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수님께
자기의 그릇이 아니고서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여우와 두루미의 우화처럼,
성장환경이 다른 사람들끼리는 자기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대화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언어란 미리 정해진 약속이고 공기(公器)여서 제 마음대로 뜻을 담아 쓸 수가 없지만 같은 그릇도 어떤 집에서는 밥그릇으로 쓰이고, 어떤 집에서는 국그릇으로 사용되듯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성장과정과 경험세계가 판이한 사람들이 서로 만날 때 맨 먼저 부딪치는 곤란의 하나가 이 언어의 차이입니다.
같은 단어를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그런대로 작은 차이이고, 여러 단어의 조합에 의한 판단형식의 차이는 그것의 내용을 이루는 생각의 차이를 확대한다는 점에서 매우 큰 것이라 하겠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예를 든다면 아마 '책가방 끈이 길고 먹물이 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간의 차이라고 생각됩니다.
전자는 대체로 벽돌을 쌓듯 정제(精製)되고 계산된 언어와 논리를 구사하되 필요 이상의 복잡한 표현과 미시적 사고로 말미암아 자기가 쳐놓은 의미망(意味網)에 갇혀 헤어나지 못합니다. 도깨비이기는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파란색 도깨비와 노란색 도깨비를 구별하느라 수고롭습니다.
이에 비하여 후자의 그것은 구체적이고 그릇이 커서 손으로 만지듯 확실하고 시원시원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단순화와 무리(無理), 그리고 감정의 범람이 심하여 수염과 눈썹을 구별치 않고,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내다버리는 단색적 사고를 면치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십수년의 징역을 살아오는 동안 이 두 가지의 상반된 경향의 틈새에서 여러 형태의 방황과 시행착오를 경험해왔음이 사실입니다. 복잡한 표현과 관념적 사고를 내심 즐기며, 그것이 상위의 것이라 여기던 오만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조야(粗野)한 비어를 배우고 주워섬김으로써 마치 군중관점(群衆觀點)을 얻은 듯, 자신의 관념성을 개조한 듯 착각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쪽을 절충하여 '중간은 정당하다'는 논리 속에 한동안 안주하다가 중간은 '가공(架空)의 자리'이며 방관이며, 기회주의이며, 다른 형태의 방황임을 소스라쳐 깨닫고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떠나던 기억도 없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개인이 자기의 언어를 얻고, 자기의 작풍(作風)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랜 방황과 표류의 역정(歷程)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방황 그 자체가 이것을 성취시켜 주는 것이 아니며, 방황의 길이가 성취의 높이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어딘가의 '땅'에 자신을 세우고 뿌리내림으로써 비로소 이룩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교도소는 대지(大地)도 벌판도 아닙니다. 휘달리는 산맥도 없고 큰 마음으로 누운 유유한 강물도 없는 차라리 15척 벽돌 벼랑으로 둘린 외따른 섬이라 불립니다. 징역 사는 사람들이 겪는 정신적 방황은 대개가 이처럼 땅이 없다는 외로운 생각에 연유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들과는 달리, 아무렇게나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가면 그만인 곳으로 여기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고달픈 처지에 심신이 부대끼느라 이곳에 자라고 있는 무성한 풀들을 보지 못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름도 없는 풀들이 모이고 모여 밭을 이루고 밟힌 잡초들이 서로 몸 비비며 살아가는 그 조용한 아우성을 듣지 못하는 생각입니다.
초상지풍초필언 수지풍중초부립(草上之風草必偃 誰知風中草復立).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잎마다 발 밑에 한 줌씩의 따뜻한 땅의 체온을 쌓아놓고 있습니다.
나는 이 무성한 잡초 속에 한 포기 키 작은 풀로 서서 몸 기대며 어깨를 짜며 꾸준히 박토(薄土)를 배우고, 나의 언어를 얻고, 나의 방황을 끝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폭설이 내린 이듬해 봄의 잎사귀가 더 푸른 법이라는데 이번 겨울은 추위도 눈도 없는 난동(暖冬)이었습니다.
입춘 지나 우수를 앞둔 어제 오늘이, 풍광(風光)은 완연 봄인데 아직은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1983. 2. 7. 申榮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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