻이다. 갈릴리는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며 '나를 따라오라' (1:17)고 제자들을 부른 곳이다. 따라서 갈릴리라는 말 속에는 예수의 길을 따라 걸으라는 촉구가 담겨 있다. 예수의 길을 버리고 도망했던 베드로와 제자들을 꼬집어 하는 말이다(16:8).
부활은 죽은 자의 삶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서 죽은 자란 앞서 산 자-선생(1年)←를 의미한다. 제자들의 전도여행을 통해 퍼진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은 헤롯 안티파스는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의 능력이 제자들 사이에서 운동한다고 말한다(6:14). 이 표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활이야기는 한 개인의 육체적 죽음과 소생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삶이 후대에 미치는 영향을 말하고 있다. 부활이야기 속에 담긴 뜻은 그의 삶이 되살아나야 할 만큼 소중하다는 외침이다.
세상의 지배자와 그 지배체제에 의해 처형당했던 예수의 치열한 삶이 최고 법정으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우편에 앉음으로써 예수의 삶은 옳았다는 선언이 된다(12:36; 14:62: 16:19).
(중략)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 누가 무덤 문을 막고 있던 돌을 옮겼을까? 하느님이 옮겼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더이상 왈가왈부할 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본문에는 신적인 개입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현장에는 오직 청년만 있을 뿐이다. 그는 누구인가? 만일 천사 혹은 초월적 존재로 본다면, 그는 마가복음에서 생소한 인물인 까닭에 많은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을 바로 앞에서 겉옷을 버리고 도망했던 청년으로 본다면(14:51), 그가 예수에게 되돌아온 장면이 연출된다. 예수를 가두었던 세상의 힘을 이기고 그 어둠 속으로부터 예수를 끄집어 낸 것이다. 인자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지 않는 한, 예수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지 말라(9:9). 청년이, 제자들이, 마가공동체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살려낸 것이다.
예수의 부활이야기는 마가복음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어야 마땅하다. 예수의 부활을 기점으로 제자들이 전하는 예수 이야기가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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