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본받을 것인가 (요한삼서 1:9~12)
조선시대 왕들이 평상시 썼던 모자를 ‘익선관’(翼蟬冠)이라고 부릅니다. 날개 ‘익’(翼), 매미 ‘선’(蟬), 갓 ‘관’(冠)으로 ‘매미의 날개를 본 뜬 갓’이라는 뜻입니다. 왕들이 이런 익선관을 쓰게 된 것은 매미가 상징하는 다섯 가지 덕을 본받으려는 뜻이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문’(文 )으로 매미의 머리에 학문을 상징하는 ‘반문’(斑紋)이 있어 왕도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청’(淸)으로 매미는 이슬만 먹고 사니 맑아서 왕도 맑고 깨끗하게 다스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염’(廉)으로 매미는 사람이 가꿔놓은 곡식이나 채소를 훔쳐 먹지 않아 염치가 있어서 왕도 염치가 있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검’(儉)으로 매미는 다른 곤충과 달리 집을 짓고 살지 않으니 검소한데 왕도 검소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신’(信)인데 매미는 사는 계절을 지키고 떠날 때를 알고 따르니 신의가 있는데 왕도 신의를 알고 지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선시대 왕들은 매미의 다섯 가지 덕을 본받기 위해 힘썼고,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모자도 익선관을 만들어 썼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왕들은 왕도를 배울 때 무엇을 본받아야 하는 지를 훈련받았습니다. 늘 마음에 품고 본받고자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훈련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기도 모르게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본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들이 본받아야 할 것을 정해 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매미의 다섯 가지 덕이었던 것입니다.
왕 뿐 아니라 보통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본받아야 할 것을 정해 놓고 그것을 본받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본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이 되려면 본받을 것을 정해 놓고 그것을 본받으려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받을 것을 정해 놓고 그것을 본받고자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본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신앙생활이 엉망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본문 1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받지 말아야 할 것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것은 본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본받아야 할 선한 것은 무엇이고, 또 본받지 말아야 할 악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 답을 찾으려면 요한 삼서의 개론적인 내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왜 이 편지를 썼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삼서는 사도요한이 쓴 세 번째 편지입니다. 특히 이 편지는 가이오라는 한 개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사도요한이 가이오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이렇습니다.
당시에 복음이 활발하게 전해지면서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각 교회를 이끌어줄 목회자가 많이 부족했습니다. 여러 지방에 목회자 없이 평신도들끼리만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과 같은 영적 지도자들은 순회 전도자들을 보내서 이런 교회들을 지도하게 됐습니다.
지금 가이오라는 사람이 다니는 교회가 목회자가 없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순회 전도자를 보내서 이 교회를 영적으로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가이오가 신실하게 순회 전도자를 도와서 교회를 영적으로 든든히 세워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부 교회에서는 이런 순회 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사도요한을 비방하고 대적하기까지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런 풍조가 점점 확산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바로 가이오의 교회에도 이런 풍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에 앞장 선 사람이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입니다. 이 디오드레베는 순회 전도자를 영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순회 전도자를 대접하려는 사람들까지 교회에서 내어 쫓는 악을 서슴지 않고 행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사도요한은 그동안 사도요한을 잘 협력해 온 가이오에게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디오드레베와 같은 사람을 본받지 말고, 데메드리오와 같은 사람을 본받으라고 권면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데메드리오는 사도 요한이 이 교회에 파송한 순회 전도자입니다.
본받을 것을 분별하자
우리가 여기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디오드레베와 같은 사람과 데메드리오와 같은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과 선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본받을 것인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말에 ‘쑥밭이 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집이 있던 자리에 집은 없어지고 쑥만 무성하게 자라서 옛날의 자취를 찾아볼 길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왜 하필이면 쑥밭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사람이 살던 집에 사람이 떠나면 그 집을 관리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 바람결에 각종 잡초들의 씨가 날아와 마당에 뿌려집니다. 여러 잡초들이 경쟁적으로 자라게 됩니다. 여러 잡초 중에 쑥은 뿌리로 번식을 합니다. 그리고 키가 커서 다른 잡초를 누르고 빠르게 공간을 장악해 갑니다. 게다가 쑥은 겨울에도 뿌리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해에도 엄청나게 자라서 그 빈집을 장악합니다. 결국 그 빈집의 주인은 쑥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쑥밭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가만히 두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악한 일의 씨가 뿌려져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악한 일을 본받게 됩니다. 이것은 본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따라하게 됩니다. 가만 두면 마치 우리 신앙인격의 밭이 쑥밭이 되는 것처럼 악한 것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그 악한 일들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디오드레베가 한 일들입니다.
우선 9절을 보면 그는 으뜸 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사도요한과 사도요한이 보낸 순회전도자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10절을 보면 악한 말로 사도요한과 순회전도자들을 비방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내의 다른 사람들도 순회전도자들을 맞아들이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맞아들이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내쫓기까지 했습니다.
도대체 디오드레베는 왜 이렇게 했을까요? 우선 교만 때문입니다.
디오드레베는 목회자가 없는 이 교회에서 자기가 교회 대표를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디오드레베는 으뜸이 되기를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자신은 으뜸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보다 으뜸의 자리에 앉을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으뜸이 돼서 지도력을 발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만입니다. 사도요한은 이런 교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교만을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욕심 때문입니다. 디오드레베는 사도요한과 사도요한이 파송하는 순회 전도자들을 거부했습니다. 저들을 욕하고 비방했습니다. 저들이 방문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저들을 영접하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내쫓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도요한의 영향력이 확대되면 자신의 리더십이 흔들릴까봐 염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회전도자가 오면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기게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욕심, 사리사욕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디오드레베와 같은 사람을 본받게 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하게 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리사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마치 쑥밭이 되듯이 우리 신앙인격이 이 모양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밭에 이런 것들이 자라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선한 것을 본받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마치 채소밭을 가꿀 때 쑥이나 잡초를 제거하고 채소를 잘 돌보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적극적으로 본받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본받을 것을 본받자
사도요한은 본문에서 ‘선한 것을 본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선한 것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사도요한이 지적하는 선한 것은 대표적으로 데메드리오가 행한 일들을 말합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데메드리오가 행한 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 아느니라” 데메드리오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고 있고, 또 하나 진리도 그가 선을 행하고 있다고 증명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데메드리오에게서 본받을 것은 무엇일까요?
선한 성품
본문을 보면 데메드리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뭇사람에게와 사도요한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인정을 받았을까요? 본문에 구체적인 것이 소개되고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디오드레베와 대조되는 것 때문에 인정을 받았을 것입니다. 디오드레베는 으뜸이 되고자 했고 다른 사역자들을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데메드리오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늘 동역하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 선한 성품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도요한은 가이오에게 이런 데메드리오의 선한 성품을 본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힘을 합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잘 세워가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 전 1921년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심리학자 루이스 터먼 박사가 흥미로운 실험 하나를 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초 중등학생 25만 명 중 IQ가 135가 넘는 천재들 1521명을 추려내서 그들의 평생을 추적하는 실험입니다. 터먼 박사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습니다. 이들이 장차 각계의 최고 엘리트가 되어 성공적인 인생을 살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연구가 1990년대 후반까지 이어져 연구팀은 3대를 꿰뚫는 종적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가설과 전혀 다르게 나왔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최고의 엘리트가 되기는커녕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터먼 박사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생의 성공은 지능과 능력에 달려있지 않고 그 사람의 성품에 달려있다.’
그렇습니다. 성공적인 인생은 그 사람의 성품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선한 성품을 갖는 일이 성공적인 신앙생활의 결정적인 변수가 됩니다.
그런데 선한 성품은 저절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악한 성품은 쑥밭이 되는 것처럼 힘들이지 않고도 얻어집니다. 그러나 선한 성품은 뼈를 깎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선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본받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사도요한이 가이오에게 데메드리오의 선한 성품을 본받으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도 주변에 선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선한 행동
본문을 보면 데메드리오는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에게 증거를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데메드리오는 말씀에 비추어볼 때 선한 행동을 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가이오에게 데메드리오의 이런 선한 행동을 본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해 줄 수 있는 그런 선한 행동을 하며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범선이라는 작가의 [피해자]라는 소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공 최요한은 아버지인 최 장로가 평양에서 고아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분으로서 자신도 고아들과 똑같은 대접을 받으면서 자란 것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고아원생인 명숙을 사랑해 그녀를 아내로 삼으려고 하자 아버지 최 장로는 극구 반대했습니다. 고아를 며느리로 삼을 수는 없었다는 것이었지요.
상상치 못했던 아버지의 반대로 요한은 아버지 최 장로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 꿰뚫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이기적인 신앙의 소유자로 고아들을 긍휼히 여겨서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고아원을 운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실을 눈치 챈 명숙은 고아원을 나가 도망가고 25 년이 지난 후 술집 마담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작가 이범선은 이렇게 신앙 따로 행동 따로의 신앙인의 삶의 모습을 ‘구두 속의 돌멩이’라고 불렀습니다. 구두 속에 돌멩이가 있기에 일평생 다리를 절고 다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신앙생활은 구두 속의 돌멩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서 입으로 말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신앙인의 삶은 바로 이 구두 속의 돌멩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절뚝거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서 이 구두 속의 돌멩이를 빼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돌멩이는 웬만해서는 잘 나오질 않습니다.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나올 둥 말 둥입니다.
우리가 이 구두 속의 돌멩이를 잘 빼내려면 선한 행동을 본받아야 합니다. 가까이에 있는 데메드리오와 같은 사람을 보고 그 선한 행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은 오늘도 우리 심령을 쑥밭으로 만들어 놓으려 하고 있습니다. 악한 것을 본받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이 점을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마치 조선시대 왕들이 익선관을 쓰고 살며 선한 것을 본받으려고 힘썼던 것처럼 우리도 선한 것을 본받으려고 힘써야 하겠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데메드리오가 보여준 선한 것을 본받기 위해 힘써야 하겠습니다. 선한 성품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선한 행동으로 주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후에는 우리가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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