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와 나 사이의 “출입 허가 증명서”>


1. 우리의 ‘기억’은 고정되어서 단지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은 자서전적이며, 언제나 구성되고 재구성된다. 한국에서 텍사스로 돌아와서 짐을 풀며 지난 두 달여의 한국에서의 시간과 공간을 회상한다. 강연장에서 강연자로 갈 때, 강연자의 ‘소개’는 대부분 나의 ‘외부성 (exteriority)’에 대한 것이다. 인터넷에서 슂게 찾아낼 수 있는 학력, 경력, 저서 등에 관한 것이다.
2. 그런데 이번 나의 기억에서 강렬한 자취를 남긴 ‘사건’이 있었다. 6월 28일(토)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 미소의 편지들> (행성비, 2025) 의 출간 기념 강연이 있었다. 강연에 앞서 강연자에 대한 소개 시간에 행성비의 대표이신 림태주 대표님이 나오셨다. 그런데 흔한 나의 학력이나 저서 등에 대한 ‘객관적’ 소개가 아니었다. 그의 소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편지’였다.



“My dear 남순,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인간은 편지를 쓰는 존재입니다. 그리운 사람으로부터 정다운 편지를 받으면 절로 미소를 짓게 됩니다. 편지는 사람의 마음을 열고 들어가는 출입 허가 증명서 같은 것입니다. . . “
3. 편지가 “사람의 마음을 열고 들어가는 출입 허가 증명서”라니.
나는 편지에 대한 이렇듯 멋진 ‘존재론적 표현’을 보지 못했다. 나는 이 편지-소개를 들으며 나의 강연을 위한 모임은 이미 충일한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나도 모르게 일어나서 벽에 기대어 나의 생애 최초의 ‘편지-소개’를 듣고 있었다.
4. 3쪽이나 되는 편지-소개는 우리가 주고받는 편지가 서로의 존재에 대한 “출입허가 증명서”로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매듭을 짓고 있다.
“. . . 인간의 삶에는 너무 벅차고 황홀해서 말로는 다 못 하는 일들이 종종 생깁니다. 그럴 때 인간은 그런 일을 감당하려고 가만히 서로를 껴안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이 편지는 곁에 있어도 그리운 당신을 껴안는 나의 열렬한 포옹입니다. 아마도 여기에서의 ‘나’는 ‘너’와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일 것이므로 우리 모두로서의 나일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으로
우리의 미소로
우리의 따뜻한 호명으로 남순, 당신의 존재를 격렬하게 포옹합니다.
바라건대, 당신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것만큼 당신도 당신으로 인해 행복하기를 염원합니다.
우리 곁에 오래 머물도록 당신의 평안과 건강을 걱정하며 기도합니다.”
5. 나는 3쪽이나 되는 이 ‘편지-소개’를 들으며, 행복감의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출입허가증명서”를 받으며, 그리고 글로 쓴 편지로는 주고받을 수 없는 “열렬한 포옹” 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 나/우리는 행복의 씨앗을 품게 되는 것이다. 강연장에서 이 편지-소개로 강연의 문을 연 장면을 경험했던 분들은 모두 각기 다른 기억과 느낌을 가지게 되셨을 것이다. 글의 언어, 말의 언어, 그리고 몸의 언어—이 세 언어의 세계를 모두 경험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나는 온 존재로 경험하게 된 사건이 바로 6월 28일 출간기념강연장에서 일어난 것이다.


6. 얼굴과 얼굴이 만난 유일무이한 ‘사건(event)’의 경험을 이렇게 글의 언어로 전하는 것은 언제나 지독한 한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경험의 한 자락의 자취라도 남기기 위해서 끊임없이 글의 언어를 남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모든 경험과 이야기들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 속의 얼굴들은 그러한 ‘사건’의 한 자락이기도 하다.
7. 2025년 6월 28일 내가 받은 ‘편지-소개’는 내 삶의 여정에서 20여 개가 넘는 나라에서 셀 수도 없는 무수한 강연을 해 오면서 내가 받은 가장 찬란한 소개였다. 6월 28일 강연장에서 벌어진 ‘사건’의 한 자락을 나의 동료인 여러분들과 나눈다. 수십 장의 사진을 모두 올려도 분위기를 느끼고 경험하기에 충분하지 않지만, 지극히 일부만이라도 이곳에 나눈다.
내가 <모든 존재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의 부제로 사용한 “미소의 편지들”의 의미는 결국 나의 동료인간들에게 보내는 “출입 허가 증명서”인 것이다. 비록 수취인 불명의 무수한 ‘너’ 들에게 보내는 편지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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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강연회의 시작전과 후에 들리는 음악 선곡을 위해서 수 많은 음악을 들으며 9개 이상의 선곡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신 행성비의 이윤희 편집장님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 강연전에 오셔서 객석에 앉아계셨던 분들이 들으셨을 음악은 나의 책에 등장하는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 나도는 "편지의 이중창" (책 83쪽)과 베토벤 현악사중주 (책, 52쪽) 등을 포함한다. 마지막 강연이 끝난 후 나오는 음악은 내가 좋아하는 "Piano Man"이다. 가사가 들어가지 않은 악기연주들만을 선곡하셨다. 전체 사진을 찍을 때 배경음악이 바로 "Piano Man"이라는 것을 눈치채신 청중들이 계셨기를.
- 강남순 교수





