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불어한교회에서 김상근 목사님이 "원수사랑, 가능하다!"란 제목으로 설교. 그의 실존적 체험과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 80여년 연륜 속에서 쌓여진 영성과 성경에 대한 올바른 해석,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 고민하며 생각 또 생각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선포된 말씀입니다.
설교 원문은 다음과 같다. (설교 동영상 https://youtu.be/Xjot1a2R7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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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사랑, 가능하다!
마태 5:43~48; 요1 4:7~12
2023.11.26. 더불어한교회 / 김상근 목사
누구에게나 실존적(實存的, 현실적 존재로서) 과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고, 가정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아내와 남편, 남편과 아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나와 어느 개인 사이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풀어야 합니다. 그걸 푸는 동력(動力, 어떤 일을 추진하고 발전시키는 힘)이 있지요. 내가 동력으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
더불어한교회 교우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실존적 과제와 함께 사회적 또는 정치적 과제를 스스로 짊어집니다. 우리는 모두 사회-정치적 행동파지요. 우리 교우들은 이중 과제로 인해 어느 때는 지치기도 하고 포기하고 싶어지기도 하지요. 실존적 과제를 해결하는 것도 힘든데 사회-정치적 과제까지 짊어지다 보면 더 지칠 수 있습니다. 역시 동력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동력으로 삼고 있는가?
지난 주일예배 후 담소 시간에 이권명희 교우가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나도 제발 생활인으로 살고 싶다. 너무 힘들다.’ 뭔 뜻일까? 했어요. 집에서 딸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사회, 다시 내리막으로 치닫습니다. 바로 잡아야 한다. 또 거리에 나서야 하나?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남들처럼 생활인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것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너무 버거운 거구나. 잘못 짚었나요? 만약 내가 제대로 짚었다면 이권명희 교우가 동력으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 묻습니다.
저에게 가장 어려운 실존적이고 사회-정치적 과제 중 하나는 ‘원수북한 사랑’입니다.
어떻게 해결해 가고 있나? 제 경우를 예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저에게 마땅히 해야 하는 당위(當爲, 마땅히 하거나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고 과제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마 5:43~45).”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한국전쟁 때 북이 제 아버지를 총살했습니다. 누구 소행인지 모르지만, 주검 얼굴을 회칼로 난도질했습니다. 어린 가슴으로 아버지의 처참한 주검을 직접 봤습니다. ’김일성, 이 개새끼, 내가 크기만 해라. 내 손으로 너를 꼭 죽이고야 말겠다.‘ 어머니는 졸지에 청상과부가 되었습니다. 우리 가정은 점점 경제난으로 떨어집니다. 김일성을 향한 저의 증오심, 복수심, 천 길 깊어만 갑니다. 우리 집이 비참해질수록 원수북한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은 더 커집니다. 저는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됩니다. 신학교에 입학합니다. 성경을 매일 마주합니다. 목사가 됩니다. 예수님 말씀이 제 목의 가시입니다. 갈등합니다.
그런 저도 60년대 말쯤부터 가슴을 조금은 열게 됩니다.
북의 식량난이 심각하다 합니다. ‘북한동포돕기운동본부’를 조직하여 상임대표를 맡습니다. 거리 캠페인도 합니다. 이런 일을 찾아 계속 활동합니다. 예수님 가르침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제 가슴이 조금이나마 열리는 거예요.
제 가슴을 연 동력은 무엇이었던가? 저의 이성!(理性, 동물과 달리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 저의 지성!(知性, 지각된 것을 정리하고 통일하여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작용)입니다. 그것이 굳게 닫힌 가슴을 조금이나마 열게 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라내기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습니다. 저의 내면에 깔린 반북정서(反北情緖, 북한을 반대하는 감정), 아직 굳건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기의 실존적 과제를 풀어내는 동력으로 이성, 지성, 충분하던가요? 혹 저처럼 이성, 지성만으로는 부족하다 느끼는 것 아닐까.
저는 다른 동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전두환의 광주학살이 계기였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이 대한민국 국민 광주시민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발포하고 살해했습니다. 군사작전권은 미국이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한국군 단독 결정으로 발포할 수 있었을까?
전두환이 12.12쿠데타를 자행합니다. 휴전선을 지키고 있는 부대를 서울로 이동시킵니다. 휴전선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겁니다. 단독 결정으로 가능했을까? 미국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 아닌가?
현대사를 살피게 됩니다. 미국, 우리를 위했던가? 그동안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했던가?
1945년, 종전 처리를 어떻게 했나?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전범국 일본을 재판합니다. 전범들에게 유죄를 선고합니다. 그러나 일등 전범인 일왕 이른바 천황은 처벌하지 않았더라고요. 재판에 회부조차 안했더라고요.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 왜 그랬을까?
우리에게는 군정을 단행합니다. 우리는 전범국이 아닙니다. 패전국도 아닙니다. 그런데 군정은 뭔가? 미국, 왜 그랬을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어엿이 엄존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여의도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요인들, 조국 땅에 내립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얼마나 벅찼겠습니까. 웬일인가? 무장 군인들이 총부리를 들이대고 포위하는 겁니다. 일본군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게 회항을 명령합니다.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인들은 각기 개인 자격으로 입국했습니다. 일본군은 미군정에 고용되었을 뿐이었습니다. 명령은 미국이 내렸습니다. 미국, 왜 그랬을까?
한반도 북에서 소련의 남진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급했습니다. 하급 장교에게 적당한 저지선을 찾아보라 명령합니다. 장교는 불과 몇 분 만에 한반도 지도 위 북위 38˚ 선에 자를 대고 쓱 줄을 긋습니다. 한반도가 둘로 찢어지는 순간입니다. 미국, 이 엄청난 일을 대한민국 그 누구와도 상의 안 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그 누구도 내 땅 한반도가 갈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미국, 우리에게 왜 그랬을까?
미국의 자본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가 총소리 나지 않는 전쟁을 시작합니다. 열전熱戰, 2차세계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냉전冷戰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38˚ 선을 그은 미국, 한반도를 냉전의 최전방으로 삼습니다. 미국, 왜 그랬을까?
38˚ 선을 그은 미국, 군대를 철수합니다. 고문단 몇백 명만 달랑 남깁니다. 기어이 한국전쟁이 일어납니다. 북위 38˚ 선, 한국전쟁의 씨앗이었습니다. 미국, 왜 그랬을까?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1905년, 익히 아는 ’美 태프트-日 가쯔라 밀약‘이 있습니다. 일본의 조선 지배권을 미국이 보장한 밀약입니다. 미국은 그때 벌써 동북아에서는 일본을 앞세워 패권을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미국의 ‘일본 중심 동북아 패권 정책’입니다. 우리는 그 정책으로 일본제국에게 식민 수탈을 당했습니다. ‘일본 중심 동북아 패권 정책’을 ’일본 중심-반공주의 동북아 패권 정책‘으로 확대합니다. 그로써 한반도는 냉전의 최전방이 됩니다. 반공의 첨병이 된 것이었습니다.
아, 남도 북도 미소 강대국의 패권주의 꼭두각시로 전쟁을 했던 것이구나!
미국은 ’일본 중심-반공주의 동북아 패권 정책‘에 입각하여 역사적 고비마다 우리를 비틀었던 것이었던 것이었구나! 그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서로 죽이고 또 죽였구나! 내 아버지도 그 수많은 희생자 중 하나였구나! 깨달음은 슬픔이었습니다.
저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사(關係史, 둘 이상의 사람이나 국가 사이에 있었던 역사) 를 들여다봄으로써! 다른 말로 하면 인문사회적 인식 능력(人文社會的 認識, 역사, 사회, 언어, 정치, 경제 등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능력)으로! 인문사회적 인식 능력이 이성, 지성과 함께 예수님 말씀을 따라 살게 하는 동력이었습니다!
실존적 과제 극복에 있어서 제가 앞서 말한 관계사는 무엇일까? 관계 성찰, 아닐까?
실존적 과제에는 여러 관계가 얽혀 있을 것입니다. 그 관계의 가닥을 따라 깊이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관계 성찰이지요. 그 관계를 잘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 인문사회적 인식 능력입니다. 저는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 ’원수북한 사랑‘에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1991년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북한교회를 포함한 국제협의회를 열었습니다. 휴식 시간에 북 대표들을 찻집에 초대했습니다. 제가 겪은 6.25한국전쟁을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도 말했습니다. 시신 얼굴을 누군가가 훼손했더라는 것도 말했습니다. 그러니 당신들을 향한 복수심, 증오심이 어떻게 아니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여러분, 남이 북진했을 때 당신들이 남에서 한 것과 똑같은 짓을 남도 했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까무러치게 놀랐습니다. 아, 나와 똑같이 남을 향한 복수심, 증오심, 반남反南정서를 가진 동시대인이 북에도 있겠구나! 여러분, 북 정부나 남 정부가 자기들 만행을 사죄하겠습니까? 당국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북과 남에 교회를 두신 데는 큰 경륜이 있습니다. 북 교회는 북 당국의 죄책을, 남 교회는 남 당국의 죄책을 제사장으로서 속죄 제사를 올리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 말을 마음에 담아주십시오.
그런데 교우 여러분, 여기까지 왔는데도 아직 아니더라고요.
1998년 조선그리도교도연맹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제가 조건을 답니다. 북 입국에는 통과의례(通過儀禮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갈 때 겪어야 하는 의식)가 있습니다. 김일성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금수산태양궁전에 가서 주검에 예(禮,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치르는 것입니다. 나는 거기 갈 수 없다. 여기저기에 있는 그의 동상에도 예를 갖출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제 가슴에 깊이 박혀 있는 반북정서, 아직 털어내지 못한 것입니다. 이성! 지성! 인문사회적 인식 능력!으로도 예수님 가르침 ’원수북한 사랑‘이 안 되는 겁니다.
왜? 가르침을 따르지 못할까? 뭔가 부족한 거다. 그게 뭘까? 그게 뭘까?
저는 김일성을 미워합니다. 이승만과 친일파, 박정희와 그의 군바리, 전두환과 그의 군바리를 미워합니다. 그들이 자행한 짓을 생각하면 사랑은 고사하고 도저히 용서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윤석열과 그 주변의 극우 검사와 지식인들도 미워합니다. 어떻게 일군 민주화입니까? 거기 우리의 피땀이 엉겨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일군 민생입니까? 공순이, 공돌이, 파독 광부 간호사, 적도 아래 사막에 도로를 낸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일군 민생 아닙니까. 어떻게 일군 남북 평화공존입니까? 미국에 당하면서, 약자 북의 앙탈에 긁히면서 가까스로 일군 우리의 주권과 안전과 남북공존과 한반도 평화, 이 모든 것을 모조리 망가트리고 있습니다. 증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용히 살려던 저, 80이 넘어 거리로 나갑니다. 외칩니다. 미워합니다.
목사가 이렇게 많은 사람을 미워해도 되는 거야? 목사니까 증오하는 겁니다.
목사니까 미워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켕기는 구석이 있어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자꾸만 저를 쫓아옵니다. 제 뒷덜미를 잡아당깁니다. 귓전에서 웅웅거립니다. ’원수북한 사랑‘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윤석열까지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 못하겠습니다. 제 이성과 지성, 저의 인문사회적 인식 능력으로는 동의가 안 됩니다. 저들을 왜 사랑해야 한단 겁니까?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 아닙니까? 저는 하나님께 항변하곤 했습니다.
반윤집회에서 아주 센 발언 끝내고 내려오는데 아, 사람!!! 불현듯 깨달음이 와요.
사람! 사람! 을 사랑하라는 거다. 그런가? 확신이 서지 않아요.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오래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고 하셨을 때 예수님에게 원수가 특정되어 있었을까? 아니라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와 규범을 말씀하신 것인가? 어디서나, 어느 경우나, 어느 때나 그야말로 지당한 말씀, 성인다운 말씀을 하신 것인가? 예수님은 그런 성인다운 말씀은 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고 가르칠 때 제자들이 원수라 여기는 그 사람! 자기들을 박해하는 그 사람! 을 두고 하신 말씀이리라! 그 사람! 그 사람! 누군가? 누굴까요?
그렇습니다. 개인과 개인 차원에 있어요. 원수 그 사람! 박해하는 그 사람!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을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집안 식구 가운데에 있어요. 원수 그 사람! 박해하는 그 사람!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을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회적 영역에 정치적 영역에 있어요. 원수 그 사람! 박해하는 그 사람!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을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제 마음이 더 혼란해집니다. 원수북한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박정희, 전두환, 윤석열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네가 나를 모르는 거구나. 하나님의 사랑! 을 모르는 거구나.
너 김상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받을만해서? 아니다. 요한 1서 기자를 통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요1 4:9) 된 것이라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10)다고.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게 하심으로써! 당하게 하심으로써! 그럼으로써! 김상근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 거야! 김상근 네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된 거야!
’뭔가 부족해‘에 대한 답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믿음! 자격이 충분해서? 아니다. 사람이라서! 다. 네가 사람이라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 달려, 끝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11). 그 사랑은 너에게만이 아니야! 사람 모두에게야! 하나님은 김상근이나 윤석열이나 똑같이 햇빛을 준다!
나 하나님이 김상근 너나 윤석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준다! 나 하나님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잊고 있었던 것이구나. 우리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잊고 있는 것 아닌가.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가슴이 뜨거웠던 경험이 혹 있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랬습니다. 뜨거웠습니다. 내 영에 뭔가가 가득한 것을 느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온 존재가 떨렸었습니다. 경외로운 전율戰慄을 경험했었습니다. 저의 경우 오죽했으면 신학교에 갔겠습니까. 그랬었는데 지금은 모든 경험을 잊고 있구나.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 을 몰라. 그 사랑의 깊이! 몰라. 높이! 몰라. 그 넓음, 몰라. 우리 모두 그 경험을 잊은 겁니다.
예수의 십자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인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것,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육체적 아픔, 육체적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놈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놈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는 것, 그것이 예수 십자가의 아픔입니다! 그가 오직 사람이기에!
아, 십자가를 지시는 하나님의 사랑, 내가 놓치고 있구나. 부족한 것, 이 믿음이다! 왜 놓쳤나? 그것, 성령의 영역이야. 영의 영역이야. 영적 능력이 부족해진 거다! 영의 영역의 일을 육의 자리로 가져왔으니 놓칠 수밖에 없어요.
이런 깨달음에 있던 터에 전 목사님 설교를 듣게 되었던 겁니다.
가자와 이스라엘의 공격과 학살, 미국의 지원, 정확하게 짚습니다. 정부와 일부 대형교회 목사와 교인들의 왜곡된 입장도 확인합니다. 전 목사의 이성, 지성을 봤습니다. 대림절에 어떤 메시아를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훌륭한 도입이었습니다. 이의 없었습니다. 회개는 고난받는 자의 몫이 아니다. 회개는 이사야 53장을 잘못 읽은 ’우리‘ 몫이라고 전통적인 인식을 뒤엎는 전혀 새로운 관점입니다. 훌륭한 주석입니다.
이스라엘 폭력의 배후인 미국은 전쟁을 통한 패권주의, 전쟁 지상주의에 오로지 미국 추종주의 대한민국의 현 정부 질타, 세계사를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관점! 입니다. 아멘! 입니다.
가자지구에서 학살당한 · · · 그들의 죽음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자 합니다. 전통 교리를 여지없이 들이받은 것, 놀랍도록 담대합니다. 전 목사의 인문사회적 인식 능력, 훌륭합니다.
이런 설교, 더불어한교회 아니면 들을 수 없을 겁니다. 유경재 목사님 설교, 신경하 목사님 설교, 안해용 목사님 설교, 전광희 목사님 설교, 더불어한교회 설교, 참 아까워요.
설교를 이렇게 마감하더라고요. 우리의 인식이 철저히 바뀌고, 우리의 삶의 자세가 철저히 변화되어서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 모두의 가슴에 안게 되기를 바랍니다.
순간, 제 입에서 터져 나왔어요. ’조금 부족해!‘ 전 목사, 당황했을 겁니다. 대화시간에 마지막 문장을 읽어달라 했습니다. 꾹 참고 읽더라고요. 나는 다시 뱉어냈습니다. ’역시 조금 부족해!‘ 전 목사님, 섭섭해하지 마요. 나에게 부족한 것을 전 목사 설교에서 또 발견하게 되었던 겁니다. 어떻게 철저히 바뀌고,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 모두의 가슴에 안게 될 수 있어? 어떻게? 그것,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전 목사님, 동의합니까? 나도, 너도, 전 목사도, 기장도, 우리 더불어한교회도, 부족한 것,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 그것 찾자! 찾아서 더하자! 그날 제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사회-정치적 행동파 목사입니다.
저의 정체성(正體性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이지 않습니까. 평생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자 노력합니다. ‘북한원수 사랑’, 실존적이고 나아가 사회-정치적 행동입니다. 그리 살게 하는 동력은 이성과 지성, 인문사회적 인식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 그것이 사람사랑의 동력입니다. 그것, 이성과 지성. 인문사회적 인식 능력을 포괄한 거대한 동력입니다. 이 거대한 동력 없이는 원수사랑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사람 윤석열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를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배반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 윤석열, 하나님 따라 사랑합시다!
그러나 여러분, 그의 정책은 기어코 막아냅시다! 막아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사랑! 이 동력을 가집시다! 이성과 지성, 인문사회적 인식 능력을 포괄하는! 원수사랑,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 모두 이 믿음,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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