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수님께
"아! 나비다."
창가에 서 있던 친구의 놀라움에 찬 발견에 얼른 일손 놓고 달려갔습니다.
반짝반짝 희디흰 한 송이 꽃이 되어 새 나비 한 마리가 춘삼월 훈풍 속을 날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의 연약한 나비가 봄하늘에 날아오르기까지 겪었을 그 긴 '역사'에 대한 깨달음이 겨우내 잠자던 나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습니다. 작은 알이었던 시절부터 한 점의 공간을 우주로 삼고 소중히 생명을 간직해왔던 고독과 적막의 밤을 견디고……, 징그러운 번데기의 옷을 입고도 한시도 자신의 성장을 멈추지 않았던 각고의 시절을 이기고……, 이제 꽃잎처럼 나래를 열어 찬란히 솟아오른 나비는, 그것이 비록 연약한 한 마리의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람한 승리의 화신으로 다가옵니다.
담 넘어 날아든 무심한 나비 한 마리가 펼쳐보인 봄의 뜻은, 이곳에는 꽃나무가 없어 봄조차 가난하다던 푸념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를 뉘우치게 합니다. 양춘포덕택 만물생광휘(陽春布德澤 萬物生光輝). 그래서 봄은 사사로운 은택(恩澤)이 아니라 만물에 골고른 광휘(光輝)인가 봅니다.
요즈음은 F. 카프라의 현대물리학에 관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문학서적은 고전을, 과학서적은 최신판을 읽으라는 말을 상기시켜주는 좋은 책이라 생각됩니다.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이 보여주는 최근의 놀라운 성과에서 알 수 있듯이, 물질세계의 내포와 외연이 급격히 심화, 확대됨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서의 '과학사상의 확장'은 실로 경이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과학의 발전은 항상 경이의 연속임이 사실이지만 최근의 그것은 기존의 언어와 개념으로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 이른바 '사고의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한다는 점에 그 경이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서양의 과학사상이 그 기계론적이고 분열된 세계관으로 인하여 한계를 보이자 이제는 동양의 지혜에서 그 철학의 근거를 찾는가 하면, 물리학에 인간의 의식, 즉 '마음'을 포함하기에 이르는 등 소위 '동양적 해방'의 길을 더듬고 있는 현대물리학의 방향은 우리가 스스로의 세계관을 개선해가는 데 극진한 의의를 갖는 것이라 느껴집니다.
사우디 소식 잘 듣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내게는 사우디나 서울이나 멀기는 매한가지로 느껴집니다만 먼 거리를 가깝게 만드는 축지법이 없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1982. 4. 9. 신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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