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가정 예배

8월 26일 ~ 31일 가정 예배

ree610 2024. 8. 25. 15:16

생기를 들어가게 하리라
본문: 겔 37:1~14
찬송가: 287장

하나님은 때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하신다.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마른 뼈들의 환상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말씀 하시기를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이것은 매장되지도 못한 채 살은 썩어 없어졌고 수많은 세월동안 비 바람에 말라져 버린 이 마른 뼈들과 같은 우리들에게 여호와의 능력이 임하면 변할 것을 믿느냐고 묻고 계시는 것이다. 여호와의 능력이 임하면 이미 마른 뼈 같은 우리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우리에게서 보기 원하시는 믿음인 것이다.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37:5b) 죽음의 그 깊은 곳에 생명의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선포될 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을 들을 때 생명의 기운은 솟아난다. 우리들의 오늘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일지라도 말씀은 그 상황을 바꾸실 수 있다.
 
지난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삼복 한 복판에서 할머니 성도의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87세로 교회등록은 30여 년이지만 직분은 성도로, 요양원 생활 3년이었고, 50세의 아들 역시 지난해 정신 발작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된 딱한 형편이었다. 그 성도의 장례를 진행하면서 장례예배 시간마다 '하나님 이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라며 간절한 기도를 할 뿐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땀으로 흠뻑 적시며 장례 예식 시간을 마치기까지 계속 눈물이 쏟아졌다. 온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본 할머니 한분께서 "목사님 나도 교회 다니면 저렇게 장사 지네 줄려?"라고 물으셨다.
 
여호와의 말씀의 능력은 지금도 살아 있다 말씀이 선포되고 들려진 곳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으신다. 하나님의 생기, 곧 성령은 죽은 자와 같았던 우리를, 마른 뼈와 같은 우리들에게 힘줄을 만드시고 살이 오르게 하시고 가죽으로 덮고 생기를 넣으시듯 메말라있는 우리 심령을 은총으로 덧입혀주시고 사랑으로 덮으시고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면 골짜기의 마른 뼈들처럼 생기를 잃고 죽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이 임하시게 되면 참 생명을 얻는다. 우리는 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 여호와의 능력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순종하였을 때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거대한 군대로 세워지는 것을 보여주실 것이다.
 
오늘의 기도
마른 뼈와 같은 우리의 삶 속에 찾아주시사 더 넓고 깊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수 있는 능력을 더하여 주시고, 오직 그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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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라지를 이기는 좋은 씨앗
본문: 마 13:24~43
찬송가: 350장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렸는데 가라지가 함께 났다. 가라지는 번식력이 왕성해서 서둘러서 뽑아 내지 않으면 곡식을 심은 밭이 온통 가라지 밭이 되고 만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종들이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아야 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런데 주인은 종들에게 가라지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되니 가만 두라고 말한다. 가라지를 그대로 두면 가라지에게 양분을 빼앗긴 곡식이 점점 말라 죽거나 쭉정이만 맺게 되어 결국에는 한 해 농사를 망치게 될 것이다.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가라지를 뽑지 않고 가만 두게 했을까?
 
그 이유는 주인이 밭에 심은 씨앗은 가라지를 이기는 좋은 씨앗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곡식은 가라지에게 진다. 가라지에게 양분을 빼앗겨서 성장이 멈추고 생명력을 잃어 곡식을 심어놓은 밭이 가라지가 가득한 밭이 되고 만다. 그러나 본문에서 주인이 밭에 뿌린 좋은 씨앗은 가리지를 이긴다. 가라지에게 양분을 빼앗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라지보다 더 크게 자란다. 알곡이 가득한 밭이 되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것을 이야기 해주시려고 가라지 비유와 가라지 비유의 해설 사이에서 성장에 관한 겨자씨 비유와 변화에 관한 누룩비유를 말씀하신다. 주인이 심은 좋은 씨앗은 가라지보다 더 크게 자라나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가루 서 말에 조금 들어갔지만 반죽 전체를 변화시키는 누룩처럼 주인이 심은 좋은 씨앗은 가라지가 가득한 밭을 오히려 잘 영근 알곡들이 가득한 밭이 되게 한다. 주인은 밭에 이렇게 좋은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뿌린 좋은 씨앗이 가라지를 이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밭에 난 가라지를 뽑지 않고 두게 했다.
 
예수님께서 가라지를 이기는 좋은 씨앗으로 우리들을 이 땅에 심으셨다. 그러나 좋은 씨앗 주변에는 항상 가라지가 나기 마련이다. 오직 먹고 사는 문제에만 전념하게 만드는 염려 가라지, 신앙생활에 나태해지는 게으름 가라지,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세상을 따라가고 닮아가는 세속화 가라지가 우리 주변에서 자라난다. 좋은 씨앗으로 이 땅에 심겨진 우리들은 가라지를 이겨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만 염려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를 염려해야 한다. 그렇게 염려만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지런히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고 온갖 욕심과 죄악에 물들어 세속화되지 말고 복음의 능력으로 죄가 가득한 세상을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가라지를 이기는 좋은 씨앗들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믿는 우리들이 염려와 게으름과 세속화의 가라지를 이기는 좋은 씨앗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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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본문: 요 9:1~7
찬송가: 224장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았다.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명하셨다. 맹인은 말씀에 순종하여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눈을 뜨게 되었다. 당시에 유대인들을 비롯한 많은 지도층은 물론이거니와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맹인들이었다.
 
아담 이후로 태어난 모든 인류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들이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한 선악과를 먹음으로 영적인 눈은 어두워지고 육적인 눈이 밝아진 것이다. 이때부터 인간들은 육신의 눈은 밝아졌지만 영적인 눈은 어두워졌다. 날 때부터 영적인 맹인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된 우리를 고쳐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주신 분이다.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실로암을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예루살렘성의 사람은 성 밖에 있는 기혼샘의 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이 포위되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물이 없어 다 죽게 되기 때문에 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여 생명을 살린 것이다. 이물이 실로암물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 외에도 예수님은 보냄을 받으셨음을 계속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실로암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이다. 맹인들은 스스로 눈을 뜨지도 못하고 예수님께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하나님이 보내 주셔야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배운 사람만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본문은 날 때부터 맹인인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통해 말씀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로 나아와 십자가 보혈의 피로 죄와 영적으로 어두워진 눈을 깨끗이 씻음 받아 하나님나라와 구원자 예수님을 볼수 있는 눈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에게 믿음의 눈과 영적인 눈을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을 볼 수 있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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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게으름
본문: 잠 6:6~11
찬송가: 496장

인간은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주어진 시간, 주어진 물질, 주어진 환경 등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완전히 넘어설 수는 없다.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없애려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한계 때문에 주저앉을 필요도 없다. 주어진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부지런함이다.
 
6절을 보면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라고 한다. 왜 개미를 부지런함의 상징으로 말했을까?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개미는 스스로 일한다. 둘째, 개미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한다. 셋째, 개미는 쉬지 않고 움직인다. 게으름이란 무엇일까? 뭔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바쁘기만 하면 부지런한 것인가? 아니다. 게으름에도 차원이 있다.
 
첫째, 육체적인 게으름이다. 육체적으로 게으른 사람의 특징은 잠을 좋아한다. 일어날 때마다 실랑이를 한다. 또 다른 특징은 행동은 없고, 지나치게 편리함을 추구한다.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 19:24)
 
둘째, 정신적인 게으름이다. 정신적인 게으름의 특징은 핑계가 많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원망이 많다.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다.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사자가 밖에 있어서 못 나간다."(잠 22:13) 내가 안 나가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나빠서 나갈 수 없다고 핑계를 댄다.
 
셋째, 가장 심각한 게으름은 영적인 게으름이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한 달란트 그대로 가지고 오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나?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하신다. 게으르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왜 악하다고 했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게 맞게 주셨는데, 왜 나에게는 한 달란트만 주셨는가?'라며 하나님을 불공평한 분으로 인식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선물로 받지 않고, 결국 주어진 소명을 이루지 못한다.
 
게으름의 결과는 11절이다. 빈궁과 곤핍이 온다. 빈궁은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되는 것이고, 곤핍은 정신적 영적으로 아주 힘든 삶을 말한다.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실패한 삶이 된다는 것이다. 게으르면 경제적 어려움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고통이 예측 할 수 없이 신속하게 온다. 막을 수 없다. 더 이상 게으르지 말라. 환경을 탓하거나 다른 사람 원망하지 말라. 내게 주어진 기회, 내게 주어진 능력, 내게 주어진 현실 이대로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오늘 하루도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자. 그 때 새로운 길이 열린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오늘의 기도
우리는 게으르고 불평하며 최선을 다하지 못합니다. 주님을 만날 날을 기대하며 그날에 칭찬받는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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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맹인의 믿음
본문: 막 10:46~52
찬송가: 268장

성경에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들이 꽤 많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을 오랜 시간 따라 다닌 제자들이 변화산 아래에서 어떤 아버지의 아들 문제 앞에 무기력했던 일, 광풍 가운데에서 심히 두려워 했던 일이 그렇다. 눈 앞에서 예수님의 구원 역사를 수없이 경험했지 않은가. 그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친히 함께 하시고 있지 않은가. 그 예수님 이름으로 직접 능력을 행하고 경험하기도 했지 않은가. 그러한 제자들을 보며 예수님께서 믿음 없음을 매우 안타까워하신 것은 그들이 그때 믿음이 있었다면 얼마든지 능력을 맛볼 수 있는 상황이었음을 내포한다. 그러면서 우리 인생 가운데 있는 깊은 연약함들을 본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라도 약해지기 쉽고, 순간적으로 불신앙에 빠지곤 하는 것이다.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세 번이나, 심지어 저주하며 부인하지 않았던가.
 
본문의 맹인은 어디서 그런 믿음이 생겼을까, 어떻게 그렇게까지 담대할 수 있을까 다른 측면에서 또 이해가 쉽지 않다. 문맥상 그 맹인은 예수님을 만난 적도, 직접 예수님의 역사를 보거나 말씀을 제대로 들은 적도 없어 보인다. 기껏해야 다른 사람들을 통해 소문으로 들은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고 확신했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르짖을 수 있었을까 참으로 신기하다. 맹인이었기에 그렇게 절실했을 수 있었겠지만 사실 그 반대인 경우는 더 많은 것이다. 게다가 주변에서 꾸짖고 잠잠하라고 소리쳤을 때 쉽게 주눅들 수 있고, 포기할 법도 한데 오히려 더 크게 부르짖은 것이다. 제자들의 모습과 대조된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믿음을 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가운데 분명히 역사하시는데 맹인이라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고치시고 구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믿음 가운데 약속된 구원의 역사, 수많은 구원의 일들 중 하나인 것이다. 제자냐 맹인이냐, 오래 믿었느냐, 짧게 믿었느냐는 전혀 상관없다.
 
주님의 역사는 오늘도 다르지 않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 우주보다 더 크신 예수님의 목숨 값만한 대속과 나음을 믿고 맛보는 것이고, 오늘 나의 가장 큰 문제,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죄악까지도 맡기고 고침 받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맹인의 간절함, 치열함을 잃어버린 채 주님을 믿는다 하고 있고, 구원의 역사들을 기대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우리의 모습은 본문의 맹인보다, 연약한 제자들과 비슷하다. 이제라도 말씀대로 맹인같은 믿음의 열정, 어떠한 방해에도 더 담대할 수 있다면 말씀대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기도
맹인같은 믿음의 간절함, 믿음의 용기와 어느새 멀어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구원의 역사, 복음의 능력 조금도 변함없사오니 더욱 간절하고 치열하게 믿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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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예수님의 풍성한 생명
본문: 요 15:1~8
찬송가: 370장

어떤 생명을 소유하느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것이다. 예수의 생명을 가졌다면 예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본문은 하나님은 농부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라고 말씀 하시며 비유를 통해 귀한 비밀을 말해준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인가?
 
첫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되어 있다 가지는 나무에 연합되고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3절을 보면 깨끗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 근거는 무엇인가? 깨끗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복음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함께 가지된 우리를 직접 깨끗하게 하신다. 깨끗하게 되었다는 말은 예수그리스도의 DNA에 형성되고 합당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포도나무의 진액이 가지된 우리에게 흘러 들어와 예수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도록 믿음 안에 거하며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둘째, 연합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삶을 살아간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이 분부한 말씀이 우리 속에서 생명력으로 일어난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한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이 내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신앙이 될 때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목적으로 우리 생명의 근원이 되고 기쁨이 될 때 그 능력은 결국 열매이다. 열매는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나타나기도 하지만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나 성도들과 함께 선한 영향을 끼치며 나타나기도 한다.
 
셋째, 능력 있는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포도나무의 가지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정결하게 포도나무에 계속 붙어 있기만 하면 좋은 포도열매가 맺히게 된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에서 열리는 열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며 성령의 열매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을 때 주시는 복음의 영광이며 비밀로 바로 이 열매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끊임없는 공급과 보호를 받고 교통을 나누는 관계 속에 몸과 마음으로 반응하며 예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며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오늘의 기도
항상 주안에서 복음의 능력 가운데 예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